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다. 갑자기 선선해진 날씨에, 언제 찜통더위가 왔다 갔는지 흔적조차 잘 찾을 수 없다. 추석을 앞두고 역대 최악의 가뭄으로 저수지까지 말라버린 강릉은 간신히 재난 사태가 해제되었다. 며칠 새 제대로 계절의 옷을 바꿔 입은 날씨는 변화를 맘껏 뽐낸다.
우리는 이렇게 망각한다. 올 여름이 또 얼마나 많은 온열질환자를 만들었는 지, 매년 빠른 속도로 높아지는 해수 온도 때문에 바다의 물살이들이 얼마나 많이 떼죽음을 당했는 지, 계절의 변화를 핑계삼아 순식간에 잊고 만다. 하지만 지구는 오래 기억하고 끈질기게 남긴다.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는 지구에 남아 지구의 온도를 계속해서 상승시키고, 이는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극한기상을 만들어냈다. 폭우로 도시가 잠기는 날이 있는가 하면 땅이 쩍쩍 갈라지다 못해 강이 마르는 가뭄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기후위기 심각성을 전세계가 인정하며,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을 1.5도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각국은 '온실가스감축계획'을 수립하기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파리협정'이다. 한국 역시 이 행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결과는 민망했다. 첫 번째 제출한 계획은 '기후악당'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았다. 이후 고쳐서 제출한 계획도 '선진국'이라는 타이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 사이 정부는 바뀌었고, 우리는 2035년까지 온실가스를 어떻게 감축할 것인지에 대한 목표를 다시 논의해 제출해야 한다.
마침내 공개된 정부의 '2035 NDC' 시나리오
환경부의 '2035 NDC'(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초안이 마침내 지난 8일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에서 발표되었다. 환경부는 이어 19일 '2035 NDC 대국민 공개논의'를 시작으로 종합적인 내용부터 부문별 감축안에 대한 토론과 공론화 작업에 착수했다. 지금도 온라인 공론장(opinion.2050cnc.go.kr)에 여러 의견들이 제출되고 있다.

이재명 정부와 환경부는 2035 NDC와 관련한 4개의 시나리오를 제출하면서 '헌법 불합치' 결정과 파리기후협정 내 '진전의 원칙'을 중심으로 작성했다고 밝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다음 세대에게 모든 감축량을 떠넘기는 위로 볼록(48% 감축)안, 2) 과학적사실과 국제기준과 무관한 선형 감축안(53% 감축), 3) IPCC(기후변화 국가간 협의체) 권고 기준에 맞춘 61% 감축 방안, 4) 탄소예산과 미래세대를 고려하고 한국의 배출 책임을 감당하는 65% 감축안이다.
사실상 환경부가 제안한 1번과 2번의 안은 헌법 불합치 결정과 진전의 원칙 에서도 한참 벗어난 내용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61% 이하의 경로를 결정한다면 국제사법위원회의 권고에도 배치되는 것으로, 기후피해를 입은 국가가 국제소송으로 한국에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된다. 그렇다면 실제로 2035 NDC 결정에서 다뤄져야 하는 핵심 토론은 '2035 NDC를 65%에 대한 합의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이다.
지구를 위한 숫자 앞에도, 숫자 뒤에도 사람이 있다
이재명 정부는 9월에 감축안을 시나리오 형태로 발표하고, 한 달간 논의한 뒤 오는 11월에 2035 NDC를 최종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그럼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결정, 국제사법재판소의 권고에 배치되는 감축안을 왜 논의 내용에 포함시켰을까. 기후위기 대응에 실패할 것이 뻔한 목표를 왜 국민과 함께 토론하겠다고 할까. 정책결정자들이 늘 말하는 '실현가능성'의 덫에 다시 걸린 것이다.
각국의 정책결정자들이 원탁에 모여 현실과 실현 사이에서만 계산하고, 그것을 근거삼아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으려고 했기에 파리협정은 '온도 제한 목표'에 합의했다. 지구는 다양한 생물과 관계가 공존하는 유일한 행성이며, 한 국가의 현실만을 따질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정권이 바뀌었어도 한 걸음이라도 진전된 토론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기후위기 시대에서 전환을 위한 지원과 규제는 기업과 민간, 시민과 뭇생명 모두에게 해당되고 적용되는 행위여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정책실행으론 결코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이 될 수 없다.
이제 '어쩔 수가 없다'는 거짓말은 그만둬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정말 '실용을 통해 국민의 삶을 변화시키는 성과 중심의 국정'에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기후위기 대응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이는 실용주의의 이름으로 외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탄소중립 사회로의 전환은 단순한 환경 정책이 아니라 에너지·산업·교통·도시 전반에 걸친 구조적 혁신을 요구하는 미래 전략이다. 시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지속가능한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 이재명 정부는 기후위기를 '실용'의 이름으로 정면 돌파해야 한다. 이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책임 있는 실천으로 실용주의를 증명해야 할 때다. 그 첫 번째 시험대가 이번 2035 NDC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일이 되었다.
기후를 중심으로 하는 부처 개편부터,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현재의 눈으로 전환의 동력을 만들어야 할 정치의 어깨는 무겁다. 그러나 그 무게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책임이다. 지금 우리가 선택하는 방향이 앞으로 수십 년간 대한민국의 지속가능성과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는 회피할 수 없다. 현시점에서 실용주의는 결국 국민의 삶을 지키고 미래를 준비하는 용기 있는 선택에서 시작된다. 이재명 정부가 진정한 실용주의 정부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외면하지 않고 '2035 NDC 65%'를 만드는 지금 이 순간부터가 그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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