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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숭고와 신식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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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숭고와 신식민주의

[프레시안 books]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

재난, 여행, 자연, 숭고, 상품, 시장, 영토, 기계 장치, 다국적 자본주의, 신식민주의, 역사, 가상, 스토리텔링, 번역, 세계 문학, 데우스 엑스 마키나, 수미상관, 봉합… 윤고은의 신작 <밤의 여행자들>(민음사 펴냄)을 읽으며 챙겨 모은 키워드 목록이다. 몇 가지는 소설에 명시되어 있고, 나머지는 독자로서 추론해 덧붙인 것이니, 거듭 읽을수록 목록은 더 늘어날 수 있겠다. 역사성, 담론 배경, 은유적 함의가 저마다 다르고도 두터운 단어들을 이리저리 짜맞춰보면서, 이 흥미진진하고도 지적인 소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과제에 임하려 한다. 애써 생각해보는 것이다. 조금이나마 배운 것에서 출발해, 미처 인식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밤의 여행자들>은 무엇보다 여행 소설이다. 주인공 고요나는 재난 지역 전문 여행사 정글의 과장으로 베트남 근처의 섬나라 무이로 출장인지 해고 직전의 선심성 휴가인지 불명확한 여행을 떠난다. 50년 전 무이에서는 두 토착 부족 간 살육전이 벌어지고 사막의 싱크홀이 생겨났는데, 과거의 역사적 비극과 자연 재해를 가상으로 체험하는 프로그램의 상품성을 점검하는 게 그녀의 임무다. 명목상의 업무와 무관하게 무이의 리조트 구역, 사막, 해안에서 요나가 우발적으로 빠져드는 사건이 소설의 중요 부분을 차지한다.


여행 서사는 문학의 유구한 전통을 이룬다. 고대 서사시에서 중세 기사 로맨스, 근대의 <돈 키호테>와 <로빈슨 크루소>를 지나, 피카레스크 소설과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거쳐, <성>과 <율리시즈>를 넘어서,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문학의 역사 전체를 언제든 다시금 거슬러 기술해야 하는. 픽션뿐만 아니라 항해기, 순례기, 견문록 등 기록적 글쓰기에서도.


“누구든 여행을 하면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꾼'(1936) 에세이에서 인용한 속담처럼, 편력, 표류, 방랑, 탐험, 침공, 출장, 유람, 요양, 유배, 산책, 이주 등 다양한 목적과 방식의 공간 이동은 이야기와 글쓰기를 생성시키고 그것의 내용과 형식을 진화시켜왔다. 여행은 지역, 언어, 인종, 종교의 타자들이 우애롭거나 폭력적으로 조우하고 세계의 이미지와 관념이 돌이킬 수 없이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타자성의 세계에서 여행자는 교양(Bildung)의 습숙과 파멸적 죽음 사이 위태로이 길을 긋는다. 그의 정신과 신체의 궤적이 이야기다. <밤의 여행자들>은 이 움직임의 이야기들로 구축된 거대하고 탄탄한 세계 문학사의 한 칸에 무난히 탑승한다.

▲<밤의 여행자들>(윤고은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밤의 여행자들>이 재현하는 여행의 양상은 관광이다. 남다른 취향과 경험의 여행자들에게 폄하되긴 하지만, 그래도 관광은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시행되는 여행 방식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관광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관광의 목적은 주로 특정한 지물이나 경치로 이름난 어떤 장소에 가서 실물로서의 그것을 육안으로 인증하는 것이다. 세계는 구경거리(spectacle)고, 관광객은 구경꾼(spectator)이다. 그런데 구경 행위의 속성은 구경 주체와 구경 대상 사이의 거리 또는 간격에 있다. 관광객은 자기 주위를 입체적으로 둘러싼 풍경을 마치 무대 장치처럼 즐길 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투신하고 참여하지는 않는다.

