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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이 온통 '핫, 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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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이 온통 '핫, 핫'

[살림이야기] 매운맛, 건강 or 고통?

한국 음식은 맵다는 인식이 외국인에게 널리 퍼져 있지만, 정작 한국인의 식탁이 매운 음식으로 가득 찬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0년대에야 널리 퍼진 매운맛은 더 이상 한국 농부의 밭에서 자란 고추에서 나오지 않는다. 캡사이신 용액인 핫소스의 자극적 희열이 농촌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사람들의 건강도 해치고 있다.

고추는 향신료

"매운맛의 비밀… 엔도르핀이 줄~줄, 신진대사 촉진 역할·스트레스 해소 돕고 비만·감기예방 효과"(<조선일보> 2004년 10월 20일 자)

2000년대 이후 한국 외식업의 주요 단어 중 하나는 매운맛이다. 처음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밥을 제외하고, 나머지 음식들이 온통 빨간색인 식탁 앞에서 매우 당황한다. 일본에서 한국 음식이 유행했을 때 현지 한국 음식점은 메뉴판에 한 개에서 다섯 개까지 고추 모양을 표시해 매운 정도를 알려줬다. 일본인 사이에서 '한국음식=맵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어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자. 한국인의 식탁 위에 매운 음식이 가득 찬 때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1970년대 매운탕·감자탕·낙지볶음이 매운맛으로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중반부터는 '불닭'에서 '매운 족발'까지 매운맛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국 음식에서 매운맛을 내는 식재료 중 으뜸은 고추다. 식품학에서는 고추를 향신료의 일종으로 본다. 정향(크로버), 후추(페퍼), 석란육계(시나몬), 육두구(넛맥), 고추(칠리페퍼) 등이 향신료의 대표 주자들이다. 요리에 향신료를 쓰면, 주재료의 맛이 더 좋아지고 또 부패를 늦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냉장고가 보급되기 이전에 서유럽 사람들이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에 열광한 이유도 이것이다.

한국 음식에서 후추·생강·천초·마늘·파·겨자·고추 등은 대표적인 향신료이다. 모두 외래 향신료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전후해 한반도에 들어온 고추는 기존 향신료와는 매우 달랐다. 매운맛이 강력할 뿐 아니라 음식 색도 빨갛게 만들어 주었다. 고추는 처음에 한자로 왜개자·남만초·왜초·남초·번초·만초·당초 등으로 불렸다. 17세기 후반이 되자 본래 천초와 후추를 가리켰던 고초가 고추를 가리키는 말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에 고추장과 고춧잎장아찌가 만들어졌다.

18세기에 매운탕과 쇠고기구이를 비롯해 온갖 짠지·장아찌·침채 등에도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들어갔다. 채소절임에 고춧가루가 들어간 것은 부패를 막기 위해서다. 조선시대 실학자 서유구는 농업과 임업·의식주 등 일상 문화를 집대성한 <임원경제지>에서 파와 고추를 써서 무청김치를 담그면 봄이 온 듯 무청이 싱싱한 맛을 낸다고 했다. 조선간장을 담글 때 마른 고추를 넣는 이유도 방부 효과 때문이다. 방부 기능은 짠지와 장아찌의 짠맛을 줄여 줬다. 18세기 중반 이후 고춧가루가 들어간 '양념김치'는 곡물로 지은 밥을 먹을 때 곁들이기에 좋았다. 쌀밥은 물론이고 보리밥·고구마·감자와 같은 전분음식과 양념김치를 함께 먹을 때 잘 어우러지는 매운맛은 식욕을 더욱 자극했다.

고추는 독인가, 아닌가

20세기 이후에는 아침저녁 식사에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이 반드시 올라왔다. 1933년 6월 20일 자 <동아일보>에는 일본과 독일로 유학을 갔다 온 의학박사 정구충 씨의 글이 나온다.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치 어회, 육회에까지 고추장을 얹어 먹습니다. 아이가 두세 살 때부터 자극적인 고추를 먹이면 이것이 없이는 밥을 먹을 수 없이 중독되며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그는 고추로 만든 음식이 건강에 치명적인 독이 된다고 보았다. 정구충 박사 외에도 일제 강점기 시기 몇몇 식품학자들이 음식에 고추를 너무 많이 사용한다고 비판했지만, 영향력은 거의 미치지 못했다.

