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산업정책은, 아무 정책도 펼치지 않는 것이다. (The best industrial policy is none at all.)"
199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Gary S. Becker)가 <비즈니스위크> 지에 기고한 칼럼 제목이다. 신자유주의, 그리고 자유무역을 신봉했던 이들에게 정부가 '산업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사사건건 경제에 개입하는 일은 재앙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그 천덕꾸러기가 이제 귀한 몸이 되어 컴백 중이다. 신자유주의·자유무역 신봉자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국제통화기금(IMF)까지도 최근 '산업정책의 귀환(Return of Industrial Policy)'을 주제로 한 페이퍼를 발표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천덕꾸러기 '산업정책'의 귀환
아래 그래프는 IMF가 지난 8월에 내놓은 "산업정책 : 성장과 복원의 트레이드오프(trade-off) 관리하기"라는 페이퍼에 등장하는 그림이다. 선진국(AE)과 개발도상국(EMDE)에서 새롭게 채택된 산업정책의 개수를 연도별로 나타낸 것이다. (참고로 중국은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됨)

선진국·개발도상국 할 것 없이 산업정책 도입이 늘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가장 결정적인 계기점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과 물자들 모두 교역이 어려워지고, 글로벌 공급망 교란을 겪으면서 각국 정부들은 매우 간절하게 산업정책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분석 대상을 무역이 활발한 국가들(한국,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일본, 브라질, 캐나다, 인도, 호주, 러시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사우디아라비아)로 좁혀서 보면 더 놀라운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2023년에 이들 나라가 채택한 산업정책의 수(2337개)는 6년 전인 2017년(803개)과 비교했을 때 무려 3배가 늘어난다.

위 그래프 역시 신자유주의·자유무역의 신봉자인 '맥킨지&컴퍼니'가 올해 5월에 발표한 "보호에서 촉진으로 : 산업정책의 새로운 시대 (From protection to promotion : The new age of industrial policy)"라는 보고서에 등장하는 그림이다.
관세전쟁이 가속시킨 산업정책 붐
하지만 국제통화기금이나 맥킨지&컴퍼니의 리포트에는 올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전쟁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 관세전쟁으로 미국과 교역하는 모든 나라들이 서둘러 산업정책이라는 카드를 꺼내기 시작했다.
만일 시간이 흘러 1~2년 뒤에 새로운 업데이트가 진행된다면 각국별 산업정책 채택 수준은 훨씬 증가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관세 부과의 핵심 이유를 놓고 "미국에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는 산업정책 근거를 들이밀지 않았던가.
특히 미국으로 수출하는 상품에 보편적으로 붙는 '상호관세'보다 특정 산업 제품에 붙는 '품목별 관세'는 모든 정부들이 해당 산업에 맞춤형 대책을 내놓도록 촉발했다. 현재까지 시행 중인 품목별 관세는 철강·알루미늄과 자동차·부품이며, 미국은 조만간 반도체와 의약품에도 품목별 관세를 확대할 계획임을 밝힌 바 있다.
<인사이드경제>는 트럼프 행정부의 철강·알루미늄 관세 관련 세계 각국 정부의 산업정책적 대응을 조사해 보았다. 미국이 가장 처음 관세를 부과했던 북미 동맹국 멕시코·캐나다, 그리고 관세전쟁 끝판왕을 보여준 중국을 비롯해 유럽연합·일본·브라질의 철강·알루미늄 관세 관련 대응정책을 정리해보면 아래 표와 같다.

협상·내수·다변화, 3개의 축
주요 나라의 관세 대응 관련 산업정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뚜렷한 3개의 축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협상을 통한 해결 노력 : 트럼프 행정부와 협상을 통해 관세율을 낮추려는 시도. WTO 제소 등 분쟁 제기 역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임.
⒝ 내수 보호·지원 및 자립화 : 대미 수출 감소 만회를 위해 내수 활성화 위한 다양한 정책 제시. 아예 정부가 직접 수요자로 나서 공공 발주를 늘리기도 함.
⒞ 해외시장 및 공급망 다변화 : 관세전쟁이 단기간 끝나지 않을 것에 대비해 장기적으로 미국이 아닌 다른 해외시장 개척 등 수출시장 다변화 위한 각종 지원정책.
철강·알루미늄만이 아니라 자동차·부품 관련해서도 거의 동일한 3개의 정책 축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품목별 관세가 아닌 상호관세에 대한 대응에서도 웬만한 정부의 대응정책 모두 3가지 범주로 포괄된다.
산업정책 넘어 전략의 시대로
3가지 정책 축 중에서 '내수 활성화'의 경우 단기적 처방이라 할 수 있다. 관세장벽으로 막힌 수출길을 내수시장으로 모두 커버할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각국이 이 정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워낙 트럼프 관세가 갑작스럽게 다가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협상을 통해 단시일 안에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희망이 헛된 것임이 확실해지고 있다. 협상을 통해 불확실성은 단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고, 따라서 단기적 해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각국 정부들은 트럼프와의 협상에서 새로운 모멘텀이 생기길 기다리면서, 장기적 전략으로 수출 및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정책으로 중심이동을 시작했다.
이를테면 트럼프 관세로 가장 강력한 견제를 받은 중국의 경우 대미 수출이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전년 대비 9월에만 27%가 감소했고 1~9월 누적 수치로도 16.9% 감소를 기록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중국의 해외 수출 총액은 9월에 달러 기준 전년 대비 8.3% 늘어나 엄청난 증가율을 보여주었다.

대미 수출이 엄청나게 감소했음에도 높은 수출 증가율을 보여준 이유는 중국이 수출시장 다변화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주요 수출시장에서 매우 높은 증가율을 보여주고 있다. (위 표)
기업과 노조의 산업정책은?
단기 처방이나 해결책이 없기에 관세전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심지어 트럼프 행정부가 바뀌고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렇다면 이제 단순히 정책적 측면이 아니라 장기적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 산업정책도 장기 플랜으로 변화하고 있는 만큼, 이제 기업과 노조도 장기적 전망에서 산업정책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 기업들 입장에서는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에 일찍부터 논의가 시작되었고 일부 정책은 집행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정부 차원에서 수행하기 어려운 대미 투자 확대는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기업이 펼치는 산업정책은 철저히 이윤 추구 중심이기에, 국가경제의 균형발전이나 노동자·인민의 생활안정에는 큰 관심이 없다. 정부 산업정책 역시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산다"는 관점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편향된 이들의 정책에 브레이크를 걸어줄 가장 중요한 주체는 노동조합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산업정책은 정부와 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장기전의 룰을 함께 정할 주체로서, 아니 전체 인민의 생활안정과 노동계급의 집단적 이해를 대변할 정책이 마지막 균형추가 되어야 한다. 노동 없는 산업정책은 기껏해야 기업전략이고, 최악의 경우 불평등 안내서일 뿐이다. 그 결말을 바꾸기 위해 노동조합의 산업정책을 장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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