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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무역의 끝자락에서 산업정책 부활하는데…한국은 '기업'정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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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무역의 끝자락에서 산업정책 부활하는데…한국은 '기업'정책만?

[오민규의 인사이드경제] 산업정책 下 자동차 중견 3사의 상황이 던지는 질문

전세계에서 자동차 설계 역량부터 갖추고 대량생산까지 가능한 나라는 몇 개나 있을까? 놀라지 마시라. 불과 10여 개에 불과하다. 멕시코·캐나다·브라질·스페인에서도 많은 차량이 생산되지만 그 나라 완성차업체는 모두 해외자본에 해당한다. 즉, 이들 업체가 철수하면 자동차 설계와 출시, 생산을 기획할 역량이 사라진다.

그중에서도 미국·유럽 등 선진시장에 출시 가능한 차량을 설계·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서유럽 국가 몇 개(독일·프랑스·이탈리아)와 한국·일본·중국·미국 정도 뿐이다. 베트남과 인도 업체들이 맹추격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선진시장에 내놓기까진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세계의 공장 수백개, 설계국은 열손가락

한국처럼 천연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자동차를 만들 줄 안다는 건 축복받은 능력이다. 그래서 이런 나라 정부는 모두 자동차산업을 국가기간산업으로 대우한다. 그런데 한국의 자동차 산업정책은 어땠을까?

사실상 한국 내수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현대기아 육성 전략이나 다름없었다. 산업정책을 만드는 건지 현대차 발전전략을 써주는 건지 모를 수준이었다. 역대 정부는 현대기아를 제외한 완성차업체를 죄다 해외자본에 헐값에 매각해 버렸고, 틈만 나면 먹튀 논란에 휩싸이며 외투 3사는 보유한 기술력과 엔지니어 등 역량을 잃어왔다. 자동차를 만들 줄 아는 축복받은 능력이 사라지는 걸 방치하면서 말이다.

기술·숙련 인력과 역량이 사라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조지아 공장 사태가 잘 보여준다. 1980년 20%에 달했던 미국 제조업 비중은 이미 10% 밑으로 떨어진 상태이다. 배터리공장을 짓는데 필요한 대규모 기술·숙련 인력을 미국 현지에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미국 자동차산업 역량은 망가져 있다. 산업정책이 작동하려면 살리기 위한 산업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 전제부터 무너진 상태인 것이다.

역량 부족을 중국 공급망으로 대체?

프랑스 르노 자본에 매각된 삼성자동차, 한동안 '르노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2022년에 '르노코리아'로 다시 바뀌게 된다. 르노에 매각된 이후에도 한동안 SM과 QM 시리즈를 내놓으며 삼성자동차 DNA를 이어가는 듯 했지만 르노코리아로 사명이 변경된 후에는 아예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사명만 바뀐 게 아니라 중국의 지리(Geely) 자동차가 2대 주주로 들어오는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르노 브랜드를 달고 있지만 사실상 지리의 플랫폼을 활용해 출시된 그랑콜레오스, 이 차량에 장착되는 부품 상당수를 지리에서 수입해오고 있다. (아래 2024년 르노코리아 감사보고서 참조)

▲르노코리아 감사보고서. 빨간 네모 표기 중 위 쪽은 지리, 아래 쪽은 르노에서 지난해 수입한 부품 액수.

지난해 지리에서 4634억 원, 르노에서 6250억 원 등 양사에서 수입하는 부품 액수만 1조 원이 넘어 르노코리아 전체 매출원가의 40%를 넘어섰다. 이 정도면 르노코리아는 자동차 껍데기만 조립하는 수준이고 실제 부가가치는 프랑스와 중국에서 생겨나는 거라 볼 수 있다.

