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우수한 종과 열등한 종으로 구분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 BBC는 10만년 뒤 인류가 '잘난 인종 대 못난 인종' 두 가지 종으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전한 바 있다(2006년 10월 17일). 영국 케이블 채널 '브라보'의 의뢰로 1000년, 1만년, 10만년 뒤 인류가 어떻게 진화할지 연구한 런던 정경대 다윈연구센터의 올리버 커리 박사(Evolutionary theorist Oliver Curry of 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는 인류가 유전적으로 우수한 집단과 열등한 집단으로 나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에 따르면 1000년 안에 남자는 좀 더 키가 커지고, 수명은 120년까지 연장될 것이라고 한다. 건강 지표상으로는 더 젊어지고 각진 턱과 낮고 굵은 목소리를 갖고, 마치 운동선수처럼 보이며, 생식력도 더 세지고 더 큰 생식기(페니스)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여성은 더 늘씬해지고, 털 없는 피부와 큰 눈, 더 봉긋한 젖가슴, 빛나는 머리 결을 가지게 된다. 인류는 인종간 뒤섞임으로 커피색깔을 지닌 인간으로 변모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만년 경에는 일상적 삶의 필요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된 기계장치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인류는 퇴화해 가축과 닮아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고, 사랑, 공감, 신뢰, 존경과 같은 감정들 역시 소멸될 것이라는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더 먼 미래인 10만2000년 쯤 결국 인류는 상류층, 고학력층, 영양상태가 좋은 사람들을 배우자로 선호함으로써 유전적 불평등이 점차 커지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뚜렷하게 차이를 지닌 '잘난 인종 대 못난 인종' 2개의 인종이 출현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강남이 서울대를, 서울대가 대한민국을 지배한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새로운 계급이 도래하고 있다.'강남민국인'과 '비강남민국인'이다. 강남을 지배하는 자들이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자들로 등장해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오늘날 이 땅의 모든 문제가'서울 강남'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이 두 계급은 계속 섞일 수 없을 듯하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인간의 소질과 외모까지도 지배하는 시대다. 가난한 자가 강남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들이 다시 자신들과 동등한 집단을 만들어내면서 우수한 형질을 보존한 종자들을 계속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잘난 강남민에게선 강남민이, 못난 비강남민에게서는 비강남민이 나올 것이다.
이러한 되물림을 보여주는 지표가 바로 학벌주의다. 강남은 대한민국의 공교육 체제를 무너뜨리고, 사교육 시장을 통하여 자식들을 교육한다. 이들은 '학원 공화국'을 세워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자식을 가르친다. 서울 지역의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 지출은 32만1000원으로 읍면지역의 16만원보다 2배나 높았다. 서울 지역 전체평균이 그렇다는 것이지, 강남만을 표본으로 잡으면 읍면지역에 10배 이상, 아니 몇십배 높을 것이다.
그 결과 부모의 종자 성분이 좋은 강남 출신들이 서울대학에 들어가는 확률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반면 가난한 자들이 서울대학에 입학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개천에서 용난다'는 옛말은 그저 옛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매해 발표되는 서울대 합격자 수는 무엇을 말하는가? 서울대에 합격한 서울 시내 일반고 학생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강남·서초·송파·양천구 등 이른바 '교육특구' 출신이다.
<서울신문>이 국회에서 입수한 '2011학년도 서울대 합격자 출신 고교'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체 합격자 3255명 중 서울 출신이 1157명(32.5%)를 차지했다. 또 서울 지역 일반고 출신 합격생은 모두 686명이며, 이 가운데 강남 3구 출신이 292명으로, 서울 지역 전체 합격자의 42.5%다. 여기다가 외고·과학고 출신 합격자 비율은 22.6%(737명)에 달한다. 이는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 이미 분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영웅 숭배가 아닌 인종 숭배, 그 덫
일찍이 영국의 사상가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셰익스피어를 두고 영국인에게 이렇게 묻고 답했다. "만일 외국 사람들이 우리에게 묻기를, 당신들 영국인은 당신네 인도 제국을 버리렵니까, 혹은 당신네 셰익스피어를 버리렵니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도 제국이야 있든 없든 우리에겐 셰익스피어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인도 제국은 언제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셰익스피어를 버릴 수 없습니다."(On Heroes, Lect. III, p. 109 아래)
칼라일을 영국의 '제국주의의 아버지'로 평가하든, '국가주의 옹호자'로 평가하든 그는 영웅숭배를 주창했던 사람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칼라일은 한 민족의 위대성을 그 도덕적 생활과 지적 성취의 깊이에서 보았지, 그 정치적 대망(political aspirations) 속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힘이 정의'라는 것을 칼라일이 주장했다고 해서 그 '힘'을 물리적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힘'이란 항시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영웅숭배란 언제나 도덕적인 힘에 대한 숭배였다. 그의 경우에 영웅은 '통찰력'과 도덕적 '성실성'을 가져야만 한다.
