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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은 역사학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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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은 역사학의 길

[왕겅우 회고록] 3. What kind of historian?

1950년대는 여러모로 불확실성이 넘치던 시기였다. 말라야는 아직 독립 이전이었고 대다수 중국계 주민은 중국 국적이지만 그것이 어느 쪽 중국인지는 1949년 이후 명확하지 않았다. 공산폭동 때문에 말라야 관리들은 중국인이라면 특별히 확인되지 않는 한 신중국에 협조적인 쪽으로 의심하도록 지침을 받고 있었다. 난징에서 막 돌아온 나는 친-베이징도 아니고 친-타이베이도 아니라 새로 내 나라가 된 말라야에 관해 열심히 배우고 있는, 정치적으로 순진한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내가 마주친 불확실성과 모호성이 내가 공부하고자 하는 대상,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빚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내 생각에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내가 배우고 이해하게 된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말라야에 사는 모든 중국인이 일시체류 중인 중국 국민으로 간주될 때였다. 해협식민지에서 태어나 영국 국민의 자격을 가진 사람들만이 예외였다. 내게는 어떤 의미를 가진 상황이었나? 말라야인이 되려는 나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옮겨갈 태세가 되어있었고, 그 새로운 정체성이라는 것이 우리 말라야대학 친구들 사이에서 토론의 대상이었다.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새 말라야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규정하고 싶어 했다.

이것이 내게는 "배우면서 행동한다"는 첫 번째 교훈이었고, 다음 교훈은 "나 자신의 행동에서 배운다"는 것이었다. 어느 교훈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모호성을 걷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말라야대학은 영국인이 떠날 때 국가 경영을 넘겨받을 믿음직한 졸업생들을 배출할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로서, 말라야의 연속성에 대한 영국의 희망이 담긴 학교였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화교로 규정하지 않는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내 개인적 느낌이었다. 말라야사람이 되어도 여전히 중국인으로 보였고, 그렇게 대접받았다.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내 간판의 교체가 가져오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영국문학을 좋아하는 취향 때문에 내 독서 습관과 태도가 영국문화 쪽으로 기울어지기는 했으나 중국계 혈통으로 중국 고전을 읽는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이 공부할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1949년에서 1954년까지 5년간 말라야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며 싱가포르 대학생활의 모든 면을 즐겼다. 대학생활의 구석구석에 너무 빠져 지내는 내게 장래의 아내 마거릿 림이 공부에 더 집중하도록 권고해준 일을 앞서의 책 <있는 곳이 집>에 적었다. 공부한 세 분야 중에서 문학사 학위를 위해 전공을 정할 때 나는 처음에 좋아하던 영문학도, 새 국가의 건설에 유용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경제학도 선택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역사학이었다. 역사학의 CN 파킨슨 교수가 재미있는 분일 뿐 아니라 내가 연구주제를 마음대로 고르도록 허용한 개방적인 분이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말라야대학이 강점을 가진 영국사나 식민지사에 내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분은 알고 있었다. 한편 난징에서 1년 공부한 덕분에 중국사에 기초가 되어있었다. 내가 중국과 말라야의 관계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자 그분은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

내 훈련은 지중해세계 여러 고대문명에 입문하고 그것을 유라시아대륙의 문명들과 비교하는 공부로 시작했다. 그 뒤에는 온통 아시아에서 유럽인 활동의 팽창 이야기였고, 말레이군도 향료 교역에서 가톨릭-프로테스탄트 세력 사이의 대결에 집중되었다. 1800년 이후의 근대사에서는 인도 아대륙에 세워진 대영제국과 아시아 각지에 대한 그 영향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중국과의 차 무역 확대와 중국의 개항을 강요한 아편전쟁 이야기도 여기에 들어갔다. 훈련의 초점은 원사료 사용에 있었고, 공개된 각종 식민지 문서가 사료의 주종이었다. 지역 언어로 작성된 문서를 이용할 때는 각별한 조심이 필요하다는 주의를 받았다.

반-공산당 비상사태 때문에 현대 중국 관계 자료가 모두 금지되어 중국 근대사 연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는 근대 이전 시기에서 석사논문 주제를 잡기로 했다. 파킨슨 교수는 학과 교수진 중에 근대 이전 중국사 연구를 지도해 줄 사람이 없다는 문제를 지적했다. 그래도 우리 지역이 교역에서 받은 혜택에 관해서는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지중해세력들이 해상활동 능력으로 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게 된 상황을 배웠다. 수요가 큰 상품의 장악이 영토 확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가르침을 거기서 받았다.

[말라야 비상사태(1948-1960)는 말라야공산당이 이끄는 말라야인민해방군(MPLA)의 게릴라전을 진압한 과정이었다. 일본 점령기에 영국의 지원으로 항일활동을 벌인 말라야공산당은 일본 패전 후 합법적 정당으로 잠시 활동했으나 곧 불법화되고 지하항쟁에 들어갔다.]

