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둘째 주 월요일인 8일 여의도 한강의 아침은 싱싱하지 못했다.
아침 하늘은 안개를 잃어버린 채 아침 해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뿌연 독기를 뿜은 먼지를 뚫고 빠알간 아침 해가 한강에 얼굴을 내밀고 있어 다행이다 싶다.
간밤 꿈을 꾸다 깬 나는 아직 몽롱하다. 일어나자마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한강변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서울의 아침을 벗어나기 위해 강변도로를 빠져나와 중앙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서울을 벗어나면서부터 탁 막힌 것들이 조금씩 뚫리는 기분이다. 이 아침 모든 일을 제쳐놓고 이렇게 차를 몰며 가는 목적지는 태백산맥 서편 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의 6대 왕인 단종이 묻힌 영월 장릉이 있고 토마스모어가 꿈꾸고 허생이 꿈꾸는 그런 '작은 대한민국'을 쏙 빼닮은 섬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서둘러 가는 건 순전히 꿈 때문이다. 새벽녘 꿈에서 내가 중학생때 보았던 어린 단종이 능 언덕에 나란히 앉아 나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단종이 묻힌 장릉이 있는 산 끝자락 마을에 살았다. 사람들은 내가 사는 마을을 ‘수재민촌’이라 불렀다.
꿈에서 나는 검정 교복을 입었고, 단종은 온화한 미소로 말을 했다. 나는 내가 꾼 꿈이 프로이드의 말처럼 꿈속에 숨어 말하지 못하는 억압된 나의 현실을 대신 건져 올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차를 몰았다.
어쩌면 며칠 째 꽉 막힌 나의 숙제를 풀고 싶었는지 모른다.
차 앞 쪽 오른쪽 의자에는 우편함에서 꺼내놓고, 아직 뜯어보지도 못한 선거홍보 봉투가 차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라디오를 틀었다. 뉴스는 아침부터 온통 내일이면 세상을 바꿀 대통령 선거로 도배했다.
라디오를 끄고 달렸다. 중앙고속도로를 달린지 1시간 30분이 지났을 때 제천 시내가 보였다.
중앙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영월 장릉으로 가는 국도로 들어섰다. 영월로 가는 38번 국도는 정선 카지노 덕분에 4차선이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이 때문에 1시간이 걸리던 길이 30분 만에 영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도를 빠져나온 나는 단종이 묻힌 장릉으로 가는 길 대신, 단종이 유배생활을 한 서강이 흐르는 청령포로 차를 돌렸다.
청령포의 아침은 서울의 독한 미세먼지보다는 덜했지만 그래도 눈이 시겁다.
사방 절벽아래 강물이 감고 도는 청령포는 육지 속의 외로운 섬이었다.
빼곡한 소나무 숲 사이, 내 눈에 보이는건 조선의 군왕 가운데 백성을 가장 사랑한 성군인 세종의 장손자인 단종이 유배해 살던 기와집 한 채와 그 옆에 단종을 모셨을 궁녀들의 행랑채가 초라한 성냥갑처럼 보인다.
중학교 1학년 소풍을 청령포로 왔다. 그 때 나는 12살에 조선의 왕이 되었지만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의 권력 욕심 때문에 저 외로운 섬의 주인으로 살았던 어린 왕의 슬픈 아침 밥상을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할아버지인 세종처럼 백성을 위한 ‘군왕의 도’ 로 공자의 인(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아침 밥상을 놓고, 오늘 아침을 굶는 흥부 가족 같은 불쌍한 백성은 없는지 백성을 측은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단종은 인(仁 )을 실천한 군왕의 도를 지닌 왕이라고 생각한다.
산속에 갇힌 외로운 섬. 그 섬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병약한 아버지 문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초등학교 6학년인 12살 나이에 왕에 오른 단종. 그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읽었던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의 지구별의 여행 같은 행복한 조선 여행도 아니다. 그의 600년 전 조선 여행은 잘못 된 나쁜 사회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단종이 묻힌 장릉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능 안에서는 열흘 전 치른 단종축제의 청사초롱을 걷어내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단종제향을 지낼 때 쓰는 제기를 보관하는 재실을 지나 단종 왕릉이 있는 능으로 곧바로 올라갔다. 능으로 올라가는 길 양 옆에는 싱싱한 나뭇잎들이 모두 올라와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주차장에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 산등성에 오르자 고목이 다 된 늙은 소나무 길 사이로 조선 6대왕 단종이 묻힌 장릉이 보였다. 어린 슬픈 왕에겐 보통 조선 왕릉에 다 있는 병풍석과 난간석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능은 언제나 내게 망부석과 문인석만이 나를 반겼다.
나는 릉 옆에 잠시 앉아 서편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마지막 봄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단종과 같은 10대 소년 때 이곳 능 언덕에 앉아 수첩에 시를 지었던 과거의 시간들을 떠올렸다.
