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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이 한반도위기 재평가 회의에 참석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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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이 한반도위기 재평가 회의에 참석한다면…

안병진의 'X파일 이야기'<끝> 92년 하바나 회의의 교훈

만약 평양에서 남북한, 미국의 관계자들이 과거 94년 한반도 전쟁 위기의 재평가를 둘러싸고 학술회의를 개최한다면 김정일 위원장은 참석할 수 있을까? 만약 혹시라도 참석한다면 그는 어떤 이야기를 내놓을까? 그는 그가 평소 자랑하는 '광폭 정치'로 이 회의를 향후 화해와 협력을 위한 획기적 계기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갑자기 이런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카스트로 쿠바 서기장의 92년 에피소드가 머릿속에 떠올라서다. 그는 당시 소위 '쿠바 미사일 위기'를 재평가하는 하바나 학술회의에 예상을 깨고 충격적으로 등장해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이 기획연재의 마지막 파트도 바로 이 대목을 다루려 한다.

지난 8회 연재에서 밝힌 것처럼 소련의 핵미사일 위기는 해소됐지만 오늘날까지 쿠바에게는 10월 위기가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92년 일군의 학자들 및 미사일 위기 관련자들에 의해 흥미로운 실험이 시도되었다. 다름 아니라 미국, 소련, 쿠바의 당시 관계자들과 학자들이 쿠바의 하바나에 모여 미사일 위기를 냉정하고 솔직하게 재구성해보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재평가 시도가 그 이전에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에 진행된 회의들은 정작 위기의 당사자인 쿠바를 배제한 채,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만의 역사 재구성이었다. 바로 이 하바나 회의에서 드디어 명실 공히 삼자의 참여 속에 보다 균형 잡힌 과거사 평가의 기초가 마련된 셈이다.

물론 당시 일각에서는 이러한 학술회의에 냉소적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들은 각국의 관계자들이 자국의 국익에 몰두한 나머지 과거 미사일 위기의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기는커녕 선전전과 감정 대립으로 날을 지샐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미국 대표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 행정부의 핵심이었던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의, 역사에 대한 무거운 책임의식은 협소한 국익의 경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참여했던 케네디 행정부의 쿠바정권 교체작전인 몽구스, 피그스만 작전들을 비도덕적이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오류라고 마치 카스트로의 언사처럼 맹렬하게 자기비판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미국 외교노선의 오래된 핵심 문제로서 "적의 심리상태에 대한 공감대"의 결핍을 예리하게 지적하며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카스트로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들(쿠바인들)은, 비록 잘못된 가정이지만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미국의 침략은 불가피하며 핵무기 없이는 무기력하기에 그 카드(핵카드)를 사용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공화당 출신 보수주의자의 입에서 예상치 않게 카스트로의 핵무장의 불가피성을 이해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자 참석한 쿠바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지는 카스트로의 태도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그가 대부분의 예상을 깨고 회의에 참석했을 때 미국 내 강경파들은 그냥 회의장에서 철수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왜냐하면 평소 미국에 대해 불타는 적개심을 가진 그가 회의장을 그의 선전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미국은 들러리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심지어 7시간 동안 공산주의 선전의 장광설을 쉬지 않고 늘어놓는 그이기에 미국인들의 당혹감은 당연하였다. 더구나 공교롭게도 하필이면 회의가 진행되는 시점에 미국의 강경 보수주의자들의 불법적 테러 행위로 쿠바 군인들이 살해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따라서 회의장 바깥에서는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의 주도로 대규모 반미 규탄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놀랍게도 맥나마라가 보인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 못지않게 시종일관 비교조적 태도로 위기를 성찰하고자 했다. 그는 최대한 장광설을 자제하면서 핵미사일 반입 결정의 어리석음을 솔직하게 인정했을 뿐 아니라 위기와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증언과 쿠바 내 비밀자료 공개 시도 등을 통해 최대한 협조하고자 했다.

