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럽의 뉴스 헤드라인은 온통 미국 소식으로 가득하다. 주요 유럽 현지 언론들은 트럼프 정국을 우려 섞인 목소리로 연신 비판하고 있고, 이곳 네티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어쩌다 미국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서방 연맹은 이제 없다'는 등 한 목소리로 실망감을 드러내곤 한다. 서서히 미국산 물건에 대한 보이콧도 시작되고 있다. 다행히 유럽은 식품군에 있어선 상당히 자립이 되어 있는 편이다. 각종 공산품과 자동차, 전자제품도 이젠 어딜 가나 중국산, 방글라데시산, 한국산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서비스는? 에너지는? 그리고 게임은? 여기에서 유럽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유럽의 디지털 집약도
유럽은 미국산 다국적 플랫폼 기업의 디지털 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는 시장이다. 최근 2025년 연말 유럽연합이 여러 통계를 인용하며 내놓은 "유럽 소프트웨어와 사이버 보안 의존성(European Software and Cyber Dependencies)"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아마존(Amazon),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구글(Google) 클라우드 서비스의 유럽시장 점유율은 무려 70%에 달했다. B2B 비즈니스용 소트웨어 점유 상태는 더욱 심각해서, 유럽 기업체들의 약 80%가량이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Oracle), 세일즈포스(Salesforce), IBM 등의 서비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바일 시장은 진작부터 구글 플레이(Google Play), 애플의 앱스토어(App Store)가 장악하고 있으며, 유럽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검색엔진도 단연 구글(점유율 89%)이다. 유럽의 청년들이 얼마나 미국에 화가 난들, 이들이 사용하는 SNS도 결국엔 X,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가 주를 이룬다. 한 때 미국 SNS 기업 CEO들의 친트럼프적 행보에 화가 난 일부 유럽 SNS유저들이 대안 플랫폼으로 넘어가는 캠페인을 했다지만 그 효과는 아직 미미해 보인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꼽고 싶은 것은 유럽의 고질적인 계층 간 디지털 간극이다. 얼마 전 유럽연합이 발표한 "Digitalisation in Europe – 2025 Edition (2025년 유럽연합 디지털화 현황보고)"에 따르면 클라우드 서비스, 전자상거래, 초고속 인터넷 등을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디지털 집약도(digital intensity)"에서 유럽연합 기업의 74%가 기본적 수준의 디지털 서비스 수준에 머무른 것으로 파악되었다.
통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간극이 더울 여실히 드러난다. 대기업의 클라우드, 인공지능, 빅데이터 기술 도입율은 87%가 넘는데 반해 중소기업들은 67%가 이메일과 웹사이트를 겨우 쓰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디지털 기술력이 자본을 가진 일부 대기업과 그곳의 정보통신기술 전문가들에게 집중되어 있고 그 외 일반 시민들, 평범한 사람들의 디지털 기술력은 상대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럽의 고질적인 계층 간 디지털 간극은 자국 기술과 인프라에 투자하기 보단 완제품 솔루션을 구입해 사용해보는 의존성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유럽 풀뿌리 솔루션들이 등장할 여지도 좁아져버렸다. 그러다보니 AI 시대에 유럽은 디지털 기술 자립의 기로에 서서 고민만 깊어지고 있다.
유럽게임산업의 속사정
게임 산업은 상황이 더 복잡하다. 우선 유럽 게이머들의 게임 이용 경로가 미국산 플랫폼에 의존 중이다. 유럽 현지 게임 개발업체들의 수익 창출에 밸브(Valve), 구글(Google), 애플(Apple),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의 영향력은 말 그대로 절대적이다. 이렇다 보니 신규 유저 유입(User acquisition) 부터 게임 라이브 서비스까지 유럽 게임의 거의 모든 공정이 몇몇 미국 기업들의 견고한 플랫폼 제국에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유럽 게임 개발 업체들의 탈-미국을 향한 갈망은 단순히 정치적 이슈를 넘어 비용의 문제로도 직결된다. 사실 트럼프가 집권하기 몇 년 전부터, 유럽 게임업계 내에선 미국발 다국적 플랫폼 기업들의 시장 독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왔다. 특히 모바일 게임 시장은 포화상태에 빠진지 오래라 게임 회사들이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어마어마한 수준의 돈을 UA(user acquisition, 신규 이용자 확보)와 마케팅에 들이 붓고 있는 상황이었고 말이다. 즉 유럽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추천' 앱 페이지 상단에 뜨기 위해, 조금이라도 SNS에서 더 보여지기 위한 무한 경쟁 속에서 미국 기업들에 '남 좋은 일'만 해주는 상황이다. 각종 플랫폼 수수료와 이용자 확보, 마케팅 비용에 게임이 벌어들이는 수익의 대부분이 고스란히 플랫폼 기업으로 넘어가는 기형적인 구조를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거기에 반도체 생산 비용은 나날이 오르고 있고 장기화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정세 혼란 때문에 유럽의 에너지 단가도 상향평준화 되어 버린 상태다. 이러니 유럽 게이머들은 천정부지로 가격이 치솟은 게임기를 구입하길 꺼려하고, 몇 년 전부터 쓰던 PC를 업그레이드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도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다. (이 기조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그러니 고사양 컴퓨터를 요구하는 신작 패키지 게임들, 마찬가지로 게임용 스마트폰이나 PC를 요구하는 화려한 모바일 게임들이 설 자리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거기에 싸늘해지고 있는 미국을 향한 유럽의 여론도 '가급적 미국산 기술을 쓰지 않았으면'하는 소비자들의 기대심리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 유럽 게임소비자들은 같은 비싼 돈 들여 게임을 할 거면 '기왕이면' 미국의 그것과는 다른, 유럽만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제품을 기대한다. 이들은 이제 미국 기업들로부터의 기술적 자주독립뿐만 아니라 개인정보 보호, 소비자 권리 보호, 다문화 포용, 그리고 환경보호 등 '유럽적' 가치를 (적어도 MAGA적 기업들 보다는) 조금은 더 준수하는 상품들을 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다음 글에 좀 더 다루기로 하겠다.)
