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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판조차 서울 중심적"…지역 투쟁에 연대하려 '갱상도 말벌'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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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판조차 서울 중심적"…지역 투쟁에 연대하려 '갱상도 말벌' 만들다

[X세대가 만난 광장의 MZ]⑧ 황승유 '경상도 말벌' 운영자

승유 씨를 알게 된 것은 우연히 발견한 유튜브 영상 덕분이었다. 지난 겨울 진주시청 앞에서 열린 윤석열 퇴진 집회. 진주에 사는 2030 청년 황승유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진주 시민들 앞에서 '남태령'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 12월 가장 추웠던 동짓날, 농민과 여성 청년, 그리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경찰 차벽을 열어낸 이야기. 그는 남태령 이후 자신이 '변했다'고 말했다. 남태령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연대를 경험하며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기뻤고, 처음으로 우리에게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고 느낀 그 밤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영상에서 그는 '투쟁' 대신 진주 사투리 '애나'로 인사를 건넸다. '차 뺐다', '이겼다'를 외치며 농민들과 행진하던 그날의 기억을 사랑하는 진주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1862년 진주농민항쟁을 다룬 정동주 소설 <백정>을 언급하며 농민운동의 성지인 진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진심에서 우러난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잊히지 않았다. 그는 경남의 보수적인 도시로 알려진 진주에서 유일하게 무지개 깃발을 든 성소수자이기도 했다. 추석 연휴를 앞둔 9월의 끝자락에, 촉석루와 남강 유등 축제로 유명한 진주성 앞에서 그를 만났다. 남태령과 윤석열 퇴진 운동을 겪은 이후 그는 지역에서 '경상도 말벌'(X 활동명 '갱상도 말벌') 운영자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수도권에서처럼 지역에서 활동하는 말벌 시민은 없을까, 하는 내 의문에 답을 준 사람이 바로 승유 씨였다.

"남태령 이후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서울에서는 어디에 투쟁이 있으니까 와 달라고 요청하고 서로 소식 전하는 게 되게 자연스러운 일이 됐잖아요. 왜 지역은 저렇게 안 될까, 지역에서도 연대 활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래서 제가 경상도 말벌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X(구 트위터)를 기반으로 지역 친구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어요. 멤버는 대구, 부산, 창원, 진주 등 경남·북 전역에 흩어져 있어요. 저희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여기저기 전화하고 우리가 찾아가도 되는지 묻는 거였어요. 그렇게 알게 된 소식을 X에 올렸죠."

또 X다. 동짓날 남태령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도 X 덕분이었다. 요즘 청년들의 운동과 연대는 상당수가 X를 통해 이루어진다. X를 사용하는 이유로 승유 씨는 '익명성의 편안함'을 들었다. 휴대폰 연락처와 연동되는 페이스북은 이미 서로를 아는 지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반면, X는 서로가 누군지 모르고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다. 게다가 사용자의 대부분이 실명이 아닌 활동명을 사용한다. 트위터 시절부터 소위 '덕질'을 하는 오타쿠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익명성의 편안함, X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경상도 말벌'

"시작은 1월이었어요. 대구 성서공단의 태경산업이라는 작은 업체에서 일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었는데, 파업 노동자들이 월급 명세서를 받아보니까 명세서가 마이너스로 돼 있더래요. 금속노조에서 일하는 청년 활동가가 X에 그 마이너스 월급 명세서 사진을 올린 걸 보고 연락을 해서 가게 됐죠. 처음 가던 날 우리 중 한 사람이 응원봉을 들고 갔는데, '서울에서만 보던 응원봉 부대가 우리한테도 왔다'면서 노동자들이 되게 기뻐하셨던 것이 생각나요. 거기는 작은 투쟁사업장이고, 너무 외롭게 싸우셨던 거예요."