최근 중국 체리(Chery) 자동차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한 KG모빌리티 역시, 체리의 PHEV(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전기차) 플랫폼을 활용해 SE10 등 신차 개발에 나설 것으로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핵심 부품 공급망을 중국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과연 이런 방식의 해외자본 유치가 한국 제조업에 도움이 되는 것일지, 산업정책 차원에서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 퍼스트 브랜드의 파산

특히 트럼프 관세정책을 비롯해 무역전쟁 시대가 시작된 이래로, 글로벌 자동차산업의 중요한 이슈는 '공급망 관리'와 '불확실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최근에 벌어진 2가지 중요한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필터, 브레이크, 스파크플러그, 와이퍼 등 A/S 시장에 부품을 공급하는 미국의 대형 부품업체 퍼스트 브랜드(First Brands)가 지난 9월 말 법원에 파산보호(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중요한 원인은 공급망 금융(supply chain finance)인데, 간단히 설명하면 완성사-부품사-금융사로 연결된 공급망에서 매출채권을 담보로 돈을 조달해온 것이다. 그런데 같은 매출채권으로 다양한 금융기관과 사금융에서 이중삼중 차입이 벌어지면서 부채가 눈덩어리처럼 커진 것.

2019년 이후 공격적 M&A로 연 매출 50억 달러의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퍼스트 브랜드는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트럼프 행정부의 자동차 품목 관세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자 완성차·부품사 할 것 없이 관세 부과 직전 광적으로 재고물량 확보에 나선다. 확보한 재고를 쌓아놓을 창고 확보도 전쟁이었다. 올해 4~8월까지 퍼스트 브랜드의 재고 비용은 무려 6000만 달러에 달했으며, 인수합병에 자금을 많이 투입했던 터라 현금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면서 결국 파산보호신청에까지 이른 것이다.

넥스페리아 반도체 공급 위기

두 번째 사례는 자동차용 기초형 반도체(다이오드, 트랜지스터 등)를 공급하는 글로벌 톱 티어 업체 넥스페리아(Nexperia)에서 촉발된 반도체 공급망 위기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이 업체는 2019년 중국 윙텍(Wingtech)에 인수되었는데, 주 생산거점은 독일 함부르크 공장이었지만 중국에서 패키징을 한 후 전세계로 공급되는 구조였다. 지난해 12월 윙텍은 바이든 행정부에 의해 수출규제 리스트(Entity List)에 오르게 되었고, 트럼프 집권 후 미-중 무역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긴장이 쌓이기 시작했다.

지난 9월 30일, 네덜란드 정부가 돌연 '긴급 권한'을 발동해 넥스페리아 경영 개입 및 통제에 나섰다. 명분은 모회사인 중국으로 기술 이전 및 생산 이전 우려였다. 유럽 역내 생산 유지를 위해 네덜란드 정부가 직접 경영권을 행사하겠다는 것. 그 직후 중국 상무부가 넥스페리아 하도급망을 겨냥해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했는데, 최종 조립과 패키징이 이뤄지는 중국발 봉쇄가 걸리면서 글로벌 공급망과 납품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넥스페리아가 생산하는 반도체와 칩 자체는 '첨단 제품'이 아니지만 범용 전력 칩은 스펙 적합성, 신뢰성 인증, 장기공급계약 때문에 대체 생산이나 단기 전환이 어렵다. 완성차에 직납하는 칩은 많지 않지만, 보쉬(Bosch)를 비롯한 수많은 부품업체가 사용하는 칩·반도체라서 이들 부품사는 벌써부터 완성차업체 측에 “현재 재고물량까지는 대응 가능하지만 그 이후에는 공급이 중단될 수 있다”고 통보하는 실정이다.

불확실성의 제도화

이처럼 우리는 이제 자동차산업을 논하면서 미래차로의 전환, 공급망 관리, 무역전쟁과 불확실성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제는 이런 현상들이 절대 불변인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상당 기간은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말도 안되는 관세정책을 밀어붙일 때, 이 정책이 지속가능할까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트럼프 관세 부과 반년이 지난 지금 세간의 인식은 달라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끝나고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서도 관세정책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조만간 미국 대법원에서 상호관세가 무효라는 판결이 나온다 하더라도 트럼프 행정부는 공화당이 다수인 의회를 통해 다른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 예상된다.

최근 한국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와 기나긴 협상 끝에 대미 상호관세와 자동차관세를 25%에서 15%로 내리는 합의가 이뤄졌다. 한국 생산량의 90% 가까이를 미국으로 수출하는 한국지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까? 천만의 말씀! 경주 APEC 회의에서 합의가 이뤄진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GM은 내년 2월에 한국 직영정비사업소를 모두 폐쇄하겠다며 노동조합과 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한국 제조업 지속가능한 산업정책

한국지엠은 정비소 노동자의 경우 전환배치를 통해 고용을 유지할 계획이라고 하나, 이 사안은 생산-판매-정비(A/S)로 이어지는 공급망에 혼란을 발생시키는 일이다. 수십년 정비 업무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기술역량을 노동시장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다. 조지아 사태에서 중요성이 확인된 기술·숙련 인력과 역량을 잃게 된다.

