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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경의 뮤지컬 라이프] 성당은 내 노래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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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경의 뮤지컬 라이프] 성당은 내 노래의 고향

[난장 스테이지] 뮤지컬배우 이연경이 말하는 그녀의 무대

아빠는 직업 군인이셨다. 우리 가족은 내가 어릴 적부터 짧으면 6개월에서 1년, 길면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대부분 강원도 시골이었다. 딱히 노래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기에 성당은 맘껏 노래하고 또 새로운 곡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래서 어느 곳의 어떤 성당을 가던지 성가대를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10명 남짓도 안 되는 아이들은 나름 성가대라고 한 쪽에 마련된 성가대 석에 앉아 아기 제비들처럼 재잘거렸다. 수녀님이나 혹은 군인 아저씨의 지휘에 맞춰 다들 열심히 했다. 미사 후에 군인아저씨 방에 가서 두꺼운 가요전집을 이리저리 뒤지며 기타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것도 즐거웠다.

▲ ⓒnewstage

그 방에선 군인아저씨에게서만 나는 냄새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담배냄새였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난 그 냄새까지도 좋아했다. 그 방 벽지마다 짙게 베인 니코틴 냄새는 추억이 되어 지금도 노래하는 즐거움과 뒤섞여 향수처럼 코끝에 아른댄다.

엄마 아빠와 함께 교중미사에 갈 때면 특별한 경험을 하곤 했다. 군인 성당은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한 쪽에는 사병들이 앉았고 다른 한 쪽에는 군인가족들이 앉는다. 시골 부대의 작은 군인 성당이기에 성가대를 찾기 힘들지만 대신 사병들로 구성된 남성 합창 성가대가 있었다. 성탄절에도, 부활절에도, 성모의 밤에도 이제 갓 20살이 된 청년들의 중저음 노랫소리는 작은 성당을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가득 채웠다. 이제는 찾아듣기 힘든 그 합창소리. 낮으면서도 갓 변성기를 지난 청년들의 풋풋한 중저음이 아직도 귓가에 잉잉댄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아빠와 떨어져 엄마와 함께 서울로 오게 된 이후 나의 성가대 활동은 더욱 활발해 졌다. 성가대 외에도 언니 오빠들이 하는 밴드에서 노래도 하고, 교구 축제에 참여해 큰 무대에도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성가대 활동을 통해 접한 다양한 음악들은 나에게 시야를 넓혀주었고 성당에서 노래하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일요일이면 일찍부터 성당에 가서 노래하고 노을이 짙어져 땅거미가 내릴 때쯤 마치곤 했다. 성당을 감싸 안은 노을을 뒤로하고 기타를 둘러 맨 오빠들, 악보를 든 언니들과 허기진 배를 달래러 분식집으로 향했던 즐거웠던 기억이 아직도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그 시절엔 그 어떤 고민도 걱정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노래가 좋아 온 종일 그 속에 빠져 살던 때였다. 되돌아보면 나의 노래가 시작된 곳이 성당이고, 성당이 나의 연습실이자 나의 무대였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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