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고통만큼이나 흔한 말이 있다. 그것은 '사랑의 고통'이란 말이다. 이 둘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 있어 소개할까 한다. 남다른 분석력을 발휘해 '사랑'을 다루는 소설을 바탕으로 연애를 상담해주었던, 박수현의 '연애상담소' 칼럼(2011~2012년 '프레시안 books'에 연재)을 모아 출간된 <서가의 연인들>(자음과모음 펴냄). 이 책을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한다. 많이 버벅거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구절절 나의 지난한 연애를 떠올려야했고, 완성도 높은 (평론에 가까운) 에세이를 리뷰하기 위해 저자와 다른 도입부, 문장, 표현들을 찾아내려고 밤잠을 설쳐야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사랑을 하고, 상기된 채 뜬눈으로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우리는 모두 고통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각 이야기의 서두에는 민, 경, 연, 순, 윤, 석, 도, 정, 희, 영 등 익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냥 마음도 아닌, 깊은 마음을 담고 있는 명작에는 심리가 불안정한 인물과 기구한 사랑이 반드시 중요한 소재가 된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익명의 인물들은 아픈 만큼 성장한다. 저자와 롤랑 바르트가 고백했듯이 "사랑에 관한 담론은 동어반복의 세계"이지만, 이 책은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같은 고전의 이름에 기죽지 않고 저자만의 화법으로 사랑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모두가 읽었고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돈 키호테>를 누구보다 쉽게 풀어주고 있다. 풍차를 기사로 착각한 희대의 익살꾼 돈 키호테에게 사랑이란, 영웅이 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 그에게 사랑의 고통이란, 모방하고 싶고, 모방해야하는 과제였다. 그리고 가상의 연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모한 도전을 계속한다. 이 도전은 꼭 관객(산초)이 필요하고, 또 관객이 그의 연인에게 그 사실을 전달해야 완성된다(고 믿는다). 이런 돈 키호테가 한심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가. 처절하게 사랑에 빠졌던 이들이라면 쉽게 손가락질하지 못한다. 그들 또한 사랑이 주는 고통에 비련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연인의 말 한마디에 영웅이 되는 일을 겪어봤기에 돈 키호테가 보여주는 기행들은 그대로 자신의 것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만들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이르면 어떤 피로감마저 든다. 쿤데라의 텍스트 자체가 분석할 거리가 넘쳐나기도 하지만, 토마시와 테레자, 프란츠와 사비나 네 명의 인물 모두에게서 사랑할 때 나타나는 나의 가장 추한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제불능 바람둥이인 토마시, 한 남자의 유일무이한 연인이 되고 싶었던 테레자, 사랑을 한없이 가볍게 여기고 싶은 사비나, 연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다 죽음을 맞이한 프란츠까지 사랑의 단면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이 소설은 '마음의 백과사전'이라 불리기에 가장 좋은 작품이다.
저자는 오래된 연인은 더 이상 선언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것으로 유일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자식을 가진 유부녀가 연애 초기의 미혼녀보다 상대의 바람기에 관대하다는 예도 든다. 정말 그럴까?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나를 끌어들인다.
나의 오래된 연인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굳이 네가 아니어도, 누구든 지금까지 성실하게 사랑했을 것 같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내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성향이 특별하다는 것이다. 사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나처럼 변함없이 아껴주고 사랑하는 일을……. 십 년을 넘게 사귀는 동안 그는 나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를 했다. 연애 초기엔,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 번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고 전화를 받지 않을 땐 부재중 전화 30통도 기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바닥난 체력에 한주라도 주말 데이트를 빼먹으려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괴롭혔다. 언제나 내가 와달라고 하는 곳이면 한걸음에 달려왔고, 자신은 나에게 24시간 '쉬운 남자'라고 했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데이트하는 것을 금기시했고, 그와 연락이 되지 않을 때는 허겁지겁 책과 커피를 먹어치우며 애써 '혼자 있는 즐거움'을 누렸다. 인내심이 강한 나였기에 그의 예민함을 받아들였고, 열정적인 그였기에 나의 무관심을 깨뜨릴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면, 과연 나는 저자가 강조한 유일성(그와 긴밀하게 쌓은 시간과 추억)이란 무기로 관대해질 수 있을까? 아마도 사랑과 섹스가 다르니 자신의 바람기를 인정해달라고 하는 토마시를 떠나 프라하에 간 테레자처럼 그를 떠날 것이다. 유일성이 무너진 오래된 연애는 결혼이란 장치로도 막을 수 없다. 연적의 알몸을 보고 크게 웃는 소설 속 주인공과 나의 괴리는 또 다른 사랑의 텍스트를 낳는다. 이제 변덕이 심한 사랑이야기를 쓰기 위해 다른 이의 경험과 소설, 신화, 정신분석학 등의 텍스트에 전적으로 의존해야하지만, "나는 결코 네가 될 수 없다"는 슬픔은 결혼 후에도 수시로 출몰하기에 소재 고갈의 두려움은 없다.
이 책은 사랑의 길고 긴 시련을 통해 '잘 사랑하는 법'을 이야기한다. 사랑이 쉽지 않아서 매력적이듯, 쉽게 읽히지 않아서 옆에 두고 싶은 책이다. 겪어보지 않아서 흥미롭고, 겪어봐서 웃을 수 있는 사랑의 속성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의심 사유의 목록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 목록을 길게 작성할수록 유능한 작가라고 하는 걸 보면, 의외로 작가가 되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으로 아파하고 있다면, 당신도 나처럼 얼마든지 책 한 권은 써낼 자질을 갖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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