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는 세원마련의 대안으로 ‘지하경제양성화’를 공약했다. 그 이후 차명거래 규제를 핵심으로 하는 금융실명제법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지하경제양성화의 핵심은 결국 차명거래 규제이기 때문이다.
오랜 준비과정을 거쳐 2013년 7월 드디어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그리고 금융실명제법 시행 20주년이 되는 2013년 8월 12일에는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이만우 의원님과 함께 토론회를 하기도 했다.
<한겨레>와 <조선일보>가 동시에 지지한 금융실명제법
2013년은 전두환 전 대통령, CJ그룹의 이재현 회장, 뉴스타파의 역외탈세, 신한은행 라응찬 회장 사건 등으로 인해서 ‘차명거래 범죄’가 많았던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차명거래 규제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매우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2013년 7월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이후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소위 ‘선의의 차명거래’를 논거로 하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심지어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차명거래는 삼라만상의 세계”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금융위원회의 ‘물밑 논쟁’을 반영하여, 이후 금융위원회의 반론을 수렴하는 ‘제2차’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을 또다시 만들었다. 핵심 내용은 선의의 차명계좌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차명거래등록제 ▴FIU(=금융정보분석원) 통지 ▴차명거래 등록에 관한 금융기관의 설명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준비한 법안 내용이 2013년 12월 9일 한겨레신문 1면을 통해서 보도되었다. 경제관련 법안 발의가 신문 1면을 장식하는 것은 흔치 않다. 그리고 12월 11일 조선일보에서 사설을 통해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을 지지해주었다. 이로서, 이번에 발의한 금융실명제법은 한겨레신문과 조선일보가 동시에 지지해주는 흔치 않는 법안이 되었다.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긴급명령 방식으로 금융실명제가 시행되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금융실명제법의 전격적 시행은 한국사회의 금융투명성-조세투명성 제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합의에 의한 차명’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절반의’ 실명제에 불과했다.
합의 차명 허용하는 현행 금융실명제법 – 탈세조장법 그리고 금융범죄조장법
1993년 제정된 금융실명제법은 ‘비(非)실명’ 규제를 핵심내용으로 한다. 즉, 비(非)실명에 해당하는 허명(虛名)과 가명(假名)만을 규제하고 있다. 차명의 경우, 기술적-논리적 난점으로 인해서 공백으로 남겨둔 것이었다.이는 철통보안 속에서 경제관료 몇 명이 밀실에서 만든 한계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현행 금융실명제법은 ‘합의 차명’을 전면 허용하고 있다. 합의 차명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갖는다.
첫째, 합의차명을 허용하는 현행 금융실명제법은 지하경제를 ‘활성화’시키는 핵심 원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의 2013년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지하경제규모는 290조 원이다. 이는 GDP 대비 23% 규모이다. OECD 평균이 13%이며, 개발도상국 평균이 29%인데, 한국은 개발도상국 수준에 근접한 지하경제규모를 갖고 있다. 국격(國格)’을 저해하는 매우 수치스러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한국의 부패지수가177개국 중 46위인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둘째, 합의차명을 허용하는 현행 금융실명제법은 ‘탈세 조장법’이다. 이는 최근에 밝혀졌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삼성 이건희 회장 비자금, CJ그룹 이재현 회장, 효성그룹 조석래 일가의 비자금, 신한은행 라응찬 전 회장 사건 등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차명계좌를 활용한 탈세는 정치인-대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융실명제법 시행 20주년이 되는 2013년 8월 12일에 ‘kinds 검색’을 통해 차명거래와 관련된 지난 20년치 기사를 모조리 검색했는데, 어린이집 원장, 사립학교 교장, 대학총장, 의사, 병원직원, 승려, 교회, 구청직원에 이르기까지 차명거래 범죄가 매우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한마디로, 차명거래는 탈세를 위한 ‘필수 재테크 수단’이 된 지 오래이다. 차명거래를 통한 탈세는 작년에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이 4000만 원에서 2000만 원으로 낮아진 이후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셋째, 합의 차명을 허용하는 현행 금융실명제법은 ‘금융범죄 조장법’이다. 2012년~2013년 상반기 기준으로 저축은행 불법대출 중 차명계좌를 활용한 비율은 87.4%에 이른다. 금액으로는 3조7528억 원이다. 또한, ‘차명계좌’를 활용한 주가조작 등의 주식 불공정행위 비율은 61.87%에 이른다. 이는 물론 금융감독원에 의해서 적발된 경우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입증의 곤란함 - ‘죄수의 딜레마 이론’을 응용한 증여의제 조항의 도입
17대 국회와 18대 국회에서도 차명거래를 규제하는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이 발의된 적이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국회 전문위원 검토보고서 등을 살펴보면, 이에 대한 반론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였다. 첫째, ‘차명(借名)’도 실명의 일종이기 때문에 금융기관 입장에서 ‘입증’이 어렵다는 것이다.(=입증의 곤란함) 둘째, 소위 ‘선의(善意)의 차명거래’에 대한 피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선의의 차명거래 피해론)
1차 금융실명제법과 2차 금융실명제법은 이러한 두 가지 반론을 수렴하면서도 범죄목적의 차명거래를 규제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제 이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번째 반론은 입증의 곤란함 문제였다. 이러한 반론에 대한 해법으로 마련된 것이 증여의제(贈與擬制)의 적용이다. 증여의제란 ‘증여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증여의제 조항은 부동산실명제법 제4조와 2012년 연말에 국회에서 통과된 상속세및증여세법 제45조 제4항의 원리를 차용한 것이다.
