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자라났다. 부모님이 나를 이포로부터 중국의 고향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내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36년, 내가 여섯 살 때 결행하려 한 일이다. 그런데 일본의 침략이 임박한 때였고, 조부모님이 아버지에게 가족 부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말라야에서 그냥 살라고 했다. 부모님은 7년 만의 귀향이었고, 나를 데려가 가족들에게 보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짧은 여행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고향 방문 계획을 그대로 추진했다.
우리는 기차로 이포를 떠나 싱가포르에서 남중국해를 건너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다. 부모님은 많은 가족에게 아들을 보여주는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어머니는 내 준비를 열심히 해주고 내가 친척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중국 아이의 모습을 대체로 잘 지키는 데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할아버지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고 할머니는 자애로웠다. 사촌들과 노는 것이 즐거웠고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같은 바다를 건너 이포로 돌아왔다.
몇 주일 사이에 남중국해를 두 차례 건너면서 그보다 10년 전 아버지가 그 바다를 처음 건너던 이야기를 어머니가 해주었다. 1926년에 아버지는 싱가포르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영령 말라야로 왔다. 3년 후 고향에 가서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리고 수라바야의 중국인 중학교 교장을 맡아 어머니와 함께 남중국해를 다시 건넜다. 아버지에게는 세 번째였고 어머니에게는 처음이었다.
2년 후인 1931년에 두 분은 아기인 나를 데리고 그 바다의 한 모퉁이를 건너 페락의 이포로 갔다. 아버지가 그곳의 중국인학교 부장학사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두 차례 항해가 어두운 바다 위를 지나가는 것일 뿐 아니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캄캄한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분이 우리가 있는 곳에 관한 말씀보다 있어야 할 곳에 관한 말씀을 훨씬 더 많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앞선 책 <집 아닌 곳에서>에서 나는 영국식 식민지 학교에 다닌 일을 이야기하고 이포에 서로 다른 두 개 도시가 병존하던 사실, 그리고 중국과 유럽에서 퍼져나간 전쟁이 사람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설명했다. 1941년에 일본은 전쟁을 남중국해에 몰고 왔고 그 바다는 3년 반 동안 일본의 호수가 되었다.
남양 중국인들은 1945년 일본의 패배에 안도감을 느꼈으나 서양 제국들의 귀환에 대해서는 불안한 마음이었다. 일본 통치가 남중국해 모든 해안 지역을 하나의 권력이 통제한 최초의 사례였다는 사실을 오랜 후에 음미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 다시 펼쳐지기 바라는 사람은 이 지역에 없을 것이다.
전쟁 때문에 내 영국식 학교교육은 중단되었다. 일본 점령기 동안 아버지는 내게 고전한문만 가르쳤다. 나는 손 닿는 대로 책을 읽었는데, 해외 영국인 주부들이 좋아할 만한 영문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그밖에 일상생활에 관한 내 교육은 이포의 구시가와 신시가를 돌아다니며 새로 얻은 다양한 출신의 친구들에게 광둥어와 하카어로 배우는 것이 위주였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인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원래 직장으로 돌아갔다. 일본인 밑에서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점령기간에 대한 보상이 있어서 중국 귀환을 위한 자금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대학 입학자격이 안 되고, 중국에서 원만한 진학의 길을 찾기가 어려울 전망이었다. 그래서 내가 케임브리지 졸업시험을 칠 때까지 이포에서 1년 더 지내기로 했다. 1947년 시험 합격 후 세 식구가 중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해서 남중국해와 다시 만났다.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엄격한 영국 지배와 가혹한 일본 통치를 겪은 뒤였다. 남중국해를 다시 건너며 이번에는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졸업시험 합격증 덕분에 난징의 국립중앙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그 시험에도 합격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가족의 귀향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심각한 건강 문제 때문에 난징의 추위를 피해 말라야로 돌아갈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펼쳐졌을 것이다.