이때 관광의 기묘한 양가성이자 본질이 드러난다. 아무리 실물을 향한 열정에서 촉발되었다 하더라도, 세계가 무언극 퍼레이드처럼 지각되는 이상, 관광은 가상의 체험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진정한 여행가들이 혐오하는 것은 이 가상이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여행은 추구라기보다는 회피의 속성이 없지 않아 있으며, 관광객은 그러나 위험 없는 가상의 유혹을 포기할 수 없다. 인기 있는 관광지 한구석에 테마파크나 미니어처 월드 빌리지가 건설되어 있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세계 자체가 아니라 세계의 모형이야말로 관광의 근원적인 쾌락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관광의 완수는 실물에 이미 언제나 내재한 가상을 향유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관광의 다른 일반적 특징은 여행자가 주체적으로 행로와 일정을 계획하기보다는 여행 대행사가 미리 정한 프로그램에 따라간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자율적 선택 사항은 있지만 교통수단, 숙소, 식사, 심지어 방문 장소와 쇼핑 구역까지. 게다가 단체로. 관광은 상품화된 여행이고, 관광객은 상품 소비자로서 여행사를 통해 편리하고 안락한 가상 체험을 구매한다. 세계 이미지는 관광지-시장-상품으로 구획되고 명명된다.

<밤의 여행자들>은 진정한 여행의 환상에 냉소하면서 가상 체험과 상품성에 기반을 둔 현대적 관광 여행의 본질을 날렵하게 묘파한다. 정글 여행사가 기획한 프로그램은 모두 재난 현장을 특화한다. “화산, 지진, 전쟁, 가뭄, 태풍, 쓰나미 등”(10쪽). 여행자들은 쓰나미 피해 복구 봉사 활동을 한다거나 물 부족 마을에 우물을 뚫어주는 등 일시적으로 현지의 노동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이러한 윤리적 욕구를 불러일으킨 요인은 근본적으로 일상을 초월한 파괴의 참상이다. 인간 개개인의 힘을 압도하는 거대한 폭력의 스펙터클과 그 결과로서의 폐허의 이미지를 목격하기 위해 정글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재난 여행을 떠남으로써 사람들이 느끼는 반응은 크게 ‘충격 → 동정과 연민 혹은 불편함 → 내 삶에 대한 감사 → 책임감과 교훈 혹은 이 상황에서도 나는 살아남았다는 우월감’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어느 단계까지 마음이 움직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결국 이 모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난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니까 재난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했다, 는 이기적인 위안 말이다. (61쪽)


재난 지역의 풍경은 일반적인 관광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쾌한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미에 대한 선입견을 초월하는 대상 앞에서 그것을 목도하는 자는 불쾌와 충격을 느낀다. 재난을 유발한 과거의 근원적 폭력이 그것의 사후적 흔적을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현재의 주체에게도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마치 지진 이후의 여진처럼. 쓰나미처럼. 이 폭력의 지속적인 파장권 안에서 시선의 주체는 풍경과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 이때 이처럼 위험한 파괴적 감각을 이성적 사유의 대상과 윤리적 덕목으로 전환한다면 다시 주체와 풍경 사이의 간격과 그가 속한 일상적 생활 영역이 확보될 가능성이 생긴다. 정글 프로그램 참여자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위선의 작동 방식이 바로 이러하다.


재해 → 목격 → 충격 → 거리감 → 안도. 정글 프로그램이 창출하는 체험과 정서는 숭고(the sublime)의 기제와 거의 일치한다. 근대적 맥락에서 숭고는 여행과 불가분의 관계다. 유럽 지성계에서 숭고 담론은 고전 수사학 이후 어느 정도 잠복해 있다가 18세기 영국에서 갑자기 풍부하게 전개되는데, 그 배경으로는 1739년 윌리엄 스미스의 롱기누스 재번역과 함께 당대 지식인 청년들의 대일주(Grand Tour) 유행을 간과할 수 없다.