19세기 후반 칼라일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불란서의 귀족 출신인 고비노는 <인종불평등론>이란 저서를 통해 영웅 숭배를 '인종 숭배'로 바꿔놓았던 장본인이다. 그는 '역사는 오직 백인종들과의 접촉에서 생긴다'는 이론을 제일원리로 받아들였던 자이다. 그래서 그는 중국문화까지도 중국인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인도에서 이주해온 종족이 중국을 침입하여 이를 정복하고 중화제국의 기초를 닦은 크샤트리야 족의 소산으로 몰아 부친다.
고비노에 의하면 아메리카의 인디안 족은 독립된 인종이기보다는 흑인종과 황인종의 혼합물일 따름이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잡종들이 그들 자신을 다스리고 조직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겠냐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19세기 후반 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유렵의 사상가들은 뿌리 깊은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론자로 대표되는 대표적 철학자 칸트조차도 <물리적 지리학(Physische Geographie)>을 비롯한 여러 강의록에서 서양인의 뿌리 깊은 인종적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
"흑백의 두 인종 간의 정신적 능력 차이는 피부색 차이보다도 더 큰 것처럼 보인다. (중략) 인간성은 백인 종족에서 가장 큰 완성 상태에 있다. 황색의 인도인들은 보다 떨어지는 재능을 가졌으며, 흑인(니그로)들은 더 낮고, 가장 낮은 종족은 아메리칸 인종 중의 일부이다. (중략) 그들(백인)은 언제나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이다."
학벌 차별 그 이상, '인간의 계급화'
만일 아직도 인격적, 도덕적 영웅 숭배가 아니라, 인종적 숭배를 받드는 자들이 살아 있어서, 그런 태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이 시대에도 우리 주위에 남아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땅에 이와 유사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지 않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는가? 있다.
이 땅에는 벌써 사라졌어야만 할 '인종 숭배'의 유산이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고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또 그런 신화적 사고 방식에 젖어 살아가는 자들이 이 땅의 정치가로, 혹은 다른 여러 방면의 지도자로 군림하면서 이 땅의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몇 년전 국가인권위원회가 개최한 '입사시 학벌차별 개선을 위한 토론회' 에서는 국내 4대 기업의 하나인 A사가 대졸 신입사원을 뽑으면서 적용해온 '신입사원 서류전형 내부 사정기준'이 공개됐다. 이 기준에 따르면 출신대학이 차지하는 기본점수가 전체 사정기준에서 가장 큰 비중인 35%를 차지하고 있고 대학별로도 큰 차등을 두고 있어 '학벌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대기업들의 공언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입사시험에서 '출신대에 따라' 인간의 평가를 달리하고 출신대별 점수 가중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건 추잡한 학벌차별을 넘어선 '인간의 계급화'이고, 계급화를 넘어선 또 다른 의미의 '인종차별'이고, 아무런 도덕성을 담보하지 못한 더러운 '영웅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출신대학에 따라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계량화된 점수를 이마에 부치고 살아가고 있고, 살아왔던 셈이다. 입사시험에서 '출신대에 따라' 인간의 평가를 달리하고 출신대별 점수 가중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추잡한 학벌차별을 넘어선 '인간의 계급화'이고 또다른 의미의 인종차별이다. 출신대별 점수가 한 인간을 평가하는 척도로 작동하면 우리는 그들의 평가 기준에 따라 정해진 인생의 '몫(moira)'(운명)을 살아가는 노예가 된다.
사회계층의 양극화, 그 이후엔 유전자의 양극화?