태경산업 파업 연대는 '경상도 말벌' 활동을 본격화시킨 기폭제였고, 여전히 청년 말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경상도 말벌들은 올해 1월 1일 초단기 노동계약에 시달리던 경비노동자가 사망한 창원 컨벤션센터 유가족 농성장도 찾아갔다. 농성장에서는 '그동안 들러준 시민들은 많았지만 청년이 온 건 처음'이라며 이들을 환대했다. 농성하는 유가족은 고인의 따님이었는데, 승유 씨보다 어린 청년이었다. 무거운 주제라서 찾아가도 되는지 고민하던 그는 그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역의 덜 알려진 투쟁 현장을 보다 많이 알리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시작한 일이었다. '갱상도 말벌'의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자 먼저 연락을 주는 곳들도 생겼다. 그렇게 모인 소식이나 웹자보를 X에 업데이트한다. 승유 씨가 당원으로 소속된 정의당이 연대하는 현장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고, 부산 서면시장이나 울산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들과 꾸준히 연대하는 이들도 있다. 요즘엔 새로운 얼굴보다 오던 사람들이 계속 오는 편이다. 민주노총 대구본부 산하 달곰이지부 같은 노동조합 준지회에 들어가 활동하는 청년들도 있다.

"남태령 이후 지역에서 활동한 것이 하나 더 있으시죠. 무지개 깃발이요. 진주에서 유일한 무지개 깃발이었다고 들었는데, 대단한 용기를 냈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움은 없으셨어요?"

"어려웠죠. 그런데 저는 서울에 살다가 이곳에 내려왔고, 부모님도 여기 안 사시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진주에서 개인 깃발은 끝까지 저 혼자였지만 얻은 게 없지는 않았어요. 저에게 몰래 와서 '나도 성소수자'라고 말하고 가시는 분들이 몇 분 있었어요. 저 때문에 용기 내서 집회에 나온다고요. 성소수자는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성소수자가 아닌 분들은 내 주변에도 성소수자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하고요."

▲ 지난 3월말 2차 남태령 투쟁에 참가한 승유 씨. ⓒ황승유

진주에서 유일하게 들었던 '무지개 깃발'

작년 동짓날의 남태령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승유 씨는 그 얘기만 나오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했다.

"그날 남태령을 간 건 친구들 때문이었어요. 밤에 X를 봤는데 친구들이 다 남태령에 가 있는 거예요. X에서 영화 덕질을 하다 만난 성소수자 친구들이죠. 추우니까 집에 들어가라고 했는데, 자기들이 없어지면 경찰이 와서 진압할까 봐 무섭다면서, 춥다고 덜덜 떨면서도 안 가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첫차를 타고 갈 테니까 그때까지만 버텨봐라, 했죠. 막상 도착하니까 친구들은 춥다고 다 들어가서 얼굴도 못 봤어요. (웃음)"

몇 달 전에 만났던 대학생 채연 씨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남태령의 밤을 보내고 난 둘째 날 아침, 남태령역에는 밤새 현장 상황을 SNS로 지켜보다 첫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끊임없이 내렸고, 돌아가는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이제 우리가 있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꼭 바통 터치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얘기. 그걸 보면서 채연 씨는 '이제 내가 여기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승유 씨처럼 첫차를 타고 달려간 사람들이 뒤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덕분에.

"그때까지는 광장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집회를 주도하시는 분들은 보통 기성세대이고 우리는 가서 머릿수 채우다 오는 게 전부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이 광장을 우리가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남태령이 특별했던 것은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장소'였다는 거예요. 성소수자도 취약 계층 청년도 모두가 자기를 드러내고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 얘기를 들어줬죠. 다른 현장들도 그런 분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 뒤에도 이곳저곳 연대 활동에 참여하고 있어요."

승유 씨에게 남태령이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이후에 이어진 인연들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의 결집된 힘으로 마침내 경찰 차벽이 열리는 승리를 경험한 농민들은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지연되던 3월 말에 또다시 트랙터 행진에 나섰고, 2차 남태령이라 불렸던 이때 승유 씨는 진주의 농민들과 함께 현장을 지켰다. 첫 번째 남태령 때는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이들은 진주에 돌아온 이후에 비로소 서로를 알게 되었다. 남태령을 겪은 진주 농민들이 여성 청년들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며, 3월 초 진주에서 열린 3.8 여성대회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그때 정말 기뻤죠. 농민들은 대체로 연세도 많고 변하기 어려운 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려는 노력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남태령의 정신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 같았어요."