결국 이러한 솔직하고 생생한 대화의 결과는 한권의 책(Cuba on the Brink, 2002) 으로 만들어져 이후 미사일 위기의 전모를 보다 생생히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과 소련, 쿠바 간의 시선차를 줄여내는 데 기여했다. 이 책을 몇 년 전 접하면서 줄곧 필자의 머릿속은 한편으로 역사에 대한 책임감 속에서 이러한 창조적 실험을 성공시킨 하바나회의 관계자들이 존경스러웠고,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에서 미래에 열릴 유사한 회의에 대한 상상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하바나 회의는 미국과 쿠바 간의 이러한 자기비판적 성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얼마나 시각차가 큰가를 냉엄하게 보여주기도 하였다. 단적인 에피소드는 장시간의 회의 내내 보여준 최대한의 절제와 상호 이해에도 불구하고 막상 회의가 다 종료되고 열린 기자회견장은 상호 오해와 성토로 엉망이 된 사실이다. 감정이 격앙된 기자회견장에만 참석했던 기자들은 이 관계자들이 그토록 상호 절제와 이해 속에서 회의를 진행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회의 기간동안 카스트로와 가장 크게 인식의 차이를 보인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로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민주주의 개혁이나 인권 같은 너무나 당연하고 보편적인 요구를 '정권교체의 핑계거리'로 이해하는 카스트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카스트로가 지금까지 줄곧 보여 온 신경발작적 행동을 보면서 미국 내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위기 해소에 대한 카스트로의 진정성을 비난해 왔다. 그들은 더 나아가 미국이 유화적 제스처를 취할 때마다 카스트로가 매번 노회한 수법으로 이를 무산시키는 것으로 보아 카스트로는 전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바라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에 따라 관계 정상화의 환상을 버릴 경우 강압적 방침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들의 냉소적 표현에 따르면 카스트로는 "기회를 상실할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never misses an opportunity to miss an opportunity).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가 정권을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미국내 보수주의자들이 카스트로의 진정성을 심각하게 의심하듯이 역으로 카스트로 또한 미국의 진정성을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과거 미사일 위기 당시에는 단지 '공격용 무기'의 여부라는 비교적 해결하기 쉬운 쟁점을 가지고 3차대전 직전까지 갔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이 요구하는 리스트는 훨씬 더 복잡하고 많아졌다. 이러한 끊임없이 제기되는 리스트에 직면해서 카스트로가 미국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할 지경이다. 이에 대한 문제를 카스트로는 하바나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제기하고 있다.

"미국은 쿠바와 관련해서는 부단히 뭔가 새로운 것을 항상 창조해내고 있다. 오랫동안 그들은 우리가 소련과 연계를 갖는 한 관계는 증진될 수 없다고 말해 왔다. 그래서 갑자기 어느날 소련이 사라졌다. 오랫동안 그들은 앙골라에 군대를 진주시키는 한 쿠바와의 관계는 개선될 수 없다고 말해 왔다. 전쟁이 끝난 순간이 왔고 (…) 우리는 철수했다. (…) 따라서 소련과 관계를 단절하라, 앙골라를 떠나라, 니카라구아를 떠나라-항상 핑계를 들이댄다. 이제 가장 최근의 핑계는 민주주의 개혁이다. (…) 우리의 관계는 절대로 개선되지 않고 미국은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려고 자꾸만 새 핑계를 만들어낸다. 다음 이유가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 현재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미국이 향후 관계정상화에 대한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인권 등의 이슈에 대해 바로 카스트로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카스트로의 우려처럼 미국의 일부 강경 보수주의자들은 인권을 정권 전복의 수단으로 전술적으로 활용해 왔다. 예를 들어 최근의 남한내 일부 강경보수주의자들의 기획탈북의 경우처럼 '기획 탈 쿠바'를 통해 쿠바 정권을 약화시키고자 한 그룹이 바로 그들이었다. 구조를 위한 형제들(Brothers to the Rescue)이라고 불린 이 그룹은 겉으로는 인간주의적 NGO 활동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그 목적은 쿠바내 저항 세력을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이 이러한 목적 하에 96년 2월 24일 비행기로 쿠바를 향하여 반정부 선동 삐라 등을 뿌리기 시작했고 몇 번에 걸쳐 미국 정부 당국과 빌 리차드슨 의원같은 비공식 특사에게 이러한 과거 도발적 비행을 경고하던 쿠바는 결국 비행기를 격추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격추 사태가 발생하자 미국의 여론은 그 맥락을 사상한 채 더욱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를 놓칠 리 없는 보수적 의회는 결국 96년 헬름즈-버튼 법을 통과시켜 시장개방에 큰 기대를 걸던 카스트로의 목을 더욱 심하게 졸랐다.

