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3일부터 3박 4일간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 대로에서 벌어진 시위는 많은 화제를 낳았다. 특히 한파와 눈보라 속에 은박 담요를 둘러쓰고 밤샘 농성을 벌인 청년들은 '키세스단'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큰 관심을 받았다. 이 키세스 시위를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또 있다. 당시 무대에 올라 "퀴어 축제에 트랙터가 왔으면 좋겠다"고 발언했던 당근(활동명)이다.
"그 발언이 SNS에 퍼지며 여러 오해와 거짓 정보로 많은 비난을 받았어요. 발언 당시 시간관계상 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저에 대해 추측을 넘어 확신을 하면서 다양한 비하 발언을 쏟아내더라고요. 트랜스젠더란 얘기도 들었고 2찍 작전세력이라는 말도 들었죠."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나온 줄 알았던 광장 안에서도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혐오의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근은 생각했다. '우리는 정말 대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구나.'

탄핵광장 이전부터 혐오에 맞서온 사람들
혐오는 그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2016년 박근혜 퇴진 시위를 경험한 그는 이듬해부터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매년 참석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엔 한국여성의전화 지부에서 자원봉사 겸 회원 활동을 하면서 여성 관련 시위에 꾸준히 참여했다.
"미투 운동 이후, 특히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에 여성 시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저도 그 시위들에 항상 나가는 편이었어요. 주로 소규모 집회였고, 주변 남성들의 공격적 시선과 야유를 늘 감내해야 했죠. 최근 몇 년 사이 인식이 개선되긴 했지만 퀴어 축제는 더 심했어요. 극우 단체가 몰려오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뜨악한 시선도 만만치 않았죠. 그런 데 참여했던 사람들은 되게 단단해요. 그 상황들을 다 이겨내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온 사람들이거든요."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활발했던 2020년에 당근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 벌인 1인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그해 8월 지하철 신촌역사 내에 걸린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아이다호(IDAHO) 광고판이 심하게 훼손되었던 사건을 그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커터칼로 찢어서 아예 광고판 자체가 뜯어져 나간 적도 있고, 재설치 후에도 낙서와 훼손이 발생해서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어요. 친구랑 신촌역에 가서 뜯긴 광고판을 직접 보고 재설치되는 것도 봤죠. 평소에는 보이지 않게 느꼈던 차별이 막상 눈앞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니까 그때 받은 인상이 강했어요. 세상은 아직 여전하구나."
지난 3월 남태령에서 벌어진 전봉준 투쟁단 2차 트랙터 시위 때는 현장에 극우단체 관계자들이 먼저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 남태령역에서 집회 장소까지 그들에 둘러싸여 길을 뚫고 지나가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집회 참가자들은 어김없이 '너 남자냐, 여자냐, 아니면 트랜스젠더냐' 식의 무작위 혐오 발언에 시달려야 했다. 퀴어문화축제에도 극우 단체가 오지만 그렇게까지 가까운 적은 없었는데, 그날은 그들의 공격적인 기세를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고 당근은 회상했다.
"퀴어 축제에 트랙터" 한 마디에 쏟아진 비난과 혐오
작년 12월에 있었던 1차 남태령 시위에 그는 새벽 알바를 하느라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밤새 라이브를 지켜보다 아침에 퇴근 후에 현장에 합류했다. 그 당시엔 잘 몰랐는데, 1월 초 한남동 3박 4일 집회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남태령을 언급하는 것을 듣고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태령이 참 기적처럼 일어난 일이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퀴어 행사와 여성 시위에 계속 나갔던 것처럼, 그동안 그런 집회를 경험했던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꽤 많았을 거예요. 또 그걸 지켜만 보고 막상 나오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거고요. '저 사람들이 저기 있는데 나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사람들이 남태령 등 이번 광장에 나온 거라고 생각해요."
말벌 동지라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생겨날 수 있었을 거라고 당근은 말했다. 그동안 소수자들의 싸움을 계속 지켜왔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광장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 친구들 중에는 옛날 민주화운동 시절만 생각하고 데모라는 것을 아주 위험하고 폭력적인 것인 줄 알았던 경우도 있어요. 한쪽에선 경찰이 몽둥이 들고 진압하고 이쪽에선 화염병을 던지지 않나, 이런 생각 때문에 겁이 나서 집회에 못 나오는 친구들이 실제로 꽤 있었어요. 그런데 내란 사태를 맞아 용기 내어 뛰쳐나와서 막상 광장을 보고 어라, 생각보다 안전하네, 심지어 아주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네, 이런 걸 알게 된 거죠."
