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1일 저녁 7시.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 밑 운암리의 지역 청소년 대안 자립학교인 두레배움터에 농민과 지역 주민 40여 명이 모였다. 30대에서 60대까지, 청년 농민에서 할머니까지 사곡면, 우성면, 신풍면, 유구읍 등 십승지로 널리 알려진 유구마곡 지역의 동네 주민들이었다.
두레배움터는 1960년대 사곡면에 중학교가 없을 때 마곡사가 땅을 제공해서 동네 주민들이 모두 모여 울력으로 진, 중학교 검정고시 과정의 공민학교였다. 그러다가 1980년 면 소재지에 사곡 중학교가 개교하면서 폐교돼 방치되어 있던 곳이었다. 2010년 뜻있는 몇 사람이 폐교 터를 임대하여 생태건축협동조합을 운영해 오다가, 지금은 탈화석연료 대안 농업, 재생에너지, 생태건축 등을 배우는 지역사회 청소년 자립 대안학교로 탈바꿈해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지역 주민들이 모인 이유는 놀랍게도 내년 6월의 개헌과 지방선거에 관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개헌 민회를 하기 위해서였다.
6~9명씩 각각 5개 조로 나누어 사회자와 기록자, 발표자를 뽑은 다음 워크숍 방식의 민회가 진행됐다. 워크숍이란 말 그대로 특정 주제 또는 과제에 대해 참여자들의 의견을 모두 다 펼쳐 놓고 이를 하나씩 하나씩 성찰해보고 조정해보면서 최대한의 공통분모를 찾아 실제 실천 가능한 합의를 도출해 내는 작업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주로 주민운동 활동가들에 의해 도입된 방식이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토론과 달리 워크숍은 어떤 경우든 참여자 모두에게 발언하도록 하고 참여자의 자발성과 구체적인 실천을 최대한도로 끌어내는 회의와 토론 방식이다. 오늘날 워크숍은 한국의 현실과 문화에 가장 최적화된 민주주의의 회의와 실천 방식으로 정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민회에 참가한 주민들은 난생처음 접하는 민주주의의 토론과 회의에 대해 진지하게 적극 참여했다. 그동안 내가 주권자로서 한 일은 무엇인가, 개헌과 지방선거에서 떠오르는 단어, 주권자로서 개헌과 지방선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 등의 주제를 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3시간이 넘게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민회 마지막 순서는 참여자들이 모두 한 사람씩 자신의 느낌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이런 토론은 태어나고 처음이다. 그동안 토론이라고 하면 똑똑한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서로 '내가 옳다'고 말싸움하는 걸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나 같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생각을 말하고 의견을 나누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게 더 중요한 토론이라는 것을 오늘 배웠다. 이런 민회를 알게 되어 정말 기쁘다."
"나하고는 거리가 멀고 잘 모르는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개헌과 지방선거에 대해 토론을 해보니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내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정말 뜻 깊은 시간이었고 오늘 같은 민회가 공주 전체로 확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민주주의가 이런 거구나, 민주주의가 내 삶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어 민회가 고맙다. 헌법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당장 가서 읽어보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여자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것은, 민회를 계기로 우리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하고도 중요한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개헌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은 실천을 모아 공주 지역부터 바꾸는 일이야말로 주권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다짐이었다. 민회라는 말 자체도 처음 듣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민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주민들 하나하나의 얼굴에는 홍조가 어려 있었다.
하루 전날인 9월 20일 공주 시내에서 열린 작은 민회에서 난 한 초등학교 학생이 '나는 주권자로서 무엇을 했나?'라는 질문에 놀랍게도 '학교에 가는 것'을 들기도 했다.

10월 9일에는 의당면 소재지의 한 음식점에서 의당 마을민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어서 10월 13일에 공주시 고마컨벤션 센터에 약 9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개헌과 지방선거를 주제로 '우금티 촛불 공주 민회'를 열었다.
공주민회에 참석한 참여자들의 반응 또한 앞서 사곡면 두레배움터에서 열린 작은 마을민회 참여자들의 느낌과 비슷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리고 지속가능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주권자가 깨어나야 하고 이런 민회를 일상 속에서 열어야 한다는 생각을 모두가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냥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다가 갑자기 주권자의 책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는 청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 민회는 이제 시작이고 이런 민회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박근혜 탄핵과 새로운 정부의 출범으로 그 뜨거웠던 광화문의 촛불이 종 치고 막 내린 것은 아니다. 아니 막을 내려서도 안 된다. 광화문 촛불은 이제 지역의 촛불로 그 중심을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광화문 촛불이 중앙정치를 바꾸었다면 이제 지역의 촛불 주권자들은 자신의 생활 공간인 지역에서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구조를 바꾸고 있는 중이다.
주권자가 숨 쉬며 살고 있는 생활공간은 지역이다. 대한민국 주권자들의 모든 일상생활이 영위되고 있고, 매일 매일의 생활공동체인 지역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고 중앙이다. 지방이란 말은 중앙의 하위 행정 단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와 달리 지역이란 말은 풀뿌리 지역공동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런 지역에서부터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주권자 연대의 힘을 우리는 광화문 촛불에서 경험하고 자각할 수 있었다.

