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책을 읽을 때, 미술 작품과 관련된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세 번의 읽기 여정을 통과할 수 있다. 이제 막 첫 여정이 끝났다. 아직 어떤 언어도 통과하지 않은 상태의 이미지가 우리를 흔들고, 스쳐 지나간다. 어떤 이미지들은 아직 멀리 있고, 어떤 이미지들은 빗방울보다 빠르게 떨어져 흘러가버린다. 책을 덮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 ▲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얼마의 시간이 흐른다. 미술 작품들과 작품을 고르고 작품에 이야기를 부여한 작가를 만난다. 조심스럽게 그의 언어를 더듬는다. 만질 수 없는 그림들이 벽에 걸린다. 말이, 글자가, 벽에 못을 박고, 그림을 걸고, 조명을 비추고, 미술관 복도와 복도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한 장씩 허공을 떠돌던 그림들이 미술관 벽에 걸린다. 다른 바탕에 걸린 그림들이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이하 '영혼의 미술관'으로 표기)에 서 있고, 보통의 바탕은.
"앨리스는 신을 믿지 않았고, 예술과 사랑이 신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영화가 '나만 이런 감정을 겪으며 이 거리를 보고 카페에 앉아 있는 게 아니야……'하는 생각을 통해 고립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듯이, 사랑은 그녀가 '당신도 느끼나요? 정말 근사하죠……' 할 때 '내가 바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하고 속삭일 수 있는 사람을 희망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한 영혼이 다른 사람의 영혼과 미묘하게 닮았음을 발견한다는 것의 실체다." (<우리는 사랑일까>(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은행나무 펴냄, 36쪽))
예술과 사랑에 대한 앨리스의 생각은 보통이 지금까지 해온 여러 가지 작업의 바탕으로 보인다. <여행의 기술>(정영목 옮김, 청미래 펴냄), <불안>(정영목 옮김, 은행나무 펴냄), <행복의 건축>(정영목 옮김, 청미래 펴냄), <일의 기쁨과 슬픔>(정영목 옮김, 은행나무 펴냄),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박중서 옮김, 청미래 펴냄), 그리고 <영혼의 미술관>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예술이나 여행, 철학이나 건축, 종교는 공통적으로 이용된다. 삶을 고양시키는 도구로. 치유로서의 문화로.
여기서 <영혼의 미술관>의 원제가
"예술의 핵심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예술과 관계를 맺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예술이 우리를 도와 더 나은 삶, 더 나은 자아로 이끌어준다는 확신이다. 만약 예술에 그런 힘이 있다면 이는 예술이 심리적 취약점을 폭넓게 보완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영혼의 미술관>, 64쪽)
| ▲ <불안>(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우리는 이 미술관의 복도에서 예술의 목적에 대한 보통의 질문과 답(예술의 일곱 가지 기능,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 진단과 처방(어떤 종류의 예술을 창작해야 하는가? 정치 미술은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기획과 의뢰서(예술작품은 어떻게 전시해야 하는가, 진보한 자본주의를 향하여)등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곧 깨닫게 된다. 치유로서의 예술. <영혼의 미술관>을 보통의 예술론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예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술에 대한 또 하나의 목소리, 또 하나의 질문을 갖게 되었다.
보통의 함수, f(우리)
질문에 대해 말하기 전에. 보통의 질문과 대답의 방식에 대해 말해보자. function에는 함수라는 뜻 외에도 기능, 효용, 의식 등 다양한 의미가 있다. 보통의 책들에서 함수를 떠올리게 된 것은 기능이나 효용이라는 의미의 function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통이 세상을, 인간의 삶을, 예술을 바라보는 확고한 신념이 어떤 도식, f(x)=x+y와 같은 함수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막연하고 아득했던 거대한 영토가 어떤 지도 위에, 좌표 아래 놓인다.