초기에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이나 양심 때문에 시위에 나왔는데, 점점 그 동력이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당근은 말했다. 양심이나 정의보다 나가 있는 사람들이 너무 걱정돼서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사람 수가 적으면 극우 세력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고, 경찰의 탄압도 심해진다. 혹여 내가 없을 때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무슨 일을 당해도 같이 당하는 게 마음 편하지 않을까. 그 마음이 특히나 간절했던 순간은 지난 3월 말에 있었던 2차 남태령 시위였다.
"남태령에서 밤을 새다가 새벽 다섯 시쯤에 경복궁역 앞 소식을 알자마자 달려갔어요. 그때 경찰의 트랙터 탈취를 막으려던 노동자, 시민들이 경찰에 의해 내동댕이쳐지는 걸 보고 저도 앞뒤 생각 없이 막 뛰어들었죠. 그때 감정을 뭐라고 말하기 힘드네요. 이 트랙터가 뭐라고 이렇게 우리를 던지고 때리나. 화도 났지만 슬프기도 했어요. 누가 뭐라 말해도 안 들리고 눈앞에 있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이날 경찰 차벽을 피해 광화문에 진출한 단 한 대의 트랙터를 두고 경찰과 시민들 간에 벌어진 싸움은 격렬했다. 지금까지 나간 시위를 통틀어 그때가 제일 위급한 상황이었다고 당근은 회상했다. 결국 경찰은 트랙터를 포기하고 철수했고, 시민과 농민은 트랙터를 앞세우고 승리의 행진을 벌였다. 그전에도 농민들과 광장에서 만나면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정도는 되었지만, 그 일을 함께 겪은 이후에 더 끈끈한 연대 의식이 생겼다고 그는 말했다.
이번 광장에 사람 많았던 이유…소수자의 싸움 지켜온 이들이 있었기 때문
당근을 만나게 되면 이걸 꼭 물어봐야겠다,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이번 광장에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가 왜 그렇게 많았는지 말이다. 우리나라에 성소수자가 이렇게 많았나, 아니면 성소수자들이 유난히 이번에 많이 나왔던 것일까. 지난 겨울 이후 가슴속에서 내내 피어오르던 궁금증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이번 광장에서 무지개 용품이 많이 배포됐기 때문이에요. 민주노총에서도 무지개 투쟁 띠를 나눠주고 다른 단체들에서도 많이들 그랬죠. 그걸 달고 다닌 사람들 중에 소수자도 있겠지만 '나도 연대하겠다'는 의미로 다는 분들도 많았을 거예요. 그게 무지개 아이템이 많았던 이유인 것 같아요.
두 번째로는 실제로 성소수자들이 이전보다 광장에 많이 나오기도 했을 텐데, 그건 퀴어문화축제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성소수자는 말이 소수자지만 생각보다 그 수가 많아요. 퀴어문화축제에 오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아주 많고요. 이름은 축제지만 사실은 시위의 느낌이 강하고, 행사에서는 늘 여러 가지 의제가 같이 나와요. 세종호텔이나 금속노조 등도 계속 참여해 왔고 장애인들도 휠체어를 타고 같이 행진을 했어요. 그러면서 일종의 시위처럼 되기도 하는데, 그 때문인지 성소수자들은 자연스레 사회적 의제나 집회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에요. 광장이란 그들에게 낯선 공간이 아닌 거죠."