대일주는 17세기부터 시작된 풍속으로, 유한계급 청년들이 문명을 배우고 교양을 닦기 위해 몇 달에 걸쳐 유럽 대륙의 주요 도시를 순회한 일종의 수학여행이다. 대일주 여정에서 바다 건너 파리를 거쳐 베니스, 로마, 피렌체 등 이탈리아 주요 도시를 방문한 다음 독일의 베를린과 드레스덴으로 가기 위해서는 알프스 산맥을 두 번 넘는 게 필수다. 무연히 평탄한 유럽 지형과 비교할 때 알프스는 굉장히 이질적인 시각적 체험을 제공한다. 만년설로 뒤덮인 울퉁불퉁한 산세, 쨍하고 높푸른 하늘, 내리꽂히는 급류, 아찔한 협곡과 심연 등. 당대의 지식인과 시인 들은 변화무쌍한 알프스를 통과한 여행의 기억을 바탕으로 거대한 자연 현상이 유발하는 매혹과 위협적 불안, 열광적 경외감과 공포, 언어의 실패를 극복하는 수사적 실험, 자기 파괴적 중압감에 맞서는 인식 능력의 확장 등 숭고 개념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근대의 숭고는 원론적으로 자연물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 거대함의 속성을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은 자연물이라기보다는 인공적 기술의 산물인 경우가 우세하다. 세계 대전, 핵무기, 메갈로폴리스, 마천루, 우주 항공 기술, 정보 통신망, 금융 공학, 복잡한 행정 제도 등. 이것들은 분명 인간의 머리와 손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사유 능력을 초월하는 불가해성, 개인적 노동과 실천을 무력하게 하는 거의 자율적인 생성력과 운동성을 지닌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거대한 기계 장치를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고 통제하기보다는 파편적 부분만을 인지할 뿐이고, 무지의 상태에서 그것이 생산하는 소량의 선을 수혜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채 그것의 파괴적인 악에 가담하고 있다. 기술적 숭고(technological sublime)는 이처럼 현대의 거대한 인공 장치들이 불러일으키는 미증유의 감각과 효과를 일컫는 용어다. 매혹과 공포에 더해 자연의 숭고에는 없었던 죄의식까지 아울러.

<밤의 여행자들>은 자연의 숭고와 기술적 숭고를 모두 서사화한다. 진해의 쓰나미로 시작해서 무이의 지진과 쓰나미로 막을 내리는 이야기에서 자연은 인력과 기술을 초월하며 숭고하게 귀환한다. 지진과 쓰나미의 위력에 무이 주민들이 휩쓸려 죽는 일요일 아침, 윤고은의 글쓰기는 압도적 자연에 대해서는 냉정한 거리 감각을 유지하되 그것으로 인해 편편히 부서지는 무력한 개개인에게는 일일이 작은 이야기를 부여함으로써 파토스를 자아낸다. 자연의 숭고에 수사의 숭고로 맞선다. 감각에서 윤리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밤의 여행자들>의 보다 중요한 성취는 기술적 숭고의 일면을 집요하게 파헤쳤다는 데 있다. 무이에서 요나는 폴이라는 비밀스러운 사업가의 음모에 엮여든다. 폴은 토착민들을 내쫒은 땅에 리조트와 체험 관광 구역을 건설한 개발업자다. 그는 국제기구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무이를 재난 지역으로 꾸미려 한다. 사막에 거대한 인공 싱크홀을 뚫고 무고한 주민들을 빠뜨려 말살한 다음 자연 재해인 양 위장하려는 것이다. 무이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자기의 죽음을 불러올 반인륜적 프로젝트에 고용되어 일한다는 사실에서 잔혹성은 배가된다. 모래 구덩이를 파는 사람으로, 의문사한 시체를 냉동고에 넣는 사람으로, 모래든 시체든 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르고 트럭으로 운반하는 사람으로.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부분적 역할에 충실할 뿐, 하나의 전체로서의 프로젝트의 진실에 무지하다.


<밤의 여행자들>이 역설하듯, 현대적 관광 산업은 자연 환경과 토착민의 생활을 파괴한다. 그것은 개발지상주의와 결합해서 자연과 타인의 삶의 영역을 상품 시장 또는 가상의 극장으로 전락시킨다. 재난이 공연되는 가상의 극장에 죽음만이 부정할 수 없는 실재로 예정되어 있다. 이때 지진과 쓰나미는 재난과 악을 창출하는 모든 기계 장치를 부수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등장한다. 그것은 데우스 엑스 나투라의 숭고한 맨얼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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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여행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사실 이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고 현실적인데, 정글과 요나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점검해본다면. 이야기의 대부분은 한국을 떠나 무이라는 타국 영토에서 펼쳐진다. 요나는 무이 주민을 대량 살상하려는 폴의 프로젝트에 비윤리적으로 결탁한다. 회사 내 입지가 위태로운 처지에 성공이 보장된 재난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재기하려는 것이다. 요나가 대리하는 정글은 폴의 개발 자본과 합작하여 무이의 영토를 적극적으로 상품화한다. 무이의 재난은 가상의 싱크홀로 인한 주민 몰살 프로젝트 외에도 이 같은 다국적 자본에 의한 신식민지화의 진행이다.