검정교복을 입고 다니던 그 시절.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군대 같이 강제로 만든 통일된 질서로 인해 내가 동화를 읽으며 꿈꾸던 에드몬드 데 아미치스가 지은 ‘사랑의 학교’가 아니었다. 학교는 언제나 학교폭력을 주도하던 럭비부원들의 의해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 엄석대 같은 폭력에 학생들은 괴롭힘을 당했다.
매일 아침 학교 교문을 들어설 때마다 선배 규율부에게 ‘멸공’을 큰 목소리로 외쳐야 했고, 교실 수업시간마다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어느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50cm의 되는 단단한 물푸레나무로 만든 몽둥이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그런 나쁜 규칙과 나쁜 질서가 있는 나쁜학교와 나쁜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학교가 우울할 때면 나는 가끔 우리 집 능선을 타고 이곳 언덕까지 걸어왔다.
그러고는 능 벽에 기대고 앉아 능 아래 정자각 옆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능지기가 기거했다는 수복실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양치기 소년처럼 능 언덕에 앉아 가져온 ‘어린왕자’ 책을 읽다 잠들곤 했다.
덕분에 나의 글쓰기는 이 때 시작되어 이후 도내 글대회를 휩쓸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후에 비평가들이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비교한 나의 걸작 ‘내가 먹은 빨간사과에는 일곱난장이가 없었다’는 장편소설이 된 ‘짐’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그 소설에서 나는 완장 찬 사람들을 향해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시 쓰기도 좋아해 ‘신용비어천가’라는 산문시를 고3때 서울의 모 일간지 신춘문예에 냈었다. 그런데 내 시는 낙방이 되었고, 나의 시 제목과 내용이 떠돌아 다니는 걸 보며, 나는 다시는 글을 안 쓰겠다고 절필을 선언했었다. 그러나 그 절필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다보니 목이 말랐다. 가져온 생수를 한 번에 벌컥 들이켰다. 과거의 기억을 모두 마셔버린 것 같아 꽉 막혔던 목이 시원했다.
그리고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시계바늘이 11시를 향해 돌고 있었다. 아침을 못 먹은 터라 아점으로 점심을 때우기 위해 능을 내려왔다.
능을 다 내려와 보니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 같은 정여각이 보였다. 정여각은 폭군 수양대군이 무서워 단종의 시신을 방치했을 때 용기있게 군주를 지킨 엄흥도 호장의 용기를 기리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10대 소년 단종의 시신을 메고 노루가 살던 눈길을 걸었을 엄흥도를 생각했다.
“그는 이 눈으로 덮인 산등성이를 걸오 올라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군군신신(君君臣臣). 지금 우리 사회에는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운 사회인가.”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어느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숙제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능을 떠나 내가 중학교 자주 가던 읍내 새벽시장에서 칼국수를 점심으로 채웠다.
땀이 흐르는 5월의 이상기온 날씨에 칼국수는 어울리지 않은 점심 한 끼이다. 그러나 시원한 냉면보다 호박을 숭숭 쓸어 넣은 뜨끈한 칼국수를 한 그릇 비우고 나서야 미세 황사바람에 막힌 목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났더니 몸이 무거워졌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내겐 시간이 촉박했다. 나는 시장을 빠져나와 단종이 마지막 숨을 거둔 관풍헌으로 내려갔다.
시장에서 5분 거리 밖에 되지 않는 관풍헌은 조선 태조 때 지은 영월 동헌의 객사(客舍)이다. 아마도 한양에 높은 관리들이 다녀갈 때 모텔처럼 하루 밤을 숙식하며 머물던 곳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관풍헌에 단종이 살게 된 건 여름 장마로 인한 홍수 때문이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청령포는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서강이다. 그런데 서강은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정선 쪽에서 흘러오는 동강의 물길과 만나면서 강물이 역류해 서강쪽 홍수의 피해가 크다.
내가 이곳의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여름 장마만 되면 동강과 서강이 만나 서울로 가는 남한강으로 합류하는 물길의 역류를 자주 보았다. 그 때마다 강둑 옆에 사는 사람들은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다.
단종 역시 그 해 역류현상이 컸던 대홍수로 인해 ‘외로운 섬’ 청령포를 떠나 관풍헌으로 급히 옮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관아와 영월사람들이 밀집해 살던 관풍헌으로 옮긴 것은 오히려 단종의 죽음을 더 빨리 재촉한 것 같다.