지난 12월 비상행동에서 발표한 '평등수칙'이 떠올랐다. '모든 참가자는 성별, 성적지향, 장애, 연령, 국적 등에 상관없이 동등하다'는 평등수칙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도 광장에서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같은 광장 안에서도 여성이나 소수자 비하 등 혐오가 발생했던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았던 데는 이 평등수칙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높아진 시민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광장의 평등한 분위기를 만든 요인으로 당근은 하나를 더 꼽았다. 바로 무대 발언이다. 집회가 거듭되면서 점차 평등수칙을 지킨 발언을 해달라는 요구가 나왔고, 발언 신청자를 바로 무대에 올리는 방식에서 발언문을 먼저 받아서 검토 후 채택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비상행동 측에서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맞춰가려는 노력, 수많은 사람들의 뜻이 모여서 평등한 광장으로 만들어간 변화의 과정도 참 소중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광장은 축제처럼 흥겨웠어요. 응원봉이나 깃발도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지만, 행진 때 신나게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걸었던 것이 저는 제일 인상에 남아요. 이것이 퀴어 축제의 영향이라는 얘기를 듣고 좀 놀란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가요?"
"퀴어 축제의 영향이 아주 크죠. 1인 기수들의 깃발도 그렇지만 행진 트럭에서 계속 노래를 틀고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르면서 갔던 것, 특히 케이팝을 틀었던 것은 퀴어퍼레이드의 영향이 분명해요. 퀴어 축제에서 늘 그때 트렌드인 케이팝을 틀거든요. 민주노총에서 진행한 이번 5월 1일 노동절 집회도 퀴어퍼레이드와 좀 비슷한 분위기였어요. 이 즐거운 시위 문화는 그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싶어요. 제 친구가 집회에서 행진하면서 그러더라고요. 매주 퀴어퍼레이드하는 것 같다고."

소수자 보호한 '평등수칙', 높아진 시민의식 반영
소수자들은 사회에서 차별당하고 소외된 아픔을 축제와도 같은 흥겨운 시위 문화를 통해 이겨내왔다. 슬프고 외로울수록, 폭력과 편견의 시선이 그들을 짓누를수록, 더 크게 노래 부르고 춤추며 서로를 감싸고 위로했다. 이제 광장의 전면에 등장한 그들의 춤과 노래는 더 이상 소수자의 문화가 아니다. 강자들의 폭력 앞에 상대적 소수자가 된 광장의 모든 사람들에게 지치지 않고 싸울 힘과 용기를 불어넣은, 주류의 문화가 되었다.
'퀴어 축제에 트랙터가 왔으면 좋겠다'는 당근의 발언도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을 거스르고 현실이 되었다. 올해 6월에 열리는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농민단체에서 처음으로 부스를 내고 참가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 4월 15일 향린교회에서 열린 제26회 서울퀴어문화축제 개최 발표 기자회견에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한승아 정책위원장은 "한국 사회에서 늘 소수자였던 농민들의 외로운 투쟁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달려와 준 소수자 친구들에게 이제 우리가 조건 없는 연대를 보여드리겠다"면서 "세상은 우리 같은 소수자들, 차별받는 사람들이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퀴어랑 농민이라니.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조합이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연대가 더 소중하게 느껴져요. 한가지 걱정은 농민들이 축제에 오셔서 너무 어색해하시면 어쩌지 싶은 거예요.(웃음) 근데 좀 어색하더라도 매년 보고 싶고, 매년 오셨으면 좋겠어요."
소수자들의 손을 잡은 것은 물론 농민만이 아니다. 이번 광장에서 어디를 가든 볼 수 있었던 무지개는 연대의 상징인 동시에 감사의 상징이었다. 청년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달려와 연대해준 것이 너무도 고마운 농민들이 퀴어 축제에 참가하는 것처럼, 노동조합과 각 투쟁사업장에서도 이들의 연대에 대한 감사와 애정이 무지개로 표현되었다. 반대로 청년 중에 전봉준 투쟁단 손수건을 꼭 매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그곳에 함께 매인 마음, 그것이 지난 광장을 만들어낸 힘이었다.
윤석열 파면 이후에도 당근은 세종호텔과 거통고지회 고공농성장, 지혜복 선생님이 농성하는 서울시교육청,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 마트노조 집회 등 서울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시위에 참여하는 말벌 시민으로 살고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 지난 2월에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으로서 학원을 다니고 자격증 시험을 보며 미래도 준비하는 중이다.