보통은 어떤 느낌들, 분명히 존재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의 과정들을 언어화한다. 소설을 제외한 보통의 거의 모든 책의 주어가 '우리'라는 사실은 보통의 함수에 '우리'를 대입하면 어떤 장면이 산출되는 환영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 f(우리)는 대상의 기능(function)을 향해 어떤 가정(fiction)의 장면을 통과한다. for you. 당신을 위해. '우리'를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보통의 함수, f(우리)는 몸을 바꾸며 온다. 때로 여행을 떠나고, 때로 집을 짓고, 때로 미술관 복도를 서성이며.
우리는 우리가 언제든지 한없이 약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다시 한 뼘. 우리는 쉽게 <불안>쪽으로 기울어진다. 이때 보통의 '우리'는 '나'와 '너'를 지우고 모든 불안이 발꿈치를 들고 홀로 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를 지우고 '나'와 '너' 사이의 세계, 보통의 세계에 떠있다. 이때 보통의 슬픔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지만 누구의 것도 아니기도 하다. 그것이 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명하고, 동시에 그것이 진짜 '나'는 아니기 때문에 안도한다.
| ▲ 에드워드 호퍼의 <자동 판매식 식당(Automat)>(1927). (출처 http://www.smithsonianmag.com/) |
"<자동 판매식 식당>은 슬픔에 대한 그림이지만 슬픈 그림은 아니다. 이 그림은 위대하고 우울한 음악 작품과 같은 위력이 있다. (중략) 이 여자와 비슷하게 생각에 잠겨, 이 여자와 비슷하게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서 커피를 마시는 남자와 여자들. 일반적으로 공동의 고립감은 혼자서 외로운 사람이 느끼는 압박감을 덜어주는 유익한 효과가 있다."(<여행의 기술>, 77쪽)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이런 방식으로 호퍼의 그림들을 보여준다. "호퍼가 고립되어 있는 이 여자와 공감을 느껴보라고 우리에게 권유한다"고 말한다. 그림 속 여자에 대해 "어쩌면 지나친 듯싶게 남을 잘 믿고, 약간 순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세상의 뾰족한 모서리에 부딪힌 것인지도 모른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우리는 그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보통이 그림에 대해 말할 때. 그는 그림 속 장면을 다시 한 번 묘사하고, 묘사함으로써 분위기를 만들고, 장면 밖의 시간을 상상한다. 인물의 내면을 추측하고, 때로 인물에게 대사를 부여하거나 어떤 상황을 가정한다. 그는 자주 말한다. 상상해보자고. 마치 소설의 한 페이지를 읽는 것처럼. 우리는 보통의 안내에 따라 그림을 읽는다.
<영혼의 미술관>에서 이런 과정은 더 자주 만날 수 있다. 낸 골딘의 사진이나 니콜로 피사노의 그림 앞에서. 피터르 더 호흐의 그림이나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앞에서. 그리고 다시. '우리'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외로움과 슬픔, 불안과 사랑으로부터.