남태령을 겪은 진주 농민들, 여성 청년에 연대하러 여성대회 참가

사람들이 남태령을 잊지 못하는 이유도 이것일지 모른다. 서로가 제각기 다른 존재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조건 없이 손잡아 힘을 합쳤다는 것.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 서로를 고마워하고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

남태령에 연대해준 소수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농민들이 지난 6월에 열린 서울 퀴어문화축제에 처음으로 부스를 내고 참여한 일이 떠올랐다. 한승아 전여농 정책위원장은 서울 퀴어문화축제 개최 기자회견에서 "한국 사회에서 농민은 늘 소수자였지만, 남태령에서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 평등한 세상을 경험했다"며 "우리가 만들어 갈 세상은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평등한 세상이 되어야 하며, 이제 농민들이 그 조건 없는 연대를 보여드리겠다"고 참가 취지를 밝히기도 했다. 이 얘기를 꺼내자 승유 씨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런던 프라이드>라는 영화 보셨어요? 80년대 영국 광부들의 파업에 성소수자가 연대하는 실화 기반 영화거든요. 남태령을 겪으면서 그 영화가 생각나더라고요. 여태까지 농민과 성소수자는 서로 볼 일도 없는 사람들이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동지가 된 거죠. 남태령에 가는 게 이제 우리 일이 되어서 그런 거고, 농민들이 퀴어 퍼레이드에 와주시는 것도 같은 이유겠죠. 겉보기에 농민의 약자성과 성소수자 약자성은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이렇게 연대가 되잖아요. 그래서 연대라는 게 참 신기한 것 같아요."

남태령은 약자들 간의 연대를 통해 승리를 얻어낸 곳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깊다. 늘 지기만 했던 농민과 소수자 시민들에게 승리하는 경험은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그는 차벽이 열리고 다 함께 '이겼다'를 외치며 행진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진주시 농민회원에게 전달해 드렸다. 혹시라도 힘들 때마다 보시라고.

그날 승유 씨는 트랙터 위에서 사진도 찍었다. 사진을 너무 찍고 싶어서 트랙터에 올라타도 되느냐고 어느 농민에게 물었는데 쾌히 허락을 해주더란다. 사진을 찍고 내려오니까 다음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트랙터는 그 농민의 것도 아니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트랙터 주인은 어느새 포토 스팟이 된 자기 트랙터를 보고 흐뭇해 하더라고.

"저는 남태령 이후로 라이더 유니온이랑 연대하게 됐어요. 남태령에서 라이더들이 차벽을 뚫고 들어와서 우리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셨거든요. 경찰 도시락이라고 둘러대기까지 하면서요. 그 이후에 제가 라이더 유니온에 연락해서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는데 후원도 안 받으시더라고요. 그래서 1월에 라이더 유니온이 상경 투쟁을 할 때, 저와 친구들이 X에 알리고 서울 '배달의민족' 본사 앞에 올라가서 함께 했죠."

약자들의 연대로 승리한 남태령, 다른 현장들도 그렇게 됐으면

라이더 유니온과는 9월에 부산에서 열린 기후정의행진에서 다시 만났다. 이날 참가한 부산, 울산, 창원의 라이더 유니온 멤버들은 승유 씨를 알아보고 몹시 반가워했다. 집회에 함께 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걸 기억해주는 것이 고마웠고, 내가 내미는 작은 손길이 그들에게는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그래서 승유 씨도 라이더 유니온 명함을 잔뜩 받아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눠주고 있단다. 물론, 나도 받았다.

부산 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한 것은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도약'이라는, 부산, 진주 등 경남 지역 청년들이 모여서 만든 환경운동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승유 씨는 동료들과 함께 부스도 열어 운영했다. 정의로운 전환은 화력발전소 폐쇄 이후의 에너지 전환 과정을 기후 정의에 맞춰서 하자는 운동이다. 국제협약에 따라 탄소 발생량 감축을 위해 태안, 하동 등의 화력발전소가 순차적으로 폐쇄에 들어가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과 노동, 지역 문제를 다 함께 다루는 운동이다.

