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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않는 쿤데라, "이보시오, 여긴 당신 집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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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않는 쿤데라, "이보시오, 여긴 당신 집이 아니오"

[프레시안 books]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 외

오랜만에 밀란 쿤데라를 읽었다. 언제부턴가 이 작가를 좀 잊고 있었지. 전집이 묶여 나온 차제에 그간 굳이 캐지 않고 내버려뒀던 그 망각의 이유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소설 대신 그의 소설 원론에 해당할 에세이들(<소설의 기술><배신당한 유언들><커튼><만남>)을 읽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 <소설의 기술>(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알려진 대로 쿤데라의 경우는 에세이가 소설의 창작과 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늘 소설 형식의 포용력을 십분 활용하여 그 안에 스토리와는 무관하지만 자신이 다루려는 주제에는 직접적으로 관련된 지적 성찰을 삽입하는, 그의 표현을 빌면 복합적이고 다성적인 구성을 선호해 왔다. 따라서 나로서는 이 에세이들이 그 자체로 소설 작품들의 내적 조형과 긴밀히 조응하며 그 원리들을 밝혀주는 한편 막연한 차원에 머무르는 나의 소원감에 어느 정도 구체적인 근거를 대어 주리라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가 쿤데라의 지성과 미려함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네 권의 에세이는 생각을 펴거나 닫는 법, 생략과 압축을 통해 미감과 명징성을 추출하는 방식에서 한결같이 날렵한 솜씨를 보여 준다. 가령 카프카에 대한 그의 탁월한 이해는 어느 부분을 펼쳐 읽어도 좋지 않은가. 이 네 권을 두고 무엇이 더 낫거나 중요한지 가리는 일은 무의미할 것이다. 넷 중 하나를 고르라면 흔히 <소설의 기술>(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민음사 펴냄)이나 <배신당한 유언들>(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민음사 펴냄)을 들리라 짐작되는데, 나로서는 역사의 틈새로 새어나간 작은 나라의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명되는 <만남>(밀란 쿤데라 지음, 한용택 옮김, 민음사 펴냄)이 흥미로웠다.

차이는 그런 정도일 뿐, 네 권의 모든 것은 반복적이고, 계속되며, 고르고, 명료하다. 강력한 '실무자'인 그는 자신이 반추하는 주제들—소설 예술의 정의("작가가 실험적 자아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소설의 기술>, 191쪽))라든가 그 형식의 연속성의 역사, 약 4세기에 걸쳐 그것을 품어 기른 모태이자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유럽'의 외연, 그 유럽이라는 대맥락 안에서 바라보아야 마땅할 중부 유럽의 예술, 그리고 그 역사의 마디마디에 굵은 매듭을 지으며 등장했다 잊히거나 사라진 위대한 작품들에 대한 사랑, 작가와 비평과 번역과 소설 작법의 문제 등등—에 일반적인 지식 담론과 구분되는 개인적 표정을 입힌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지. 나는 이 에세이들을 읽다 자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표현의 우아함, 내용의 명료함 이면에 잘 삼켜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있는 느낌. 혹은 그것들이 유려하고 정확하고 더할 나위 없이 옳거나 너무나도 분명한 말들의 반복적 연속이어서, 계속 듣고 있자니 딱딱한 것에 눌려 발이 저려오는 느낌. 뭐 그런 것 때문에.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독후감이고 다른 이들은 전혀 다른 생각과 감상을 가질 것이다. 어쨌든 내게 걸림돌은 이것이다. 웃는 쿤데라 속의 웃지 않는 쿤데라.

내게 쿤데라의 작품들은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중반이라는 내 청춘의 시간대에 위치한다. 나의 기억은 그 시절을 최루 가스와 88올림픽의 생뚱맞고도 폭압적인 병존으로 이미지화해 두고 있는데, 그 소란 한 가운데에서 돌연 '너희들은 다 농담을 몰라'라고 외치듯, 하늘 위 흰 구름인 듯 솟아 오른 낯선 상쾌함이 있었다면 그게 바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민음사 펴냄)이 아니었던지. 작가로서 쿤데라가 가장 빛나던 시절도 결국엔 그 무렵이라고 생각한다. <농담>(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민음사 펴냄)이 여타 서구어로 번역된 것이 1960년대 말의 일이고 최근 영예로운 플레이아드 총서에 그의 전작이 (그 자신의 뜻대로 주석과 해설, 서문, 연보 등이 일절 배제된 예외적 형태로) 포함되기로 결정되었을지라도.