"퀴어 축제에 트랙터" 요청에 화답, 부스 내고 참가키로 한 농민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겪는 불안함은 그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주거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직장은 뭘 선택해야 할지, 취직을 한다 해도 오래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 노년기까지 어떻게 살아갈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기분은 또래 청년들과 비슷하다고 했다. 여기에 덧붙이게 되는 그만의 고민이 있다. 성소수자로서 노후가 어떨지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디어를 포함해 사회적으로 성소수자의 나이 든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어요. 여성의 경우는 방송 등에서 비혼 여성의 노후를 좀 보여주거나, SNS에도 고양이를 키우면서 사는 비혼 여성의 모습이 나오기도 하죠. 그런데 성소수자의 노후에 대해서는 모델로 참고할 만한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해서 친구들과 그 고민을 나눈 적이 있어요. 내가 이 정체성으로 나이가 들면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까. 나도 괜찮은 노후를 누릴 수 있을까."
분명히 이전에도 성소수자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도 늙어서 노후를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철저히 감춰져 드러나지 않았다. 젊은 성소수자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을 처음 알고 나도 좀 놀랐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실은 당연한 일인데.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대선을 맞아 지난 광장의 가장 큰 화두였던 사회대개혁 과제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어떤 것이 사회대개혁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당근은 신중하게 말을 고른 끝에 "차별금지법 제정"이라고 답했다.
"진짜로 사회가 개혁되려면 구성원들의 의식까지 개혁이 필요하겠죠. 하지만 그렇게까지는 힘들 것이고 일단 눈에 보이는 법적‧제도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라는 것은 그 소속 구성원들에 의해 계속 변화하는 것이고, 개혁돼도 또 개혁이 필요한 게 사회잖아요. 그럼에도 굳이 답을 하자면, 사회대개혁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확인할 수 있는 지표는 차별금지법 제정이라고 봐요."
통상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고 불리는 차별금지법은 성 차별, 장애인 차별뿐 아니라 인종, 성소수자, 학력, 종교, 사상 차별 등 생활 속 모든 영역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법으로, 2006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덟 차례 이상 발의됐으나 한 번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차별금지법은 소수자들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사회적 의제이기도 하다.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그 어느 때보다 널리 포용한 이번 광장의 분위기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대선 레이스에서 보여준 후보들의 행태는 실망스러웠다. 광장에서 그토록 소리높여 외쳤던 시민들의 목소리, 사회대개혁 의제는 대선 정국에서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였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를 제외한 다른 대선 후보들은 "아직은 논의할 때가 아니다"는 말로 또다시 차별금지법을 외면했다. 19년이면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시간인데, 사회가 바뀌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일까. 하지만 포기는 이르다.
사회대개혁 확인할 수 있는 지표는 '차별금지법 제정'
"한남동 키세스 집회 발언 이후에 제가 무지개 깃발을 만들어서 들고 다녔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저를 알아보시거나 와서 고맙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저를 붙잡고 펑펑 울면서, '그동안 너무 힘들었고 광장에 나와서도 좀 힘들었는데 무지개 깃발을 보고 힘을 얻었다'는 분도 있었고요. 소수자가 마음 내어 나오는 것이 그만큼 힘든 일이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깃발을 들고 목소리를 내면 그것에 위안 받고 용기 얻어 나오는 사람들이 분명 있어요."
당근의 한남동 발언이 논란이 되었던 시기는 '탄핵 광장인데 왜 자꾸 다른 얘기를 하느냐'며 퀴어 의제가 등장하는 것을 불편해 하는 목소리들이 나올 무렵이었다. '깃발 내려라, 소수자는 입을 닫아라, 우리는 순수한 촛불 시민으로만 보여야 한다'는 오래 묵은 목소리. 박근혜 탄핵시위 시절,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우리 귀에 익어온, 광장 안에서도 또 다른 약자를 억압하는 내부의 목소리.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번 광장의 주류는 바로 그 소수자들이었다. 그리고 광장을 넘어 각 투쟁사업장으로, 더 넓은 사회적 의제로 광장을 넓힌 주역도 그들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후 당근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손으로 직접 만든 무지개 구슬 키링이었다. 무지개 깃발을 들고 다니던 광장의 당근에게 누군가가 슬쩍 건네고 도망치듯 사라졌다고 한다. 함께 전달한 초코바에는 '광장의 무지개를 아끼고 사랑하는 시민'이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키세스 집회 발언에 대한 비난이나 소수자 혐오는 그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 '트랙터를 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농민이 화답했고, 무지개 깃발을 바라보며 이렇게 용기를 내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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