"이중에서 가장 큰 이슈인 노동 문제는 전국의 화력발전소에 근무하는 6천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 문제인데, 이를 둘러싸고 환경 단체와 노동 단체 간 대립이 팽팽해요. 지역 문제도 중요한 이슈죠. 발전소는 주로 바다를 낀 소도시에 위치하기 때문에, 발전소 하나가 문을 닫고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두 떠나면 그곳은 유령 도시가 될 가능성이 크거든요. 저는 앞으로도 지역에 머물면서 지역 운동을 계속 해보고 싶어서 정의로운 전환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더라고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바대로, 지역 청년의 가장 큰 문제는 마땅한 취업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역에 머물지 못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떠난다. 학생들이 졸업 후 지역을 떠나니까 청년 운동도 지속되기가 어렵다. 지역은 운동을 하기에 조심스럽고 힘든 면도 있다. 서울은 집회에 가면 완전히 익명이 될 수 있으니까 참여도 발언도 자유롭지만, 지역은 다들 아는 사이라서 눈치가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유 씨는 지금 사는 곳에 계속 머물고 싶다. 유년 시절 이후 서울에서 십여 년 살다 오긴 했지만, 그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자란 경상도 사람이다. 자신이 사랑과 애착을 느끼는 지역에 살며 삶을 가꾸고, 지역에서 청년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운동판조차 서울 중심적인 경향이 있는데 저는 그것에 문제의식이 좀 있어요. 어떤 이슈가 있어서 집회를 열게 되면 '서울로 모이자'는 게 흔한 구호거든요. 지방의 입장이나 목소리는 잘 반영이 안 돼요. 서울에서 지역에 일일이 의견 물어서 정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서울 집중으로 정해지면 지역에서는 버스 대절해서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저는 지역에서 지역 문제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지역에 머물며 청년 운동 하고 싶어

그의 요즘 고민은 청년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하는 것이다. 말벌들이 다른 사람의 싸움에 가서 연대하는 건 잘하는데, 청년 당사자 문제는 미처 대응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청년들은 점점 불안정해지는 고용과, 노동이 플랫폼 노동으로 세분화되면서 노동자의 권리 찾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이 세상에 맞서야 하는 당사자다. 해고 노동자들에 연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스스로의 삶과 노동 조건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동지로 여겼던 이가 눈앞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재판에서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으면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고 노동자는 계속 생기고 고공농성도 어디선가 또 할 텐데, 그것만 쫓아다니다가 청년들이 소모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승유 씨는 말했다. 우리 스스로의 싸움은 어떻게 해야 할까. X에서 가끔 이야기를 꺼내 보지만 지역 청년들이 갖는 특수성을 서울 청년들이 공감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청년 조직화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막상 하려니 쉽지는 않지만요. '야 우리 노동 운동하자!' 이러면 부담스러워 하는데, 그냥 '같이 연대 다녀볼래? 이거 해볼래?' 하면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경상도 말벌'이나 '정의로운 전환' 활동도 그 연장선상에 있죠."

승유 씨는 세월호에 탔던 단원고 학생들이랑 동갑이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박근혜 탄핵을 겪었고, 20대의 마지막을 윤석열 탄핵으로 끝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그에 따른 페미니즘 리부트 흐름을 보면서 사회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페미니즘 운동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여대 중심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는데, 대학에 가지 않은 그는 소외감이 들 때도 있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대학 얘기를 하거나 여성학 교수님 누구 이런 식으로 얘기할 때면 더 그랬다. 그러다가 지난 광장에서 남태령을 겪어보고, 꼭 대학을 가서 학생 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청년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남들이 대학에 다니는 시간에 그는 일을 했다. 편의점, 카페 알바, 택배, 플랫폼 노동 등등. 그가 청년 노동 현실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은 이런 경험들 덕분이다. 지금은 잠시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데, 다시 일을 한다면 성급하게 취업을 하기보다 활동가가 되어 노동 운동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 앞 세대는 공장에 취업하면 노조에 들어가는 게 당연한 거였다고 하시던데 저희는 정말 모르는 얘기거든요. 노동조합이란 게 내 얘기가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공무원이 된 친구들이 노조에 가입하는 모습을 간혹 보기는 했지만, 그 외에 알바 노동이나 플랫폼 노동을 하는 청년이라면 노동조합은 상상도 못 해봤을 거예요. 어떻게 하면 노조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까, 청년을 어떻게 노조로 데려오고, 반대로 노조를 청년을 위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보고 싶어요."