▲ <만남>(밀란 쿤데라 지음, 한용택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다이얼을 현재에 맞추고 평가하라면 ? 내게 그는 더 이상 당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그 자신의 성찰과 선택에 의해서든, '예술-이후의 시대'(<만남>, 202쪽)로 접어든 이 세계 때문이든. 1975년 이래 자신의 조국이 아닌 '다른 곳'에 거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단호히 '다른 시간대'에 자리하는 것이다.

에세이들은 상당히 긴 세월에 걸쳐 발표되었다. 프랑스를 기준으로 할 때 <소설의 기술>은 1986년에, 마지막 권 <만남>은 2009년에 출간되었다. 그것들이 고스란히 몇 개의 동일 주제와 모티프들의 변주에 할애된다는 점은 그의 비-당대성이 무엇보다도 예술의 정체성을 굳건히 정초하려는 자기 확인의 소산임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것은 체코슬로바키아나 체코 공화국 말고 '예술의 있음'이 있는 시대를, 야나체크나 브로흐나 카프카, 곰브로비치, 심지어 세르반테스와 라블레와 디드로 등 무수한 정서의 동향인들로 이루어진 유럽을, 요컨대 자신만의 꿈의 고국 '보헤미아'를 구현하려는 망명 예술가의 결기와 관계된 것이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내게는 소설의 정체성과 예술의 연속성을 확인하고 정의하는 데 바쳐지는 이 비-당대적이고 자기 반복적인 의지가 개운치 않다. 시류를 따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새로운 전망을 보이라는 엄청난 주문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자꾸 쿤데라에게서 고집 센 노인을 발견하고 지루해지는 것이다. 나만 그런가.

"소설이라는 예술의 탄생은 작가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그 권리의 맹렬한 옹호와 연결되어 있었다. 소설가는 자기 작품의 유일한 주인이다. (…) 늘 그랬던 것은 아니며 앞으로도 언제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세르반테스의 유산인 소설의 기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커튼>(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민음사 펴냄), 146쪽

예술을 위한 그의 배려가 때로 아성 엄호의 수준으로까지 나아갈 때, 그래서 그 정체성의 규정이 확연해 질수록, 작가가 손수 모든 것을 설명해 줄수록, 나는 그 직조술에 탄복하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반복을 통해 다져지는 그의 영토에는 도무지 이견이나 오류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데 무엇이 궁금하겠는가. "이보시오, 여긴 당신 집이 아니오."(<배신당한 유언들>, 전집12, 9부 제목). 이 단호한 기세가 굵은 힘줄처럼 에세이 네 권을 이끈다. 소설 창작의 저변을 받친다. 그렇게 된 정황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힘줄이 잘 씹히지 않는다.

▲ <커튼>(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해서,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좋은 구절들에 밑줄을 그으면서 갑갑했다. 시간에 등을 진 채 자신이 선택한 예술 형식의 고유성을 매일 난초 잎 닦듯 돌보려는 이 마음자리를 작가는 '저녁의 자유'(<커튼>, 205쪽) 라 부른다. 그것은 사이드가 말한 말년의 양식과 상통할까. 그러나 그 때의 말년성은 자신의 시대와 불화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 자신의 이전과도 타협하지 않으면서 쏟아져 나오는 최후의 예술의 빛인 것이다. "새로운 발견을 통해 물려받은 길을 계승"(<커튼>, 113쪽)할 것을 거듭 다지는 쿤데라는 세르반테스가 연 전통의 마지막 단계—그에 의하면 프루스트나 조이스 이후, 카프카나 곰브로비치, 브로흐 등의 작가들에 의해 열린 소설사 3기의 끝자락—에 자신을 놓는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히 문을 닫는다.

아마도 나는 쿤데라의 작품들에서 반복이 주장과 엄호로 굳어가는 기미를 확인할 때마다 시선을 돌렸던 것이리라. 유럽 대륙의 서편에서 중부로, 다시 남미로 이동한 후 종점을 향해 달려가는 이 소설 예술의 '대맥락'에서 나는 애초부터 벗어나 있으므로, 막차의 닫혀가는 문 안쪽으로 뛰어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러기 싫다고 생각하면서 멀거니 서 있는 것이리라.

"일단 소설의 몸으로 들어오면 (…) 교조적인 생각이 가설적인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는 규칙은 지켜"진다—도스토옙스키에 관한 그의 견해다(<소설의 기술>, 117쪽). 실무의 차원으로 들어오면서 교조적인 강경함이 실존의 실험과 발견의 경이로 이행한다는 이 지적이야말로 쿤데라 자신에게 해당되는, 그의 기술의 요체다. 그의 지혜나 웃음은 이 실무 규칙에 의해 발동된다. 이래저래 쿤데라는 자신에게서 나와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궤도를 가졌다. 그리고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은 실무의 열매가 아니라 그 원칙의 강고한 옹이임을 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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