식민주의 관련 논의에서, 한국은 주로 식민 피해국으로 규정되어왔다. 일제 강점기는 당연하겠거니와,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론이 등장한 80년대도 그렇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밤의 여행자들>이 폭로하는 것은 한국이 타국의 정치경제에 종속된 식민지가 아니라 오히려 저개발국의 영토를 자국의 시장처럼 점유하고 지배하는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 국가라는 부끄러운 사실이다. 허구를 현실에 즉각적으로 대응시키기란 전혀 깊이 있는 독법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의 여행자들>을 읽으며 현재 밀양, 강정, 캄보디아 의류 공단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폴이 지휘하고 요나가 참여하고 정글이 방조하는 무이의 재난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지역들이 겪는 인위적 재난에 대부분의 우리는 순진한 피해자가 아니라 비의도적 가담자이자 방조자다.

▲ 캄보디아판 '광주 사태'와 관련해 한국 봉제 기업들이 강제 진압 요구에 앞장선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10일 서울 외교부 앞에서 시민단체들이 한국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묻는 시위 장면이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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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인위적 재난은 자연과 인간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부정적 파급력을 미친다. 오늘날 팽배한 현상들 중 하나는 문학이 스토리텔링으로 환원되어 다른 상품화된 사물을 보조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에서 서사의 진행은 몇 가지 코드에 따라 결정되는데, 수용자의 정서적 반응도 그 제한적 코드에 따라 미리 계산되어 있다. 스토리텔링의 목적은 물론 상품 판매다. 스토리텔링은 근원 없는 사물에 신화적 내력을 부여하고, 감동을 자아내고, 호기심과 소유욕을 자극해 구매 행위로 이끈다.


정글에서 판매하는 여행 상품은 각각 한 편의 허구적 서사나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화산의 검붉은 에너지, 대지의 요동, 물의 심판 노아의 방주, 대참사 공포의 쓰나미”(32쪽) 등 흥미를 자극하는 제목이 붙어 있고, “두렵고 슬픈”(33쪽) 특정한 감정적 효과를 유발한다. 요나가 무이를 대상으로 한 기존의 여행 프로그램을 점검하며 “기승전결이 전략적이지 못한”(56쪽) 스케줄이라 지적할 때부터, <밤의 여행자들>은 여행은 그 자체로 이야기이며 따라서 이 책은 이야기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밤의 여행자들>은 소설 창작에 관한 소설, 여행 소설이자 여행 서사 창작에 관한 소설이기도 한 것이다.


폴의 재난 프로젝트는 두 겹의 차원에서 전개된다. 무이의 사막에 인공 싱크홀을 건설함과 동시에, 재난의 날을 극화해서 각각의 주민에게 역할, 대사, 사연을 부여하기. 섬의 재난에 스토리텔링을 덧붙여 더 매혹적인 관광 상품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재난의 시나리오 제작에는 한국인 작가 황준모가 동원된다. 황준모가 창작하는 재난 서사에는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 평생 금슬이 좋았던 노부부, 신생아만 남기고 몰살된 가족, 아이들을 구하고 죽은 교사, 어린아이만 남겨 두고 죽은 부모, 가족을 위해 뛰어든 늙은 개”(146쪽) 등 안타까움을 자아낼 각종 죽음의 클리셰에 더해 감동적인 미담, 애절한 연애담, 생존자의 후일담까지 온갖 스토리텔링 코드가 포진되어 있다. 황준모의 시나리오에서 문학은 내용, 미적 형식, 목적, 윤리성, 이데올로기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끔찍한 재난에 표류해 있다.


그렇다면 재난의 시대에 우리에게 어떤 문학이 남아 있을지. 거주지에서 쫓겨난 사람들, 강제 이주된 사람들, 인간 이하의 피조물 취급을 받는 사람들, 그러나 자연과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밤의 여행자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데, 한국어도 아니고 시장과 관광지의 공용어도 아닌 그들의 언어는 아직 누구에 의해서도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언어의 청취와 번역에 재난 이후의 세계-문학이 있을 것이다.


쓰나미가 무이를 뒤흔드는 동안 몇백 년을 견딘 나무들은 뿌리로 악어들을 감싸 안았다. 날이 밝은 후, 악어들은 그 섬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의 사람이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억하는 대사가 없었다. 연습한 대사도 없었다. 특별한 사연도 없었다. 리허설도 수당도 없었지만 깨진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듯, 이야기들은 바다로 흘러나왔다(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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