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때로 죽음을 암시합니다. 2016년 6월 28일 새벽, 나는 방에 우두커니 앉았습니다. 대모산 아래로 어둠은 짙게 드리워져 있고 방금 꾼 꿈은 아주 선명했습니다. 오른쪽 몸 언저리에 상처가 깊게 난 엄마를 끌어안고 '엄마 집에 가자, 엄마 집에 가자.' 이렇게 말을 하며 꿈에서 벌떡 깼습니다. '이게 무슨 꿈이지.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다른 사람인가.' 아흔을 바라보는 엄마를 생각하는데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시계를 보니 3시, 잠시 멈춘 그 순간 탁상 위의 휴대전화기가 윙~하고 진동 소리를 내며 움직였습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새벽 2시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정률 올림
채의진 선생의 외손자가 보낸 문자였습니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문병을 다녀온 지 10여 일 만의 일이었습니다.
1999년 가을, 빨간 모자를 쓰고 머리를 허리춤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린 채의진 선생을 만났습니다. 문경석달 사건과 현장에서 살아난 생존자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는 'AP'가 노근리 사건을 터뜨려 민간인 학살 문제가 조금씩 이슈가 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1949년 12월 24일 정오,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소속 2소대와 3소대 군인 70여 명이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서 주민 86명을 총살하고 가옥 24채를 불 태웠습니다. 그날 겨울방학을 맞아 김룡국민학교에서 친구들과 돌아오던 채의진은 산모퉁이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혀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사촌 동생과 형 밑에 깔려서 살아났습니다. 흔히 기적이라고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돌이 많아 붙은 이름 석달마을.
대학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한 채의진은 1986년까지 21년 동안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사건을 묻어두고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문경양민학살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하였고 국회 청원을 비롯해 정부, 언론을 상대로 진실규명에 나섰습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다시 전면에 나선 것입니다. "현장에서 내가 살아난 것은 조상님들이 진실을 규명하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을 밝히지 않고는 결코 죽을 수가 없다"라는 증언을 자주 했습니다. 그가 살아남은 이유이자 그가 가야 할 숙명이었습니다.
채의진 선생은 서각을 했습니다. 산과 들에서 나무뿌리를 캐고 쓰러진 나무를 가져다 쪼개고 자른 다음 물에 담든 후, 쓸 수 있게 장만한 뒤 글자를 새깁니다. 고통을 잊고 결기를 다지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도 '미친'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어떻게 온 정신으로 생활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상상도, 인식도 할 수 없는 것이 그가 경험하고 살아온 세계였습니다. 끌과 망치로 새긴 글은 선생 자신의 각오이자 다짐이고 아픔이자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삶에 고집스러웠고 집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민간인 학살 사건도 해결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20년 동안 그는 문경석달 사건을 넘어서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사건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기자회견과 증언, 학술행사, 국회 청원과 국방부 방문, 지역 유족회와 현장, 위령제, 여의도 농성장, 학교 강의실, 그가 민간인 학살 사건을 밝히기 위해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고 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어느 누가 그의 손을 잡아주었겠습니까?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주었겠습니까? 선생은 2000년 9월초,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고 애를 태웠습니다. 광화문 한글회관의 현대사연구소 사무실에 책상 하나 두고 일을 볼 때, 수가 틀리면 회의를 박차고 나가기도 여러번, 자신만의 사건을 넘어서 다른 유족들과 함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문경석달 사건은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이 보고한 정보문서에서 국군이 저지른 학살로 그 잘못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그런 만큼 어느 사건보다 쉽게 해결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전국에 산재한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부역혐의자, 11사단과 미군 사건까지 전부 같이 해결하는 것은 당시에는 너무 멀기만 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문경사건은 전쟁 전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왜 함께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납득시키는데, 선생이 자기 유족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1960년의 전국피학살자유족회를 복원하고 연구자와 활동가, 기자, 변호사와 함께 사회운동에 나서는데 꼬박 1년이 필요했습니다.
▲ 채의진 씨(사진 맨 오른쪽)는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진상 규명을 위개 누구보다 노력했다. ⓒ연합뉴스
"한성훈씨, 뭐해요? 나 서울 왔어." 서울에 오실 때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매달 가는 산행을 위해 올라오실 때, 기자를 만나러 오실 때, 증언하러 오실 때, 변호사를 만나러 오실 때, 유족 모임 하러 오실 때면 항상 들을 수 있습니다. 봄에는 두릅이며 나물을 캐다 가져오고, 가을에는 산에서 직접 깐 밤을 비닐에 가득 담아서 전해줍니다. 다른 사람에게 대신 나누어 주라고 신신당부하실 때면 소박한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밤을 까다 다친 손, 나무뿌리를 캐다 다친 손, 글자를 새기다 걸킨 손은 마치 굴 껍질마냥 거칠고, 또 다른 연장 같습니다. 그 손을 만질 때면 어머니의 손이 생각납니다. 어릴 적 엄마가 등을 쓸어 줄때면 참 시원했습니다. 왜 그렇게 시원할까, 하고 뒤늦게 철이 들어 생각해보니, 손바닥이 거칠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흙을 만지지 않은 부드러운 손이었다면, 풀을 뽑고 김을 매는 손이 아니었다면 시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굳은 살이 배기고 살갖이 온갖 것에 걸킨 손이어서 시원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채의진 선생의 손이 그러했습니다.