언더독으로 가자
이 상황에서 핀란드를 비롯해 유럽 일부 지역에선 '저비용 저사양' 게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스케일이 큰 대작 게임을 만들기 위해 (플랫폼에 남 좋은 일만 잔뜩 하면서) 비즈니스 리스크를 떠 안다가 파리만 날리는 상황에 처하기 보단, 현 상황에서도 소비자가 부담 없이 구입하고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가자는 거다. 비즈니스적으로는 저사양의 컴퓨터에서도 잘 돌아가는 다운-스케일(down-scale) 게임으로의 사업 전환, 정책적으로는 중소 게임기업들의 작지만 의미 있는 도전을 지원하는 체계들이 포함된다. 주류에서 살아남기 위해 높아지는 에너지 비용과 개발 비용에서 허덕이기보다는 아예 비주류가 되어 개발 자유도, 비용 절감, 나아가 재미까지 동시에 잡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단어가 "언더 독(under dog, 비주류)" 게임이다. 이곳 핀란드에서도 얼마 전부터 게임 개발사들이 대놓고 '언더 독 정신'을 이야기하면서 비교적 저렴한 구동 컴퓨터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플레이가 가능한 적정한 수준의 게임 개발에 관심이 몰리고 있다. (관련해서 "블록버스터 게임 경쟁 시대에도 '적정 기술'이 필요하다"를 참고하면 좋다.) 나아가 코드 최적화(code optimisation)의 살아있는 전설, "데모영상(demoscene)" 시절을 회고하며 '우리 선배들, 핀란드 게임 개발자 1세대들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쏘냐'라며 투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핀란드 데모영상의 역사에 대해선 "'서양'이라는 프레임을 넘어: 유럽 & 핀란드 게임 이야기"를 참고하면 좋다.)
개중에는 더 나아가 '누구나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시대'를 지향해 유럽의 '게임 집약도'를 끌어 올려야 한다고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게임 개발의 민주화(democratisation)을 이룩해 '누구나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게임 개발의 탈-플랫폼을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다. 특정 계층에게만 디지털 기술력이 쏠리다 보니 결국 전체 사회의 디지털 집약도가 뒤쳐져 버린, 디지털화의 골든 타임을 놓쳐버린 유럽의 뼈 아픈 반성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러한 노력 중 하나가 "게임 포엠(Game poem)" 운동이다. '시'를 뜻하는 '포엠(poem)'이 들어간 이 개념은 산업주의, 소비주의, 자원 소모와 연관되어온 기존의 '게임(산업)' 개념에서 벗어나, 게임을 마치 시(poem)처럼 성찰과 문화적 비평차원에서 사유하는 환경을 추구하자는 의미를 지닌 운동이다. 게임 포엠들은 간단한 설치 또는 인터넷 주소 입력을 통해 플레이가 가능하며, 플레이 시간도 5-10분 정도로 매우 짤막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누구나 게임을 즐기고 또 나아가 누구나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기에, 주제와 내용도 개발자의 개인 주관이나 경험을 토대로 한다. 게임 포엠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작품은 검은색 블록과 간단한 방향키 만으로 고독을 절묘하게 묘사한 Jordan Magnuson의 작품, "외로움(Lonliness)" (2011년작)이다. (링크: https://www.jordanmagnuson.com/games) 개발자가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근무하던 시절 목격한 왕따 현상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이후 '미니멀 게임' 나아가 '게임 포엠' 운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0여 년 간 '게임 포엠'은 실험적 영역에서 이리저리 시도 되다가, 최근 (앞서 언급한) 유럽의 이런저런 사정과 높아지는 언더독, 기술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계기로 점차 관심을 얻기 시작해 최근엔 아예 "게임 포엠 매거진" 창간으로 이어졌다. (링크: https://www.gamepoems.com/)
이게 돈 되는 게임인가 - 라는 생각에서 잠시 쉬어가는 타임
혹자는 '그런 게임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를, 나아가 '그런 게 그 대단한 미국의 게임 자본을 이길 수 있겠어?'를 질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유럽은 가장 오래된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라는 점이다. 유럽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과 계층사회의 붕괴를 막기 위해 일반 소시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복지'라는 장치로 적당히 보장하기도 하는 곳이다. 즉 '소비자들이 계속 소비할 수 있도록'하는 완충 장치들을 마련해놓았다. 덕분에 유럽의 사람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식 현대 자본주의 시민들에 비해 때로는 비영리적이고 비소비적인 활동을 조금은 더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래서 유럽의 게임 개발자들은 이 위기 상황 속에서 한 박자 쉬어가는 타이밍을 가져가기로 한 모양새다. 이 복잡한 정세 속에서 미국산 다국적 플랫폼 기업에 돈을 바쳐가며 제 살을 갉아먹기 보단(물론 그렇게 하는 게임사들도 당연 있겠지만), 잠시 숨을 돌리고 탈-플랫폼, 나아가 게임개발의 민주화를 향한 소소한 도전을 도모해보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이것이 거대한 글로벌 게임과 AI 자본의 흐름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하는 문제이다. 과연 이들의 벼랑 끝 막판 도전은 성공할 것인가? 앞으로 유럽 게임산업의 행보를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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