▲ 1933년 6월 20일 자 <동아일보>에 의학박사 정구충 씨는 '고춧가루의 해악에 대하여'라는 글을 써 고추로 만든 음식이 건강에 치명적이라고 했다. ⓒ동아일보

해방 이후 고추가 들어간 한국 음식은 오히려 자랑거리로 부각됐다. <경향신문> 1950년 5월 15일 자에서 나명혜 씨는 "한국인이 고추를 많이 먹기 때문에 지구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소화기가 튼튼하다. 고추를 먹으면 수종을 막아 주고, 류마티스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고추를 먹으면 천연두에도 강하고, 뱀한테 물렸을 때는 고추를 불에 태워 밥과 섞어 짓이겨 바르면 좋다고 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가을만 되면 신문에 고추를 말리는 장면이 어김없이 실렸다. 1960년대 이후 경북 영양은 고추 명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해마다 10월에는 하루에 평균 20명의 도회지 상인들이 읍내 시장에 몰려와 고추를 샀다. 고추 재배 농가들은 수중에 들어오는 돈이 넉넉해져서 보릿고개도 쉽게 넘겼다. 고추가 곧, 돈이 됐다. 그러자 고추 농사를 짓는 집들이 늘어났다. '고추 강도'가 나타났을 정도다. 농촌진흥청에서는 1969년 12월에 전국 각지의 재래종 고추와 일본·태국·타이완·미국 등지에서 도입한 고추를 분리해서 고추1·2·3호라는 신품종을 개발했다. 신품종 고추의 개발은 1970년대를 고추의 시대로 진입하게 만들었다. 고추는 이제 값싼 향신료가 되었다. 음식에 넣는 양도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 1950년 5월 15일 자 <경향신문>에서 나명혜 씨는 '한국인은 고추를 많이 먹기 때문에 지구력이 강하고 소화기가 튼튼하다'라고 예찬했다. ⓒ경향신문

일본 식품회사 요청으로 만든 청양고추


고추의 매운맛은 캡사이신이라는 성분에서 나온다. 고추를 먹으면 몸이 뜨거워지는 이유도 바로 캡사이신 때문이다. 캡사이신의 효능은 여러 가지다. 우선, 뇌는 강력한 자극이 있을 때 엔도르핀과 아드레날린이라는 진통 효과가 있는 물질을 내보내는데 캡사이신 성분이 이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매운맛은 통증을 완화해 주고, 아드레날린은 혈관을 확장시켜 혈액 순환에 도움을 주어 땀과 노폐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고 체지방을 연소시켜 에너지 대사를 촉진시켜 준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많이 섭취했을 때의 역효과도 감수해야 한다.

16세기에 남아메리카에서 퍼져 나간 여러 품종의 고추는 곳곳에 정착하면서 캡사이신 성분의 함량이 달라졌다. 한반도에 정착한 고추는 1970년대 말 경북 영양의 농촌시험소에서 청양고추를 개발하기 전까지 캡사이신의 함량이 30%에 지나지 않았다.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한국인이 맵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청양고추는 일본 식품회사의 요청으로 만든 품종이다. 독하게 매운 멕시코고추를 수입하는데 들어가는 물류비용을 아끼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일본에서는 수입하지 않았고, 오히려 1980년대 중반부터 국내 시장에 청양고추가 풀렸다. 청양고추가 들어간 매운 음식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국면에 놓여 있던 1998년의 한국 사회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돈도, 마음도 갈 곳을 잃어버린 한국인은 청양고추의 매운맛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덩달아 캡사이신 용액이 싼값으로 수입되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다국적 향신료 기업은 캡사이신 용액을 상품으로 개발해 세계 각국에 '핫소스'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IMF의 구제금융이 한국사회를 세계 경제 시스템에 편입시켰듯이 한국인의 매운맛도 세계화의 길을 걸었다. 오늘날 한국인이 먹는 매운맛은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 한 가지는 17세기 이후 한반도의 토양에 적응되어 독하게 맵지는 않은 고추가 내는 맛이다. 이 매운맛은 18세기 이후 한국인의 건강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유입된 캡사이신 용액은 오로지 매운맛만 강화했다. 이 매운맛은 입술에 지독한 통증을 줄 뿐만 아니라, 화장실에서 또 다른 고통을 준다.

신자유주의 시대로 돌입하면서 프랜차이즈 외식업이 한국사회에 주류 음식문화로 자리 잡았다. 간혹 식당에는 싱싱하지 않은 식재료가 캡사이신 용액의 매운맛으로 코팅돼 식탁 위에 올라온다. 신자유주의로 인해서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고, 이 스트레스를 캡사이신 용액이 듬뿍 들어간 음식으로 날려 버리는 일이 한국의 음식점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반도의 고추는 분명 한국 음식의 맛과 색을 아름답게 하는 데 대단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갈수록 매워지는 한국 음식은 농부의 땀으로 밭에서 자란 한국 고추에서 나오지 않는다. 핫소스의 순간적인 희열이 오히려 농촌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사람들의 건강도 해친다. 일제강점기에 "음식 본질의 맛이 모두 고춧가루의 맛으로 변하게 됩니다"라고 경고했던 정구충 박사의 말을 다시 귀담아들어야 할 때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살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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