관풍헌으로 왔을 때 단종의 숙부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에게 발각되어 단종은 이곳 관풍헌에서 그해 12월 7일(음력 10월 24일)에 동화 속 어린왕자처럼 지구별과 영영 이별을 한다.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세조실록에는 ‘금성대군의 죽음 소식을 듣고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과, ‘세조가 사약을 내렸으나 금부도사가 어명을 말하지 못하자, 단종의 하인 복득이 단종을 활끈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읍내 서점을 갈 때마다 서점 옆에 있던 관풍헌을 보며 복득이 어린 왕을 죽였다고 생각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관풍헌에서 가까운 낙화암으로 갔다. 오솔길 같은 숲길 끝자락에 단종을 모신 궁녀들이 단종의 죽음을 듣고 동강으로 흐르는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낙화암 숲길을 걸으며 동강을 내려다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강고기처럼 강을 갉아 먹고 있었다. 그리고 흘러간 동강이 서강과 합쳐져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보다 하마터면 잊고 갈 뻔한 ‘작은 한반도’가 퍼뜩 생각났다.
38번 국도를 달렸다. 한 10여분 달렸을 때, 용정리 서강변에 있는 ‘선암마을’ 팻말이 보였다. 국도를 내려와 다시 언덕으로 기어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길이지만 아스팔트 포장이 잘 되어 있었다.
하루에 버스가 몇 대 서지도 않을 것 같은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에서 나는 차를 세웠다. 땡볕에 밭을 매고 있는 나이가 지긋하신 마을 할머니를 만나 한반도마을로 가는 길을 물었다.
밭을 매러 호미를 들고 가는 할머니 등 뒤로 보이는 낡은 벽돌집 벽에 붙은 포스터를 보았다.
포스터에 박힌 사람들 모두가 웃고 있다. 포스터 속에 인쇄된 그들의 웃음 속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왕도(王道)는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왜냐하면 포스터 속의 사람들은 모두가 내가 꿈속에서 만나 아침부터 나와 동행한 조선의 왕 같은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 속으로 다시 포스터 속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의 왕도(王道)는 무엇인가?”
그러면서 나는 포스터 광고 속의 미소가 대량 생산된 일회용 상업성의 광고가 아니길 만을 믿으며 할머니가 가리킨 언덕길로 올라갔다.
할머니 말씀대로 넓은 주차장이 보였고, 몇 대의 관광버스가 보였다. 주차한 후 한반도 지형을 닮은 산을 보러 가는 길 입구서 얼음생수 한 병을 샀다.
생수를 파는 아저씨는 25분 정도 걸으면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작은 한반도’로 가는 산길은 생각만큼 험난하지 않았다. 구두를 신고 걸었는데도 발이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길은 대부분 흙길이었으나 흙을 삐집고 나온 크고 작은 돌들이 많았다. 중간 쯤 걸었을 때 꼭 숲속의 난장이들이 쌓았을 것 같은 작은 돌탑이 보였다. 아마도 이 길을 지나간 사람들이 ‘작은 한반도’를 보고 오면서 소원을 올린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15분여를 걸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지형을 닮은 작은 ‘대한민국’이 거짓말처럼 보였다.
정말 너무 많이 빼닮았다. ‘작은 대한민국’을 닮은 한반도 지형 주변에는 짙은 초록의 숲이 만든 그림자로 인해 강물은 바다처럼 깊고 푸르게 보였다.
나는 ‘작은 대한민국’을 카메라에 몇 컷 담았다. ‘작은 대한민국’을 보며 생각했다.
저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한반도 마을처럼 내가 사는 나라도 저토록 푸른 평화로운 마을이면 얼마나 좋을 까 하고 생각했다.
한반도 마을로 가는 강 옆에는 새로운 씨앗을 심기 위해 밭갈이가 마무리 되고 있었다.
한반도 마을 사람들이 땀 흘리며 뿌린 저 씨앗들이 언젠가는 푸르고 싱싱한 채소로 쑥쑥 올라와 우리들의 저녁 밥상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미술시간에 공부했던 밀레의 만종처럼 우리들의 노력으로 수확한 열매가 익을 저 들판과 그 아래 한반도 마을을 둘러 싼 강물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내가 오늘 새벽에 꿈꾸며 찾아온 왕릉과 한반도 마을 풍경들. 그리고 꿈에서 만난 어린 단종이 왕릉에서 이곳까지 나를 데리고 다니며 가르쳐 준건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진정한 왕도(王道)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꿈을 프로이드처럼 해석하며 ‘작은 대한민국’을 어머니처럼 품고 도는 강물을 내려다 보았다.
강은 언제나 어머니처럼 마음이 넉넉하고 포근하다. 내편 네편이 없다. 저 강은 이곳 한반도 마을 사람 모두에게 물을 내어준다. 그리고 이 한반도 마을 사람들은 저 어머니의 품 같은 강에게 감사하며 산다.
그렇게 늦은 오후가 강물로 떨어질 무렵.
나는 저 ‘작은 한반도사람들’의 소박한 생각처럼 이 마을 벽보에 붙은 포스터 속의 사람들이 한반도 마을사람들의 마음을 내편 네편 없이 저 강물처럼 품어주길 기대하며 한반도 마을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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