호메로스는 <일리아스> 2권에서 아가멤논을 비난하는 수다쟁이 테르시테스의 외모를 두고 "그는 일리오스에 온 사람들 중 가장 못생긴 자로 안짱다리에다 한 쪽 발을 절었고, 두 어깨는 굽어 가슴 쪽으로 오그라져 있었다. 어깨 위에는 원뿔 모양의 머리가 얹혀 있었고, 거기에 가는 머리털이 드문드문 나 있었다"(215-220행)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인의 기준에 보면 영웅들은 강건하고 아름답고, 도덕적으로 뛰어나고, 올바른 일을 추구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남성다워야 한다. 그에 반하여 그에 못 미치는 치졸한 보통의 인간들은 위에 묘사되듯이 늘 이와 대조적으로 추해야만 한다. 게다가 신들 중에도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꼽추인 신까지도 있다. 그러니 그 신적 역할마저 미미할 수밖에 없다. 인간만도 못한 신들도 있다는 것이다. '추하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으레 모든 점에서 부족하고 열등한 종(種)을 나타낸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잘 생긴 자와 못난 자라는 유전적 두 형질의 인간으로 나누어지는 시대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인간의 소질과 외모까지도 지배하는 시대 아닌가. 가진 자는 가진 자와 결합하고, 아름다운 자는 아름다운 자와 결합하기 마련이다.외모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세대이니 말이다. 아름다운 자는 추한 자와 결합하지 않을 것이고, 부자는 가난한 자와 결합하지 않을 것이고, 키 큰 자는 키 작은 자와 결합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건 사회 계층의 양극화를 넘어 유전자의 양극화라는 현상을 가져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비극적 미래이고, 종국에는 회복 못할 비극적인 인간적 재앙을 초래할는지도 모른다. 경제력이 있는 자들은 성형을 통해서 좀 더 아름다워지고, 생활의 핍박으로 벗어난 자들은 남는 여유 시간을 육체적 운동을 통해 보다 강건한 자들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고 탈락한 자들은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져 열등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계층들은 교육, 경제, 체력과 같은 여유분을 통해 획득된 우수한 '사회적 형질'을 보존하게 됨으로써, 계속 지배적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설령 획득 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고 해도 사회적 권력과 여유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발전된 의학의 혜택 덕분으로 '새로운 인간종'으로 성형되어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정녕 이런 시대가 우리에게도 도래하고 있는 것인가? 사회적 계층의 양극화의 첨예화와 우수한 종자와 열등한 종자 간의 불평등을 심화하고도 우리의 미래는 안전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과 소외된 계층을 바라보면서, 이 구조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책이 무엇일 수 있는지 되짚어 보는 반성의 시간이 우리에게 남아 있었으면 한다.
대학 서열화 부추겨온 언론들의 장삿속
그 동안 줄기차게 '학벌없는사회'는 대학 서열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마치 대학의 서열은 필요한 듯, 아니면 없기라도 한 듯 행동하던 '한국대학교육협의회(회장 이기수 고려대 총장)'는 지난해 '언론사 대학평가에 대한 대학의 입장'이라는 결의문을 통해 '언론사가 주관해 시행중인 대학평가는 전문성과 타당성이 부족하며, 대학의 서열화를 조장해 대학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며 '대학을 서열화하는 평가에 협조할 수 없으며 순위 발표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는 바와 같이 언론사의 대학평가는 2005년 중앙일보가 처음 시작했으며, 조선일보 이에 가세하고, 최근엔 다른 신문사도 이에 참여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왜 언론사들이 각축을 하면서 대학평가에 나서려 하는 것일까? 진정한 의도는 모르겠으나, 무언가 장사가 되니 그러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제적 실익이 없는 곳에 경비를 쓰면서 나설 턱이 없지 않은가? 대학은 앞 다투어 대학 서열의 선두에 서려고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대학평가를 하려는 언론사에 자신의 대학 광고 하나라도 마지못해 더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서울 8개 대학 교수협의회 연합회'도 "각 대학의 특성이나 비전, 전략을 고려하지 않은 채 획일적으로 줄을 세우는 언론기관의 평가로 대학의 건강한 발전이 저해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대학 '줄세우기식' 평가를 하지 않으려면 대학이 먼저 학생들을 점수로 줄 세워서 뽑으면 안 된다. 스스로 대학 서열을 조장하고 만들어가면서 대학 서열을 반대한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보아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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