매년 12월 24일이 되면 나는 문경으로 향했습니다. 어떤 때는 석봉리 사건 현장에서, 어떤 때는 점촌 역전에서, 또 어떤 때는 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해 겨울, 정부가 진상규명을 하기 한참 전이었을 겁니다. 사건이 벌어진 마을 어귀에서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싸리눈이 희끗희끗 날리는 회색빛 추운 날이었습니다. 위령제가 끝나고 밭에 세워진 비닐하우스 안에서 따뜻한 국밥을 한 그릇 말아먹고는 현장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밤을 지새운 중석굴에는 그때도 유해가 남아 있었고, 총탄을 맞은 바위도 그대로였습니다. 한 두 살 된 아기들의 시체, 피로 뒤범벅된 부녀자와 노인의 시체, 집은 모두 불에 타고 127명의 마을 주민 중에 사망한 86명이 거기 있었습니다.
성훈씨, 나 죽어, 나 죽는다고. 죽고 싶어. 죽고 싶었어. 자살하려고 여러번 시도했지.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치든 게 떠올랐습니다. 선생은 뭔가 억울하고 분한 감정에 휩싸일 때마다 그렇게 소리치곤 했습니다. "죽지 못해 살았다"는 말을 그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살려고 발버둥을 친 건 죽고 싶은 욕망과 마찬가지 감정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또 다른 죽음이 답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죽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죽으려는 그 심정이 와 닿았습니다. 그 이후로 채의진 선생이 무슨 말씀을 하던 나는 받아들었습니다. 논리와 이성으로 대면할 삶이 아니었습니다. 울분을 토해낼 때마다, 또 위암 수술 이후에도 술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선생의 몸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2007년 6월 26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문경석달 사건의 진실을 규명했습니다. 국가기관이 이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데, 나는 주무 조사팀장으로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채의진 선생의 활짝 웃는 모습을 오랜 만에 보았습니다. 세상의 근심 걱정이 사라진 한 순간의 얼굴이었습니다. 진실규명 결정을 근거로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해서 보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해원은 다 이룰 수 없었습니다. 국방부는 유족들이 받은 금액이 많다며 이미 지급한 보상금의 일부를 반환하라고 소송을 했고, 대법원은 정부의 편을 들었습니다.
채회장님과는 성훈씨가 가족 다음으로 어렵고 힘들 때 애틋한 관계를 가졌었는데 여러 가지로 회한이 많고 마음도 아프지요.
지난주 장례를 치르고, 범국민위원회 시절에 위령 행사를 도맡아 했던 연극인 한대수 선생이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이안면의 채의진 선생 집을 드나들 때 외손주, 정률이와 은정이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정률이는 이제 내가 선생을 만난 그 나이, 서른이 되었습니다. 선생을 상징하는 빨간 모자와 외출할 때면 항상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선산에 같이 묻었습니다. 땅을 살펴본 지관이 흙의 빛깔을 보고 오색 황토라며 좋은 징조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위로일망정 사람과 땅의 기운이 잘 어우러지기를 바랐습니다.
죽음 이후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증인입니다. 채의진 선생을 만난 이후부터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의 증인을 찾아다녔는데, 지금은 함께한 사람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채의진 선생보다 먼저 떠난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1960년 전국피학살자유족회 조사부장을 지낸 이복녕, 민자통 활동을 한 김상찬, 부산 동래의 송철순, 익산역 미군폭격 사건의 이창근, 경산유족 이태준, 진영유족 김영욱, 충북 유족 김진선. 그리고 살아계신 함평 11사단 사건의 정근욱, 강화 서영선, 고양 서병규·마임순, 이분 들은 자신들의 억울함만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사사로이 죽음을 말하지 않았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지켜왔습니다.
지난 6월 18일 토요일에 병원에 찾아뵈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심야버스를 타러 점촌터미널에 가기 전, 힘들게 잠든 선생에게 속삭였습니다. "다 내려놓고 편히 가십시오. 세상의 인연을 이제 끊으십시오. 다시 태어난 1949년 12월 24일도 이제 놓아버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병환으로, 정부의 소송으로, 믿었던 유족들의 배신으로 선생은 너무 고통스러운 삶을 말년에 보냈습니다. 사후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영혼은 자유롭고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역>의 마지막 64괘가 화수미제(火水未濟)입니다. 최후의 괘가 미완성임은 인생에 완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완전체가 보편적이지 않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완결된 삶도 없습니다. 미완성인 채로, 열어 놓은 채로 채의진 선생이 1994년에 처음으로 편찬한 <아, 통한 四十四年> 책장을 덮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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