| ▲ 피터르 더 호흐의 <델프트에 있는 어느 집의 안뜰>(1658). ⓒ문학동네 제공 |
"우리는 리처드 세라의 단단한 강철판들로부터 용기나 힘 같은 미덕들이 방출되는 것을 감지한다. 에그니스 마틴의 회화에 나타나는 형태의 기하학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늘 필요한 냉정에 대해서 기억할 수 있다. 바버라 햅워스가 나무와 끈을 가지고 만든 조각에는 훌륭한 삶에서 긴장이 담당하는 역할에 관한 시가 숨어 있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257쪽)
<영혼의 미술관>에서 보통은 기존 미술관들의 전시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가상도를 제시하는데(고통의 전시실, 자비의 전시실, 두려움의 전시실, 사랑의 전시실, 자기 이해의 전시실), "치유의 관점에 따라 재구성한" 이 가상도는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불안>에서 불안을 해소하는 해법으로 철학, 예술, 정치 등을 들면서 샤르댕과 토머스 존스, 크리스탄 쾨브게의 그림들을 보여준 것처럼.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는 한 미술가의 일상을 스케치하며 "예술이란 중요하지만 무시되어온 방향으로 우리 생각을 밀어붙이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필리피노 리피의 '아기 예수 경배'를 보여주고, "미술은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중요한 관념들의 심미적 표상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영혼의 미술관>에서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술은 인성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우리를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어준다." (37쪽)
"예술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게 여겨지지 않는다. (중략) 우리의 약점을 얼마나 보완해주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좋거나 나쁘게 여겨질 것이다. (72쪽)
보통은 자신이 품은 질문에 이처럼 여러 분야의 책을 경유하며 답하기 위해 고심해 왔다. 그 결과는 예술을 신으로 섬기는 신도의 포교 활동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고, 그의 표현대로 일종의 "프로젝트"(<영혼의 미술관>에서 그는 큐레이터와 비평가의 역할에 대해, 미술관의 전시 방식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부록으로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가상의 작품 의뢰 전략을 싣고 있다)에 가까워 진 것 같기도 하다. "예술이 삶을 고양한다." 이제 세 번째 여정이 거의 끝나간다. 다시 보통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처음의 질문으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우리 환경이 우리가 존중하는 분위기와 관념을 구현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주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건물이 일종의 심리적 틀처럼 우리를 지탱하여,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유지해주기를 기대한다."(<행복의 건축>, 111쪽)
<행복의 건축>에는 이런 두 장면이 있다. 필립 존슨의 글라스 하우스 사진이 있고, "이런 멋진 곳에서도 우리는 걸핏하면 언짢은 기분에 빠져들 수 있다"라는 보통의 문장이 있다. 켄 셔틀워스의 그레센트 하우스 사진이 있고, "삶은 보통 이렇지 않다"라는 문장이 있다.
말 그대로. 우리의 삶은 그레센트 하우스 같지 않다. 우리가 앓고 있는 시간은 쉽게 응답하지 않는다. 응답 없는 기도처럼. 삶은 반복되나. 차라리 희망은 발작처럼 찾아온다. 이미 엎질러진 세계에서 우리는 때로 닥치고 싶은 심정으로 겉돌거나, 떠돌거나, 사방에서 돌아온다. 기껏해야 미친 사람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저지를 수 있을까. 질문해보자. 누군가는 시를, 누군가는 음악을, 누군가는 여행을, 누군가는 그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질문을, 오직 끝없는 질문을 저지를 수 있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하나의 질문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너는 누구인가. 당신은 나의 무엇인가.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품었던 하나의 질문에서. 우리는 시작되었다. 마음속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나만의 질문을 하나쯤 품을 수 있다면. 삶이란. 고독이란. 슬픔이란. 또 하나의 목소리가 질문을 던진다.
소로가 말했다. "산책의 절반은 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어떤 시간을 걷고 있다면, 우리가 시간의 산책자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이 '견디다'라는 슬픈 동사뿐일지라도. 우리의 기억은 곧 이 길을 되돌아간다. 우리는 시간과 기억을 동시에 살고 <영혼의 미술관>은 지금 이 순간, 기억의 일부가 되고 있다. 기억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이나 잊기 위해 서러워지는 시간이나. 결국 입버릇처럼. 돌아서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간다. 텅 빈 마음으로. 어떤 길을 되돌아 갈 것인가. 어떤 질문을 품고 갈 것인가.
우리는 이제 <영혼의 미술관>의 복도를 돌아 나오며 텅 빈 마음에게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나'에게. '너'란. 예술이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예술은 산책길에 빛나는 햇살일 수도, 멀리 뜬 구름일 수도, 환하고 슬픈 낙엽일 수도 있겠다. 때로 천둥이나 폭우일 수도. 콧등에 떨어진 물방울이나 발에 차이는 돌부리, 눈에 띄지 않는 개미굴일 수도 있겠다. 바람에 흔들리는 등산용 속옷이나 길모퉁이에 서서 우는 여자일 수도. 순간의 정적이나, 깊은 밤의 어둠일 수도. 어쩌면 어둠 속에서 들리는 수많은 목소리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끝없는 질문.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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