2학년의 첫 학기가 끝날 무렵 공산군이 난징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대학 문을 닫고 학생들을 집에 돌려보내기로 정부가 결정했다. 수도 방어 전투를 벌일 것이 예상되었다. 걱정이 된 부모님은 내게 얼른 이포로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1948년에 나는 남중국해를 다시 건넜다. 슬프게도 이 항해가 중국이라는 집과의 작별이었다. 그 후 부모님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자는 말씀을 다시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남중국해의 이미지는 내 마음속에 생생히 남았다. 열 살 때 알아낸 사실이 다시 기억났다. 아버지가 세계지도를 사주었을 때 나는 세계를 뒤덮는 붉은색으로 표시된 제국 안에서 내 위치를 확인했다. 지도에는 모든 바다가 표시되어 있었다. 영어책과 잡지에서 읽은 모든 것이 그 지도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전쟁 후에 본 수백 편 영화도 그 뒤를 이었다. 고향과 연관된 남중국해는 더 큰 세계질서 속의 핵심적 요소가 되어있었다.
이포로 돌아온 나는 말라야연방, 남중국해로 튀어나온 반도국가에 관해 배우기 시작했다. 페락에서 산 기간 덕분에 나는 연방 시민증을 땄고, 케임브리지 졸업증서도 가진 나는 1949년 싱가포르에 세워진 말라야대학에 입학해 문학사 자격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떠나가고 있던 식민지체제 속에서 새 출발점을 찾은 나는 말라야를 새 집으로 삼는 길에 나섰다.
남중국해는 내 공부에 계속해서 자극을 주었다. 입학 다음 해에 그 바다를 건너 마닐라의 작가 워크숍에 참석했다. 그 후에는 콜롬보와 뉴델리의 행사에 참석하러 벵골만을 비행기로 두 차례 건넜다. 그 여행을 통해 인도양이 믈라카해협을 통해 남중국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절실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1년 후 학문의 길로 나설 결정을 하면서 영문학 대신 역사학을 택한 것은 역사학 담당 CN 파킨슨 교수의 격려 덕분이었다. 그는 말라야에서 구할 수 없는 원사료를 볼 수 있도록 홍콩 여비를 주선해주었다. 남중국해를 또 한 차례 왕복하는 길이었다.
홍콩에 간 것은 남양을 중국 근대화의 발판으로 삼으려던 개혁가와 혁명가들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쑨원을 따르던 사람들이 찾아간 항구마다 중국인 교민사회에 마주치던 과정을 공부했다. 그들은 중국 남부 지역에서 일으킬 반란을 위한 인력과 자금을 교민사회에서 찾았다. 다른 곳 대학에서 온 학생인 나는 홍콩에서 화교, 즉 해외중국인으로 간주되었다. 부모님은 수십 년 동안 인정하지 않던 신분인데, 이제는 인정해야겠다고 말씀했다.
개혁 시기와 혁명 시기 사람들에 관해 아는 것을 기꺼이 이야기해 주는 학자, 언론인과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분들이 보여준 문서 중에는 내 졸업논문 "1900-1911년간 해협식민지의 중국 개혁가와 혁명가들"(1953) 작성에 도움이 된 것들이 있었다.
[해협식민지(Strait Settlements)는 페낭, 믈라카, 싱가포르 등 일찍부터 영국 식민지가 된 믈라카해협의 항구도시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시아 진출 초기에 영국은 항로 장악에 집중하며 주요 항구도시만을 식민지로 삼다가 19세기 들어 영토를 확장했다. 새로 영국 지배를 받게 된 말레이반도의 다른 지역들은 대개 술탄국의 형태를 지키며 영국과 보호조약을 맺었다. 보호조약의 법적 내용은 1905-1910년 대한제국의 을사보호조약과 비슷한 것이었다.]
남양-남중국해 지역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냈다. 그로부터 말라야와 인도네시아, 마닐라, 사이공, 하노이 등 항구도시, 그리고 방콕과 랑군 등지의 해외중국인 조직들에 관해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과연 남양을 말라야의 중국인 해외 근거지의 배경으로 제시할 수 있을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출처: https://orunkim.tistory.com/2253 [페리스코프: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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