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로의 화가와 서예가가 만나 삶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그림과 글씨 콜라보레이션전이 마련된다.
동서양미술을 단순 모방하는 단계를 벗어나 ‘개념 있는 작업’을 시도한 이인(二人)전은 ‘장철(張鐵)과 묵개(黙介)의 相’ 전시회(7월 10∼20일, 인사동 토포하우스)이다.
동양화의 수묵담채는 물론이고 오브제를 비롯한 복합매체, 서예의 여러 기법을 활용한 이들의 콜라보는 그림이 글씨를, 혹은 글씨가 그림을 받쳐주면서 ‘상(相)’의 반조(返照)와 만다라를 보여주고 있다. 상(相)은 눈(目)과 사물(木)이 만나 이루는 각종 이미지의 표상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음양상보(陰陽相補)에서 시작하여 심물(心物)의 합일(合一)과 내외(內外)의 교접(交接)을 통해 사물을 생동하는 이미지의 신비로 변신시킴으로써 새로운 판타지를 연출한다. 각 작품들은 마치 새색시의 자태처럼 다가온다. ‘상(相)’전은 조형적 궁합의 다채로운 시도와 실험으로 보는 이에게 흥분과 전율을 자아낸다.
화가 장철은 그동안 ‘돌 이야기’전을 비롯해서 ‘수묵진경전(水墨眞景展)’과 ‘산(山)전’을 통해 한국조형미의 고졸(古拙)과 신출(神出), 그리고 그것이 종합된 영적(靈的)인 화풍을 뽐내왔다. 장철의 이미지 속에는 항상 원시의 샤먼들이 느꼈던, 영매(靈媒)로 가득 찬 물상(物相)들과 그로인한 만물만신(萬物萬神)의 신비가 숨어있다. 특히 돌을 표현하는 그의 에스프리는 보는 이의 심층을 건드리면서 가벼운 운율과 묵직한 교향악의 선율을 동시에 자아낸다. 돌의 생명들은 공중으로 부양하는 돌탑이 되기도 하고, 암산(巖山)의 거인(巨人)으로 돌변해 시공을 초월한 괴물(怪物)로 다가오기도 한다. 메갈로폴리스에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점차 작아지기만 한 우리의 몸들은 그이 작품들과 만나면 대신(大身)이 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말하자면 위인성신(爲人成神)의 상(相)으로 둔갑한다.
한학자이기도 한 묵개(黙介) 서상욱(徐相旭)은 이번에 특히 ‘상(相)자’의 해자를 통해 나무 목(木)과 눈 목(目)자의 연속적인 전개와 변형, 대칭-비대칭의 역동적 변신을 통해 부처와 보살의 세계, 인드라를 표출함으로써 상대적인 세계상을 돌려주는데 진력했다. 갑골문과 금문 등 한문의 변천과정을 필의(筆意)로 느끼도록 한 점도 특이하다.
두 사람이 드러내려고 하는 대상은 북악의 진면목이다. 소동파가 여산의 진면목을 몰랐던 것은 산속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처럼 둘은 북악의 진면목을 멀리서 타자의 눈으로 보려고 했다. 그렇게 북악을 본 사람이 있었다. 청(淸)의 홍타이지(皇太極)는 병자호란 때 한국을 쳐들어왔지만 조선의 정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북방족의 동류의식을 통해 양국의 화친을 담보 받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한국의 북악의 전경을 바라보는 순간, 자기 아버지 누르하치가 추구했던 문수보살의 화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문수(文殊)보살을 의미하는 ‘만주’(만주라는 지역명칭과 민족명칭의 시원이다)라는 새로운 민족의 탄생을 선언하고 북악의 전경을 본 이후에 불국토의 염원을 새겼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세계최강의 제국을 건설한 그의 깨달음이 북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검은 눈물’을 비롯해서 두 사람이 표현한 북한산의 여러 모습들은 문수보살의 환생이다. 와불처럼 누워있는 북한산은 세상 사람들에게 서로 상생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는 있는 까닭에 ‘검은 보살’로 불러도 좋으리라. 영욕에 찌든 오늘의 인간 군상들에게 무언의 경고를 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말로 ‘그리다’는 여러 의미로 통한다. ‘그림’도 되고, ‘글씨’도 되고, 나아가서 ‘그리워하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 결국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것은 마음의 세계 혹은 그리워하는 세계를 담는 행위이다. 그림과 글씨가 한데 어우러져 펼치는 ‘상(相)전’은 우리를 잃어버린 세계로 인도하는 판타지의 향연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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