▲지난 여름 민주노동당 권영국 대선 후보의 선거운동에 참가한 승유 씨(오른쪽). ⓒ황승유

그냥 '응원봉 부대 예쁘다'로 끝나지 않기를

윤석열 퇴진의 주역이 2030 여성과 소수자라는 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승유 씨는 많은 게 바뀔 거라고 잠시 기대한 적도 있다. 하지만 정치권의 보수적인 관행은 굳건했고, 현실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얼마 전에 청년들과의 토크 콘서트에서 '여자가 여자를 미워하는 건 이해가 되지만 여자가 남자를 미워하는 건 이해가 안 된다'는 대통령의 말은 실망스러웠다. 페미니즘이나 현재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사자성이 중요한 것인지도. 페미니즘에 무지를 드러낸 대통령이 산업재해 문제 해결에는 적극 나서며 환영받았던 것처럼. 광장의 목소리가 전달되기엔 정치권의 보수적인 벽은 여전히 너무 두터운 것일까. 광장에서 활동한 청년으로서, 그가 기성세대에 바라는 것은 '소통'이다.

"MZ세대도 선배 세대가 우리의 얘기를 들어주기를 바라고, 소통과 대화를 원하거든요. 가령 너희는 평등 수칙에 어떤 게 들어갔으면 좋겠어? 만약 누군가 그걸 어기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이런 것들을 먼저 다가와 의논하고 대화해주면 좋겠는데 안 하시더라고요. 멋있다고 박수만 쳐주실 뿐."

"왜 우리가 정치에 관심 없다고 생각하실까요? 쟤네는 어디 있다가 나왔느냐고, 이번 광장에서 관심을 많이 받았는데 사실 박근혜 퇴진 운동 때도 저희는 있었거든요.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때는 이슈가 안 됐는데. 그냥 응원봉 부대 예쁘다, 이걸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같이 운동하고 어떻게 좋은 전통을 물려주고 젊은 세대가 운동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지 선배들이 같이 생각을 해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만난 MZ들이 그랬듯이, 허투루 들을 말이 하나도 없었다. 지역 얘기를 하다가 원도심을 결국 몰락시키는 신도시 개발 문제에 의견이 일치해, 진주의 신도시와 내가 사는 아산의 신도시 문제를 비교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 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전북과 충남의 시민단체에서 기차 한 량을 대절했다고 했더니, 태안 화력발전소 폐쇄가 눈앞인데 서울에서 오히려 내려가는 것이 맞지 않겠냐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연대란 뭘까요?"

그는 세상의 모순과 사회 문제를 대체로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앞날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어린아이처럼 장벽 없는 따스함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진주에 왔으니 본전을 뽑고 가라며 남강 유등 축제를 관람하는 현지인 꿀팁을 전수해주더니, 110년 전통을 자랑하는 진주비빔밥 식당과 구 진주역사에 조성된 철도문화공원에도 직접 데려다주었다. 토목 공사 때문에 서식처를 잃게 되어 환경단체에서 철도문화공원 연못에 옮겨 놓은 맹꽁이들의 사연을 들려줄 때는, 자신을 둘러싼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으로 두 눈이 빛났다.

남태령 이야기를 하던 중 문득 울컥했는지, '연대란 뭘까요?' 하고 도리어 내게 질문을 던지는 그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고 돌아와 인터뷰를 정리하고 글을 쓰는 동안 마음속에서 굴리던 답을 나도 던져본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그 추운 밤 오로지 서로를 지키기 위해 하나로 뭉쳤던 '연대'를 경험하고 난 후, 그것이 다른 곳에도 널리 퍼졌으면 해서 연대가 필요한 곳들을 찾아다닌다는 그의 가슴 속 동력도 그것일 것이다.

노인들이 보수적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자신이 사는 경상도에서도 집회에 나온 어르신들이 많았던 것처럼, 청년들이 힘든 일을 싫어한다거나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오해가 생긴 것도 자기가 속하지 않은 집단은 다 한 덩어리로 보는 편견 때문인 것 같다고 한 그의 말이 기억에 남았다. 몰이해와 무지에서 비롯되는 혐오를 넘어설 방법이 그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내 주변의 약자와 자신이 속한 세대를 위해 싸우고자 하지만, 그는 누군가를 대상화하거나 적으로 돌리지 않았다. 그의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말, '연대'라는 단어를 나도 깊이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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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에서 여덟 살 된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X세대 아줌마입니다. 대학 졸업 후 기자로 일하다 한동안 소설을 썼습니다. 극심한 생존경쟁이 기본값인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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