두 번째로 당시 하바나회의에서 미국관계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미국의 침공 위협에 대한 쿠바의 반응이다. 회의에서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은 카스트로 서기장에게 만약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이 침공했다면 어떻게 행동을 취했겠냐고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진 바 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당시 소련이 배치한 전술핵을 발사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응답하여 맥나마라를 소름끼치게 했다(위기 당시 미국은 이 전술핵의 존재를 모르는 상황에서 침공을 진지하게 검토한 바 있다). 만약 그러한 사태가 발생했다면 미국의 상륙 부대는 핵으로 인해 끔찍하게 살상됐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참극이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카스트로는 만약 쿠바가 전술핵을 발사하면 미국이 보복할 것이고 쿠바는 "사라질 것"(would disappear)이라고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이 덧붙여 맥나마라를 더욱 놀라게 했다.

위의 출간된 회의록에서 블라이트 교수가 지적한 바 있듯이, 맥나마라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처럼 핵의 존재 자체가 공포를 유발시켜 서로 자제를 불러일으킨다는 상식과 같은 '공포의 균형' 논리가 전혀 카스트로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넊다. 과거 위기 당시 너무도 상식적인 이러한 가정 하에 소련과 쿠바의 행동을 예측하고 전략을 수립했던 맥나마라에게 있어서 이러한 놀라운 발견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과거 위기가 더 3차대전에 근접했음을 의미했다. 아마 그는 당시 회의에서 재현되는 공포스러운 기억에 몸을 심하게 떨었을 것이 틀림없다.

맥나마라와 같은 미국인들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시 3차대전 직전의 위기였고 미국인들은 히스테리로 가득 찼지만 쿠바인들은 공포를 별반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회의록을 보면 위기가 극도로 달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은 낮에는 참호를 파고 밤에는 댄스클럽에서 춤을 추었다며 다음과 같이 증언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내 아내와 자식들이 죽어갈 것을 예상하기에 슬픔을 느낀 기억은 납니다. 하지만 공포는 없었습니다. 제 말은 말입니다, 우리는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단 한번도 자신의 도시가 침공될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아 9.11 이후 극단적 병리적 현상을 보이는 미국인들이나 불바다 발언에 발칵 뒤집히는 한국인들이 이들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공포의 부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쿠바인들처럼 수년을 매일 공중에서 핵폭탄이 떨어지는 공포와 싸우거나 북한인들처럼 6.25 전쟁 시절부터 수십년간 비슷한 상황을 가정해 온 경험을 갖지 않은 이들이 이러한 삶의 체념과 이로부터 나오는 소름끼치고 폭력적인 선군 정치관의 강도와 폭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결국 92년 하바나 회의는 미국이 맥나마라와 같은 지성들의 성찰적 노력으로 얼마간은 달라질 수 있다는 긍정적 가능성과 동시에 이들 지성들이 아직도 제3세계 적성국가들의 역사적 맥락과 심리적 상태에 대단히 무지하다는 한계를 잘 보여준다. 공포에 취약한 국가와 공포를 체념한 국가 간의 관계 정상화는 동막골 영화의 낭만주의처럼 쉽지 않다. 설령 정상화가 몇 년 뒤 이뤄진다 하더라도 수많은 예상치 못한 장애가 그 이후에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과연 가까운 미래에 남북한과 미국이 94년 소위 북핵 위기의 재평가를 위해 평양에서 모인다면 우리는 92년 하바나 회의의 관계자들과 얼마나 다를 수 있고 또 얼마나 다른 결과를 산출할 수 있을까? 우리가 쿠바 미사일 위기 같은 과거의 역사를 부단히 재발굴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고민의 심화를 위해서일 것이다.

* 거칠고 조야한 연재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에게 송구하며 동시에 감사드립니다. 보다 정교하고 이론적으로 정리된 내용을 통해 나중에 책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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