▲ 한국지엠 노사가 체결한 고용안정특별위원회 운영 합의서.

게다가 올해 10월 23일 한국지엠 노사가 체결한 단체협약 합의서에 따르면 직영정비소 미래 전망 관련 노사가 "미리 정해진 결과가 없음을 전제로 고용안정특위를 이어나간다"는 합의를 하였고, 이 합의에 따라 별도 노사협의를 통해 '직영정비사업소 활성화를 위한 태스크포스 팀 구성'에 합의한 상태였는데, 불과 2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통보를 했다는 점에서 노사 합의와 신뢰에도 금이 가는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지엠의 경고등, 산업정책의 시험대

한국지엠의 지속가능성 확보는 한국 자동차 산업정책의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GM 자본의 글로벌 철수 사례를 보면 가장 먼저 내수판매를 망가뜨린다. 태국과 인도 사례가 그러했고, 유럽 자회사 오펠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이 공장 생산가동률 저하, 정부 상대로 특혜와 조건 없는 지원 요구가 이어지다 여의치 않으면 철수를 단행한다.

지금 곤두박질치는 한국지엠의 내수 상황은 경고등에 불이 켜진 것이다. 한국 정부 역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내수판매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는데, 한국지엠은 부평공장에서 생산 중인 뷰익 차량 내수 출시 요구마저 무시하는 등 정부가 주는 혜택조차 안 받겠다는 태도이다.

그렇다면 정부 차원에서 사용 가능한 산업정책이 없을까? 게다가 한국 정부는 산업은행을 통해 한국지엠 17% 지분을 가진 2대 주주 아니던가. 앞에서 얘기한 3개 축의 산업정책에 대입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 ⓐ관세 협상, 이건 현재진행형이니 넘어가고 ⓑ내수 활성화와 ⓒ수출시장 다변화를 위한 정책은 없을까?

중견 3사와 정부, 그리고 노동조합의 콜라보

독특하게도 한국 정부는 산업은행을 경유해 한국지엠 지분 17%를 가진 2대 주주라는 지위를 갖고 있다. 이를 활용한다면 써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다. GM과 차량 판매를 위한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하여, GM이 진출하지 않은 해외시장에 별도 브랜딩을 통해 한국지엠 생산차량을 수출할 권한을 주는 방식이 있다. 여기에 부평에서 생산되는 뷰익 차량 역시 별도 브랜딩 통해 내수시장 출시도 시도해볼 수 있다.

물론 수출시장을 뚫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지엠과는 반대 입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KG모빌리티의 역량과 콜라보를 시도해보는 방법이 있다. 기나긴 외투자본 치하를 벗어나 KG그룹에 인수된 쌍용차는 생존전략을 위해 광적으로 수출시장을 늘리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주로 유럽시장을 추가로 개척하며 17개 시장을 보태 총 90개 수출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각 시장에서의 판매량이 많지 않다는 점이 문제인데, 만일 한국지엠 수출 다변화를 위해 협력을 한다면 규모의 경제 실현이 가능해지며 윈-윈의 시너지 효과도 기대해볼 수 있다. 쌍용차가 외투자본 치하에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지만, 한국 자본이라는 점에서 정부 산업정책이 발동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다.

현대기아 그룹, 즉 자본가들이 추구하는 산업정책은 결국 미국·유럽 현지생산을 늘리는 길이다. 이걸 가만히 놓아둔다면 현대기아 공급망에 걸쳐있는 30~40만 노동자와 가족의 생존권이 위험에 빠진다. 이건 그냥 일자리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로도 해결하지 못한 자동차산업의 버팀목인 기술 숙련인력이 사라지는 재앙이 벌어질 수도 있다. 결국 정부 입장에서도 '정의로운 전환'을 기치로 내건 노동조합과 머리를 맞대야만 효과적인 산업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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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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