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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고전으로 돌아온 남자, 오래된 논쟁에 가교를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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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고전으로 돌아온 남자, 오래된 논쟁에 가교를 놓다

[프레시안 books] 피터 버거·토마스 루크만의 <실재의 사회적 구성>

피터 버거와 토마스 루크만은 원로 사회학자다. 각자 1929년 1927년에 태어났으니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90년대 초반에도 이미 원로였던 셈이다. 그리고 감히 말하지만 이들의 관점은 한 번도 한국을 비롯한 어느 나라의 사회학계에서도 주류였던 적이 없다. 나에게도 그랬다. 사회과학의 시대를 살았던, 알튀세르, 푸코, 보드리야르, 부르디외, 하버마스 등 수많은 수입되는 이론가들을 소비하는데 바빴던 우리들에게 전 세대들이 읽었던 이들의 <사회학에의 초대>(피터 버거 지음,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나 <지식형성의 사회학>은 당시에는 전공수업 계획서에서 만나볼 수 있는 문헌들에 불과했다. 물론 이 저작들이 고루할 것이라는 짧은 식견에 근거한 선입견은 나름 '성실한' 학생들에게는 곧 몰입과 감탄으로 바뀌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 버거의 자서전격 저서인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노상미 옮김, 책세상 펴냄)가 번역되었고, 이어 그와 루크만의 <지식형성의 사회학>은 본래의 제목인 <실재의 사회적 구성: 지식 사회학 논고>(하홍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로 다시 번역되었다.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를 통해 버거가 한 원로 사회학자에 대한 낡은 이미지를 일소할 만한 유머와 위트가 담긴, 그리고 경쾌하면서도 진지한 자신의 지적 여정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면, 2014년에 접어들며 어쩌다 다시 읽은 <실재의 사회적 구성>은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60년대 후반 사회학에 던져준 신선한 충격과는 사뭇 다른, 이제는 고전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실재의 사회적 구성>(피터 버거·토마스 루크만 지음, 하홍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사회란 인간행위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와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들은 과연 '어떻게' 연구되어야 하는가? 단순할 것 같지만 이 질문은 복잡한 쟁점을 직접 건드린다.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간 자신이 지각하지 못하는 인간행위의 결과에 대한 법칙의 발견을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보다 소박하게, 인간사를 지배하는 필연법칙의 발견이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인간에 대한 학문은 이와 구분되는 인간행위의 기술과 이해에 국한되어야 하는가?

20세기 초 문명과 과학에 대한 본격적 회의가 일기 전,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즉 인간행위와 사회현상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려는 시도는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실증주의가 취한 자연주의로서, 이에 따르면 사회현상이라는 것도 자연과학의 대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연구될 수 있다. 실험과 비교, 그리고 통계적 유추 등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방법의 활용을 통해 인간현상의 규칙성을 밝히려 한다.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자연주의적 신념과 열망에 기원한다.

다른 하나는 칸트로부터 그 공통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 해석학적이거나 현상학적인 전통이다. 현상의 객관성과 규칙성이 자연세계에 적용되더라도, 그것은 인간행위와 그 결과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특정 인간이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과 그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현상에서 발견할 법한 규칙성 그리고 그것의 인간에 대한 규정성 대신 환원될 수 없는 인간현상의 개별성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이론에서 이 대립은 실증주의와 해석학,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법칙정립과 개성기술, 그리고 경우에 따라 구조주의와 구성주의 등의 구분으로 존재해 왔다. 전형적으로 전자의 입장이 사회의 외재성과 강제성을 강조한 결과 행위의 창조성을 간과했다면, 후자는 미시적 일상생활에서의 상호작용과 정체성 및 관계형성에 초점을 둔 나머지 사회구조의 존재성을 망각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제시된 선택지는 정말 이 둘 뿐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힘과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힘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경우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인생경로를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나의 능력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현재 실업 상태이지만 어려운 경제상황에 대해 내가 얻은 정보와 주위로부터의 조언으로 새로운 분야에 창업을 하거나 취업을 할 수도 있다. 그러한 행위의 누적은 사회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현실에서 객관적 세계와 나의 주관적 세계는 공존하는 것이 아닌가?