지역이 바뀌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바뀌지 않는다. 적폐의 뿌리는 지역에 깊숙이 박혀 있다. 단순히 좋은 대통령을 뽑았다고 구체제가 바뀌는 건 아니다. 구체제의 기득권자들이 청산되지도 않는다. 주권자가 제대로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다운 민주공화국은 각성한 주권자들이 지역에서부터 구체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적폐의 뿌리를 뽑아내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모종을 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오늘날 부의 대물림과 불평등, 중앙정부 관피아의 가렴주구 등 구체제의 적폐는 극에 달해 있는 상태이다. 이런 현실을 과감하게 바꾸기 위해서는 주권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2018년 6월 13일 개헌을 통해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 지방선거에서 주권자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전국 각 지역에서 일어나는 풀뿌리 지역민회 운동이다.
123년 전인 1894년 동학 농민군의 우금티 전투는 흔히 알고 있듯 일본군의 기관총에 맞서 죽창을 들고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던 무모한 싸움이 결코 아니었다. 우금티 투쟁은 관군과 중인, 양반 유생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항일 연합전선을 조직, 공주 감영을 점령한 뒤 2011년의 미국 월가 오큐파이(occupy) 시위 농성처럼 점거 농성 투쟁을 통해 침략자 일본을 물리치고자 했던 가장 현실적인 정치투쟁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정치투쟁의 원동력이 다름 아닌 민회(취회, 도회)를 통해 결집한 수많은 밑바닥 풀뿌리 농민들의 의지와 각성이었다.(참고 : <역사비평> 1015 봄호(11호) 지수걸 '국가의 역사독점과 민중기억의 유실: '우금티 도회'를 제안한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정치의식과 제세구민 의지와 기개는 관군이나 일본군들도 놀랄 정도로 높은 것이었다. 이는 수많은 정치 토론과 논의를 거쳐 통해 결집된 정치투쟁의 내용에 대해 농민군 모두가 확신하게 되는 민주주의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민회의 힘이다. 2016~17년 겨울의 매서운 추위조차 누를 수 없었던 한국 촛불 민주주의의 위력은 바로 이 같은 우금티 동학 농민군의 민회의 위력 그 자체였다.
주권자들이 스스로 모여 평화 시위를 통해 정치 체제를 변화시키는 촛불 민주주의 정치투쟁은 오늘날 서구를 비롯한 낡은 대의제 엘리트 기득권 체제 아래 신음하고 있는 전 세계 주권자들에게 민주주의를 향한 등대의 불빛을 보여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학농민군의 민회를 그대로 이어받은 만민공동회와 3.1만세 시위, 4.19. 5.18. 6.10 항쟁 등 나라가 도탄에 빠져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터져 나온 구국의 주권자 민회 정치 투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원형이자 힘이다.
이제 우리는 이 같은 저항의 민회를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의 민회로 진화시켜야 한다.

조직되지 않은 주권자는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권을 잃은 노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개별화, 파편화된 주권자는 권력자의 손쉬운 먹잇감일 뿐이다. 그러나 주권자들이 모여 연대 연합하면 위대한 지혜와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우금티 농민군의 민회는 보여주고 있다. 2018년 개헌과 지방선거를 앞두고 주권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극장정치와도 같은 정당의 선거 전략을 구경만 하고 국회의 개헌특위 활동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민회가 됐건 만민공동회가 됐건 스스로 나서서 지역에서부터 연대·연합하는 것이다.
지역의 주권자 촛불은 처음에는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런 소수를 다수로 바꾸기 위한 힘의 원천은 처음부터 지역과 지역이 연대하는 지역 연대연합이다. 지방분권이 지방자치단체장 등 지역 권력자들의 기득권 나누기 식 분권으로 귀결되지 않게 하는 길은 지역 주권자들의 연대연합을 토대로 구축된 지역과 지역의 연대연합이다.
국민주권 개헌은 그야말로 국민이 주도하는, 국민 스스로의 힘에 의해 바꾸는 개헌이다. 내년 6월에 국민주권 개헌이 안 되면 국민이 나서서 적폐 국회와 적폐 사법부를 탄핵 청산하고, 개헌을 하면 된다.
스위스는 1848년 스위스 연방 출범 이후 1848~2002년까지 약 150여 년 동안 연방 수준의 국민투표만 약 500건이었다. 그 가운데 헌번개정안이 212건이었고 통과된 것이 155건이었다. 1년에 한 번씩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물론 대부분 주권자인 스위스 국민이 발안한 헌법개정안이었다.
우리 헌법은 70여 년 동안 고작 9번 개정되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주권자들은 헌법 개정안을 발의할 권리 자체조차 박탈되어 있는 상태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개헌안을 심의하고 발의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개돼지에 지나지 않는가?
아니다. 우금티 촛불 민회에 모인 장삼이사의 평범한 보통 공주 주권자들은 우리는 그런 개돼지가 아님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는 위대한 주권자의 한 사람이다. 이제 진정한 주권자의 시대는 민회를 통해 시작되고 확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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