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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거장, '아이폰'으로 그림 그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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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거장, '아이폰'으로 그림 그린다고?

[아까운 책] 마틴 게이퍼드의 <다시, 그림이다>

'프레시안 books' 138호는 '아까운 책' 특집호로 꾸몄습니다. 지난해 가치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고 우리 곁을 스쳐가 버린 숨은 명저를 발굴해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열두 명의 필자가 심사숙고 끝에 고른 책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도 함께 '나만의 아까운 책'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 작업은 출판사 부키와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여기 공개되는 원고를 포함해 총 47편의 서평이 실리는 단행본 <아까운 책 2013>이 오는 5월 초 부키에서 발간됩니다. <편집자>

"우리가 말을 타고 출근하지 않듯이 요즘 미술가들은 그리지 않는다."


2004년 터너미술상을 수상한 설치미술가 제레미 델러는 수상식장에서 이런 요란한 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지는 않다. 디지털 혁명의 가속화되어 미디어 아트의 현재와 미래의 타당성을 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많은 구식 사람들이 '말을 타고 출근'하고 있으니 말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호모 픽토르(HOMO PICTOR, 그림 그리는 인간)들과 그들의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넘쳐나고 있다는 뜻이다. 21세기에도 사람들은 왜 '구태의연하게' 그림을 그릴까? 그림은 앞으로도 존속할 수 있을까?

나는 장르에 대한 특별한 편식이 없다. 장르나 매체가 좋은 작품에 대한 판단 기준이 아니다. 어떤 작품이든지 신선하고 아름다우면 다 좋다. 중요한 것은 예술적 가치일 뿐이다. 2009년 10월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50여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인 12m가 넘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거대한 풍경화, '와터 부근의 큰 나무들(Bigger Trees Near Warter)' 시리즈로 삼면을 둘러싸인 것.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던지! "호크니 속에 내가 있다"며 그 자리에서 한국의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내며 온갖 호들갑을 다 떨었다. 좋았으나, 당시에는 이 '큰 풍경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 <다시, 그림이다>(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디자인하우스 펴냄). ⓒ디자인하우스
눈의 '오르가즘(반 고흐의 표현)'을 느끼게 한 이 멋진 그림의 비밀을 충분히 알게 된 것은 2012년 발간된 호크니와의 대담집 <다시, 그림이다>(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디자인하우스 펴냄)를 읽고 나서다. 이 책은 2006년부터 <블룸버그 뉴스> 수석 미술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가 호크니와 나눈 대화를 기반으로 쓰였다. 연대기가 아니라 주제별로 장을 나누고, 두 미술전문가가 나눈 실제 대화에서는 포함되지 않았을 친절한 주석이 포함이 되어 있다. 대담집과 평론집의 중간 단계에 있는 글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이다. 1937년 영국 출신인 그는 오랜 미국 생활을 접고 지금은 영국 북부의 시골 마을 브리들링턴에서 프랑스인 애인과 함께 살고 있다. 호크니는 1960년대 중반 미국 로스 앤젤레스로 이주해서 수영장의 맑은 물을 그린 '첨벙' 시리즈와 인물화로 유명세를 얻었었다. 30여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그는 다시금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에 매료되었고, 이것이 최근 작품들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더 열심히 자연을 관찰한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는 호크니의 삶과 예술의 핵심적인 행위이다. 평범한 우리도 많은 자연, 사물, 인물을 보고 느끼고, 본능적으로 그 감동을 기록하고 싶어한다. 애잔하게 지는 저녁 놀, 여린 들꽃송이, 맛있게 차려진 음식을 향해 열심히 셔터를 누르는 것은 나만의 체험이 투사된 나만의 이미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미술은 이렇게 인간의 눈이 느낀 쾌감을 그대로 옮기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본 것을 선과 점, 색 얼룩, 붓 자국 등의 흔적으로 옮기는 것"의 매력이 바로 화가들, 호모 픽토르들이 계속 존재하는 이유이고, 또 재능이 좀 부족한 우리가 그들에게 여전히 감탄하는 소박하지만 분명한 이유이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젊은 시절을 보낸 1960~70년대는 여전히 회화가 사진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정립을 하던 시대였다. 그런 상황을 반영하듯, 그는 많은 부분 사진과 비교하면서 회화를 설명한다. 호크니는 인간이 카메라처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본다고 말한다. 나아가 사진을 찍을 때보다 그림을 그릴 때에 사물과 자연을 더 많이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사진은 순간의 대상을 이미지로 옮기지만, 그보다 복잡한 단계를 거치는 회화에서는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회화는 나이든 사람의 예술이다"라는 속담을 즐겨 인용한다. 순간의 시각을 담아내는 사진과 달리 회화는 삶의 경험,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이 쌓이는 것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경험 전부라고 생각하는 '꼰대'의 생각이 아니다. 경험이 쌓이는 것만큼이나 새로움에 대한 열린 감각이 중요하다. "참신한 생각과 관찰을 계속하면서 생각과 관찰을 통해 이전의 것들을 조정"해나가는 과정, 그럼으로써 더 성숙하고 깊어질 수 있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이전의 것들을 버리고 나가는 데에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호크니는 젊은 날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진군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 풍부하게 세상을 본다는 건 "눈이 마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원리이다. 서양화가 호크니는 다양한 작품을 시도하면서 이 원리를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었다. 서구의 선원근법은 인간의 눈의 법칙이 아니라 렌즈 사용에 근거한 광학의 법칙일 뿐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이런 단언 뒤에는 그의 투철한 실험정신이 있다.