증여의제(贈與擬制) 조항이 갖는 원리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배신촉진법’이다. 실권리자를 A, 명의대여자를 B, 금융기관을 C로 간주한다면, 17대-18대 국회에서 발의된 차명거래 규제법은 B-C의 관계를 다룬 법안이다. 그래서 금융기관 입장에서 ‘입증의 곤란함’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우리가 발의한 금융실명제법은 A-B의 관계를 다룬다. 즉, A(실권리자)가 B(명의대여자)에게 차명을 줄 경우, ‘준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경제학에서는 ‘시장거래’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계약’이며, 계약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고 본다. 즉, 범죄목적의 차명인 경우, 범죄시장 ⇒ 범죄계약 ⇒ 범죄자간의 신뢰에 기반한다.
이는 거꾸로 범죄자간의 ‘신뢰’를 무너뜨리면 ⇒ ‘범죄계약’이 무너지고 ⇒ ‘범죄시장’을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리구조를 갖는 것이 바로 경제학에서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 이론이다. 즉, 증여의제(贈與擬制) 조항의 도입은 ‘죄수의 딜레마 이론’을 차명거래 규제에 적용한 것이다.
소위 '선의의 차명' - 차명거래 신고제와 FIU 통지, 그리고 금융기관의 설명의무
두 번째 반론은, 소위 비(非)범죄 목적의 ‘선의의 차명거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차명거래가 범죄 목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범죄목적의 차명과 비(非)범죄 목적의 차명을 ‘선별’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선의의 차명’에 대한 해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열거 방식’을 통해서 범죄의 개연성이 낮은 차명거래는 허용한다. ▴배우자 ▴종중(宗中) ▴동창회-부녀회 등의 비(非)법인단체 ▴법정대리인 ▴파산관재인 ▴연간 100만원 미만인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차명거래 신고제를 도입한다. 위에서 ‘열거된 이외의 경우’에는 차명거래를 금융기관에 신고하도록 한다.
셋째, 금융기관은 신고된 차명거래를 금융정보분석원(FIU)에 통지한다. 신고된 차명거래를 금융정보분석원(FIU)에 통지할 경우, ‘범죄목적’인 경우에는 FIU 감시망 안으로 포섭되며, ‘범죄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떳떳하기 때문에 오히려 관계가 없다.
넷째, 혹시라도 ‘무지(無知)에 의한 미신고’가 발생할 수 있어, 금융기관은 금융거래자에게 차명거래 등록에 관한 ‘설명의무’가 부과된다.
지하경제양성화, 그리고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위하여
차명거래를 규제하는 금융실명제법 개정은 우선, 박근혜 대통령이 표방한 ‘지하경제양성화’의 취지에 부합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증세를 고려하기에 앞서 지하경제양성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일리 있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기획재정부와 국세청이 하고 있는 지하경제양성화는 해답이 아니다. 현재 하고 있는 것은 ‘세금 털기’ 방식에 불과하다. 지하경제양성화를 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 법-제도적인 차원에서 ‘조세 인프라 개혁’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 핵심이 바로 차명거래를 규제하는 금융실명제법 개정임은 너무 명백하다.
더 크게 본다면, 차명거래 규제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통해 우리사회는 비록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증세와 조세형평성(=조세정의)는 마치 ‘닭과 달걀’의 관계이다. 한국사회처럼 ‘탈세’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국민들 입장에서 증세를 수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실제로 증세가 이뤄지는 과정은 ‘조세정의’가 함께 진전되어야 한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한 금융실명제법이 시행된 지 올해로 21년이 되었다. 이제, 조세정의 실현과 금융범죄 차단, 지하경제양성화, 그리고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위해, 2월 임시국회에서 역사적인 결단을 해야 한다.
차명거래 규제로 ‘미완의’ 금융실명제법을 완성해야 한다. 우리 후손들에게 조세투명성과 금융거래 투명성이 실현되는, 더 좋은 대한민국을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