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소멸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전북특별자치도를 매섭게 덮치고 있는 가운데, 그 기저에는 심각한 '두뇌 유출(Brain Drain)'과 'R&D(연구개발) 인프라의 구조적 빈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청년 인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전북도가 각종 산업단지 조성과 기업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정작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인 '과학기술 두뇌'를 길러낼 국가급 연구 인프라는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최근 발표된 통계와 언론 보도는 전북의 암울한 과학기술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기정통부 등 정부 부처의 연간 연구개발 관련 예산 비중에서 최근 5년간 전북에 투입된 국가 예산은 고작 3.6~3.9% 대에 머물러 있다.
R&D 예산의 수도권 및 특정 지역 편중이 극심한 상황에서, 전북은 사실상 국가 과학기술 발전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는 셈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대덕연구개발특구(KAIST)를 필두로 광주(GIST), 대구(DGIST), 울산(UNIST) 등 권역별로 굵직한 과학기술원 거점을 구축하며 지역 혁신의 '뇌간(Brain)' 역할을 맡겨왔다.
여기에 경북 포항의 포항공대와 전남광주시에 에너지공대가 설립되면서 전국 각지에도 새로운 연구 인프라 확충에 국가적 지원이 쏟아지고 있다.
반면, 주요 광역자치단체 중 독자적으로 최고급 이공계 영재를 양성하고 대규모 기초·응용 R&D를 총괄할 '국립과학원' 규모의 핵심 인프라가 없는 곳은 사실상 전북이 유일하다.
이러한 구조적 홀대는 뼈아픈 결과로 이어진다. 지역 내 과학에 뜻을 품은 우수 인재들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타 지역의 과학기술원이나 수도권 대학으로 짐을 싼다. 학위와 연구를 마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올 명분과 '세계적 수준의 랩(Lab)'이 없기 때문이다.
도내 과학계와 산업계 전문가들은 "최첨단 기업이 전북으로 이전하려 해도, 핵심 원천기술을 다룰 석·박사급 연구 인력을 구하기 힘들어 투자를 철회하거나 축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입을 모은다.
전북에 국립과학원을 설립하는 것은 단순한 대학 유치가 아니라, 기울어진 국가 R&D 운동장을 바로잡고 지역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급한 시대적 과제라는 것이다.
전북의 시선은 그동안의 전통적인 굴뚝 산업과 1차 농업을 넘어 미래 100년을 향해 있다. 최근 전북도는 과거의 낡은 산업 지도를 찢고, 피지컬 AI(첨단로봇), 농생명바이오, 신재생에너지(그린수소)를 미래 3대 성장엔진으로 확정 지으며 소부장 산업으로의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선언했다.
실제로 그 변화의 싹은 새만금을 중심으로 움트고 있다. 일례로 최근 새만금 농생명 용지 5공구에서는 100헥타르(ha) 규모의 '국내 첫 지능형 농기계 실증단지'가 첫 삽을 떴다. 고령화된 농촌을 대체할 AI 자율주행 트랙터와 이앙기가 이곳에서 테스트될 예정이다.
또한, 현대차그룹의 새만금 투자와 연계하여 새만금의 산업·에너지 기반에 로보틱스를 결합하는 '피지컬 AI 밸리' 조성 구상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치명적인 맹점이 존재한다. 이들 3대 미래 산업은 모두 하드웨어와 고도의 인공지능, 생명공학이 결합하는 '지식 집약의 끝판왕'이다.
농촌진흥청과 한국식품연구원이라는 훌륭한 인프라, 그리고 새만금이라는 광활한 테스트베드(실증 공간)가 준비되어 있지만, 정작 그 안에서 새로운 알고리즘을 짜고 혁신 물질을 배양할 '최상급 연구진'이 턱없이 부족하다.
전북혁신도시의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기계는 외부에서 사 올 수 있고 건물은 돈으로 지을 수 있지만, 피지컬 AI와 첨단 바이오를 융합할 원천기술과 연구 인력은 벼락치기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지적을 내놨다.
전북이 선점하고자 하는 미래 먹거리 산업들이 단순히 '대기업의 하청 공장'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이들 산업에 특화된 원천 R&D를 수행하고 석·박사급 인력을 끊임없이 공급해 줄 국립과학원이 반드시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엔진'은 화려하게 달았지만, 이를 조종하고 업그레이드할 '핵심 두뇌'가 없다면 전북의 미래 청사진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가 거점 연구시설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파괴력은 얼마나 될까. 광주과학기술원(GIST)과 울산과학기술원(UNIST)의 사례는 국립과학원 하나가 지역의 산업 지형과 인구 지도를 어떻게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는지 여실히 증명한다.
이들 과학원의 가장 큰 경제적 파급효과는 단순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파생 창업(Spin-off) 생태계 조성'과 '정주여건의 질적 도약'을 이끌어냈다는 데 있다.
UNIST의 경우 개교 이후 수십 개의 교원 및 학생 창업 기업을 배출했으며, 2차전지와 신소재 분야의 딥테크(Deep Tech) 스타트업들이 울산 지역 내에 자리 잡으며 새로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우수한 교수진과 연구원, 유학생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이들을 겨냥한 주거 환경, 교육, 문화 인프라가 덩달아 발전하는 거대한 '낙수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전북도의 발걸음은 아직 도민들의 절박함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다른 광역지자체들이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해 굵직한 국책 연구소 분원 하나라도 더 끌어오려 중앙정부와 피 말리는 예산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전북의 R&D 인프라 확충 요구는 다소 수동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전북도는 최근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특화단지로 지정되고 남원 국립의전원 설립을 줄기차게 추진해 온 저력이 있다. 이제 그 행정력과 정치적 응집력을 '국립과학원 유치'라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에 쏟아부어야 한다.
단체장의 공약 수준을 넘어, 도 차원의 '국립과학원 설립 범도민 추진단'을 즉각 구성하고, 왜 전북 새만금과 혁신도시에 피지컬 AI와 바이오를 주도할 과학원이 들어서야 하는지 치밀한 국가적 당위성을 들고 중앙부처를 압박해야 한다. 지금의 타이밍을 놓치면 전북의 혁신 골든타임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UN산하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아태지역 기술협력 프로젝트(RCA-RAS)의 한국 대표를 맡고 있는 심철무 전 한국원자력연구원 위원(공학박사 겸 농학박사)는 "전세계적으로 바이오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독일의 프라운호프연구소나 막스 프랑크 등과의 연구 교류, 인재양성을 위해서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국내 연구기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서 "우리 전북특별자치도가 기왕에 농생명 바이오 산업의 선도지역으로 선언한 마당에 전북과학원을 반드시 설립해 실질적인 이를 주도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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