호크니는 1970년대 후반부터 사진 콜라주 작업을 해왔다. 특히 1983년 '교토 료안지 사원의 젠 가든을 걸으며'라는 사진 콜라주 작업으로 그는 "서구의 원근법이 제거된 사진"을 만들었다고 느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국 미술'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서양의 풍경화에서 보는 사람은 늘 그림의 틀 밖에서 그림을 응시하는 구조에 머물러 있었다. 호크니는 동양 회화를 통해서 인간이 보고 느낀 실제 세계를 체험과 함께 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양 회화에 등장하는 와유(臥遊)의 개념이 그를 매료시킨 것이다.

풍경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곳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어서 그는 아주 큰 그림을 그렸다. 50개의 캔버스가 연결되어 만들어진 대형 작품들이 전시장 삼면의 벽에 설치되어 관람객을 둘러쌌다. 이것이 2009년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나를 열광시킨 호크니의 기적이었다.

물론 이 작품은 우리가 아는 동양 회화와는 거리가 멀다. 다만 서양미술사를 500여 년 넘게 지배해온 시각 프레임을 호크니가 다른 방향에서 해체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예술에는 늘 정답이 없다. 서양 사람인 호크니가 동양 회화에서 얻은 것을 자기 식으로 잘 풀어냈다면 그것 역시 또 하나의 미술사적인 성공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나는 불편한 심경을 말할 수밖에 없다. 호크니나 책의 저자 모두 의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호크니는 여러 번 "중국의 두루마리" 그림이라는 뭉뚱그린 표현을 한다. 분명 "중국의 두루마리" 그림도 예술가의 작업이고, 그에겐 이름이 있을 텐데 말이다. 호크니가 언급한 작품은 쉬양이라는 중국 작가의 '건륭제의 남쪽 순행'(1770년)이라는 작품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억력의 부족이 아니다. 타문화에 대한 서구인의 몸에 배인 우월감이 은연중에 드러난 대목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점이 불편하면서도 또 부끄럽다. 호크니의 태도와 짝을 이루는 것은 서구인의 시각을 되받아서만 동양의 것을 주목하는 촌스러운 사대주의이다. 반성할 일이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림이다>는 회화에 관한 많은 생각을 가능케 한다. 다시 호크니로 돌아가서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회화의 발전에 있어서 "서구의 큰 실수"는 바로 선원근법의 절대화였다. 원근법은 고정된 장소에서 멈추어서 소실점을 바라보고 있는 정적인 주체를 설정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정립된 서구의 원근법은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광학 법칙에 입각한 것이라고 호크니는 주장한다. 2001년 발간한 <명화의 비밀>(데이비드 호크니 지음, 남경태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전 이미 공공연하게 다양한 광학렌즈가 그림을 그리는데 사용되었음을 증명한다. 렌즈의 사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회화, 사진, 영화가 모두 같은 시대의 것이며, 사진과 영화도 그림의 넓은 역사로 포함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호크니는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새로운 매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유화나 종이 드로잉 작품 이외에도 사진 콜라주, 영상, 아이폰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를 동시 사용하여 작업을 해왔다. 1980년대는 복사기와 팩스를 이용한 그림을 시도했었고, 2010년에는 아이폰으로 그림을 그려서 전시를 하기도 했다. 70대 중반에 이른 노작가의 첨단매체를 활용한 시도는 참신하게 받아들여졌다.

서두에 인용했던 "우리가 말을 타고 출근하지 않듯이 요즘 미술가들은 그리지 않는다"는 제레미 델러의 말은 버릇이 없다는 점에서만 파격적이다. 영상 매체는 새로운 매체이고 회화는 낡은 매체라는 생각이야말로 낡은 생각이다. 호크니가 실천으로 보여준 것처럼 모든 매체는 "우리가 세계 속에서 움직이고 세계를 응시하는 방식 그대로를 그린 그림"이라는 절대 목표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 변화무쌍한 우리의 움직임 속에서 세상은 새롭게 열리고 인지된다. 세상의 풍경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매일 매일의 내가 변화하듯이 부단한 변화 속에 있다. 세상의 풍경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거기서 눈의 '오르가즘(반 고흐의 표현)' 을 느낄 정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호크니가 말하는 "우리가 세계 속에서 움직이고 세계를 응시하는 방식 그대로를 그린" "세계에 대한 완벽한 그림"이 어떤 형식일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예술가들이 계속 필요한 이유이다. 예술가들이 새롭게 해석하고 손으로 옮겨 그린 세상의 크고 작은 아름다움을 우리는 끊임없이 탐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림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어떤 형식으로든 계속될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명화의 비밀>(데이비드 호크니 지음, 남경태 옮김, 한길사 펴냄)
데이비드 호크니는 서양회화사의 주요 작품들을 화가의 입장에서 꼼꼼히 검토했다. 명화 속에 숨겨진 '시각'의 문제를 광학적 렌즈의 사용이라는 문제로 접근한 문제적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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