이 책이 사회이론의 역사에서 갖는 가장 큰 의의는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이 책이 두 대립적 지향 사이에 이론적 가교를 놓은 최초의 시도였다는 데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가능성이 이들의 지식사회학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통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은 스승인 알프레드 슈츠의 현상학의 영향 아래 보이지 않는 객관적 세계의 존재를 괄호치고 일상생활의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이로부터 사회의 구성된 실재성을 도출해 낸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주관적 의미가 객관적 사실성이 되는 것이 가능한가?"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무수한 경험을 통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과 또래집단, 그리고 학교와 같은 관계와 제도를 실재하는 것으로 당연히 받아들이며, 이로부터 내가 경험하는 실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행위에 대한 노하우는 상호주관성의 세계에서 승인된 광범위한 상식적 지식을 형성한다. 기존의 지식사회학이 주로 이론 및 사상의 역사에 관심을 두고 이것이 어떻게 시대구속적으로 구축되는가를 물었다면, 버거와 루크만은 사상보다는 상식적 지식이 지식사회학의 주된 초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외재화, 객관화, 내면화라는 인간과 사회가 맺는 관계의 세 가지 계기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일상생활의 지식은 우리의 행위를 인도함으로써 외부세계에 실재를 창조한다. 내가 주관적으로 경험한 다양한 실재는 이제 나의 실천을 통해 외재화된다. 그리고 그것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반복적 습관화를 통해 전형화되고 제도화될 경우, 우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경험되는데 이것이 두 번째 계기로서의 객관화이다. 마지막으로 객관화된 실재는 다시 사회화를 통해 우리 내면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외재화, 객관화, 내면화로 특징지어지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사회는 인간의 산물이다. 사회는 객관적인 실재이다. 인간은 사회적 산물이다"라는 변증법적 과정으로 완성된다.


피터 버거. ⓒBoston university CURA

버거와 루크만의 작업은 지적 계보 상 직접 관련이 없는,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유사성을 갖는, 곧 개시될 20세기 후반의 중요한 이론적 발전을 예고하고 있다. 예컨대 앤서니 기든스의 구조화이론이나 피에르 부르디외의 이론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특히 버거와 루크만이 이야기하는 "주관적 실재와 객관적 실재의 대칭성"은 구조화된 구조이자 구조화시키는 구조로서의 아비투스 개념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한국에서의 학문적 논의가 '수입된 이론'에 대한 '선택과 집중'으로 특정한 편식을 종용하는 분위기를 감안하면, 구조와 행위, 객관과 주관의 이론적 대립의 해소라는 공로가 주로 기든스와 부르디외에게 돌아가고 있는 현실은 아직 건재한 버거와 루크만에게는 썩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들의 일상생활의 지식에 의한 실재의 구성이라는 지식사회학적 관점은 당시 생소했지만 이제는 사회학의 경험연구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담론분석-이에 따르면 주체 및 실천,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비담론 영역은 지식의 효과이다-과도 공명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떠오른 책은 로이 바스카(Roy Bhaskar)의 <자연주의의 가능성 The Possibility of Naturalism>이다. 여러 면에서 비교가 흥미롭다. 버거와 루크만이 지식사회학의 재정의를 통해 실재의 구성성을 보여준다면, 그래서 주관세계로부터 객관적 실재로 전진한다면, 바스카는 현상학의 인식론적 타자인 자연주의에서 출발하여 버거와 루크만과 가까운 지점으로 수렴한다. 또한 버거와 루크만이 우리가 흔히 망각하는, 견고해 보이는 객관세계가 사실 의미 있는 인간행위의 산물임을 보임으로써, 객관세계를 물화된 방식으로 이해하는 실증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사회학은 여전히 인문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바스카의 비판실재론은 과학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실증주의 과학관을 해체함으로써 과학 그 자체를 인문학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비판적 실재론>(앤드류 콜리어 지음, 이기홍·최대용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사회구조는 실재성을 갖지만 오직 이것을 재생산하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만 존재하며, 구조에 대한 지식을 가진 행위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에 대한 지식은 바로 그 구조에 대한 개입으로 이어져 사회구조에 내재한 인과 메커니즘은 변형되기 십상이다. 실증주의가 아닌 비판실재론으로 해석된 자연주의에서 현실은 규칙성이 아닌 우연성으로 충만하고, 따라서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다.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은 구조의 속성과 인간의 주관적 의미와 지식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다 쉬운 소개서가 번역되어 있는데, 앤드류 콜리어가 쓴 <비판적 실재론>(이기홍·최대용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2010)이 그것이다. <실재의 사회적 구성>과 함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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