인도양의 모든 주요 항구에서 행해진 고대무역은 향료의 수요에 따라 일어난 것이었다. 포르투갈을 인도, 믈라카와 몰루카제도로 끌어들여 해군력을 발판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해상무역을 일으킨 것이 그 무역에서 나타난 중요한 변화였다. 후에는 순다해협을 통해 광둥으로 연결되는 인도양의 차 무역 성장에 따라 항해술 발전의 중요성이 더욱 확실해졌다. 가장 수익성 높은 상품의 자리를 아편이 차로부터 넘겨받을 무렵에는 산업자본주의의 승리를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중국 쪽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 것은 해협식민지의 세 개 항구도시였다. 중국과 교역이 늘어나는 데 따라 페낭에는 1785년 이후, 싱가포르에는 1819년 이후 지역의 중국인들이 옮겨오기 시작했다. 얼마 후 네덜란드와의 정치적 흥정으로 믈라카가 영국 쪽으로 넘어오면서 남중국해의 핵심 관문이 되는 싱가포르로 주변의 중국인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오래지 않아 중국인 남양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50년 후에는 싱가포르 인구의 4분의 3이 중국계로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남양에서 중국인 소학교가 제일 많은 도시가 되었고, 1919년에는 지역 최초의 중국인 중학교가 생겼다. 아버지가 처음 남양에 와서 가르친 그 학교였다. 그뿐 아니라 1948년 내가 중국에 작별을 고하고 말라야에 자리 잡으러 왔을 때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한 곳이 싱가포르에 세워진 식민지 대학이었다. 동남아시아라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된 지역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아보게 된 것도 그 대학에서였다.

지금은 동남아시아에 관한, 그리고 그곳의 여러 문화와 사회들, 그 경제적, 전략적 중요성에 관한 책들이 수없이 나와 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경위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세대 말라야대학 학생들은 우리 학교 지리학과와 경제학과 교수들이 2차대전 후 강의가 재개되자 동남아시아를 중심 주제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알고 있었다. 교수들은 동남아시아가 실체를 가진 존재처럼 그에 관한 글을 썼고, 그 지역에 관한 1950년의 첫 교과서도 그중 한 분이 쓴 것이었다.

이 지역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진 일인지 <있는 곳이 집>에서 설명한 대목이 있다. 육지와 바다를 건너 전해진 문명들로부터 영적, 심미적, 정치적 영양분을 뽑아내어 풍성한 문화를 키워낸 다양한 집단들이 이 지역에 있었다. 그 집단들의 어울림이 형체를 갖추게 된 것이다. 교정에서 주고받는 반-식민주의 토론을 통해 우리는 이 개방성이 산업자본주의 세력에게 이용당해 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백 년간 유럽 민족제국들의 지배를 받는 동안 지역의 경계선들이 제국주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 그려졌다. 2차대전 종결 후의 식민지 해방 과정에서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은 이 새로 그려진 경계선 안에서 통합성이 약한 인민을 이끌고 국가건설의 과업에 나서게 되었다.

런던의 전략가들은 이 지역의 완전한 해체를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에 항전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사령부를 세웠었다. 전쟁 후 제국들이 신생국가들로 자리를 넘겨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새 "민족"들이 중국의 민족주의나 인도의 반영주의에 휩쓸리지 않기 바랐다. 해방되는 식민지들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 하나의 지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면 서양 세력들이 그곳에서 주동적 역할을 이어갈 희망이 있었다. 자기네 귀환이 환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나나 내 친구들은 배경의 이런 정치적 고려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지역이 하나의 이름을 가질 필요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학문적 소망이 있었다. 그 후 오랫동안 중요한 연구업적은 고고학자, 문헌학자와 언어학자들에게서 나왔다. 그에 자극받은 역사학자와 인류학자들도 수천 년 동안 하나의 실체로 인정받지 못해 온 이 지역의 통합성을 확인하기 위한 수수께끼 풀기 작업에 따라나섰다.

근대 중국의 연구로 나아가겠다는 내 결정은 이런 사정들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중국이 공산국가가 되는 바람에 그 방향 연구가 불가능하게 된 상황을 확인한 나는 이 지역과 중국의 초기 관계를 연구한 학자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옛 중국인들이 "남해(南海)"라 부르던 지역이 눈에 들어온 것은 동남아시아라는 개념과 많은 공통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역사학도로서 아주 유쾌한 출발점이었다. 1954년 중엽 석사논문을 끝낼 때 나는 중국 남해안이 남중국해의 일부로서 동남아시아 6개국과 한 덩어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뒤에 내가 런던대학 소아스(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의 박사과정을 위해 받은 장학금은 동남아시아 출신 연구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학과의 동남아시아분과 주임 DGE 홀 교수의 학생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홀 교수는 명나라 시대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겠다는 내 계획을 승인해주었다. 그런데 1954년 후반 소아스에 도착할 때 내가 지도를 받고자 했던 사학과 동아시아분과의 오토 슈프렝켈 교수가 떠나는 참임을 알게 되었고, 동남아시아 관계 다른 주제를 찾아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Daniel G. E. Hall (1891–1979)은 버마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영국 역사학자로, 오랫동안 동남아시아사의 표준서가 된 <A History of Southeast Asia>(1955)를 저술했다.]

뜻밖의 상황에 나는 공중에 떠 버렸다. 내가 편안하게 쓸 수 있는 동남아시아 언어는 말레이어뿐이었기 때문에 중국어 자료의 취급 능력을 밑천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몇 주일 이것저것 읽으며 생각한 끝에 중국사의 다른 국면으로 들어갈 결정을 내렸다. 당 후기와 북중국의 오대(五代)를 연구 분야로 잡은 것이다.

홀 교수는 이 결정을 승인해주었다. 그는 내 연구를 도와줄 중국학-역사학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중국학과의 데니스 트위쳇에게 부탁했다. 트위쳇은 일본 최고의 학자들과 함께 당나라 시대 경제사를 연구해 왔다. 문헌자료의 파악이 뛰어난 연구자였다.

[Denis Crispin Twitchett (1925–2006)은 영국의 중국사 연구자로 <케임브리지 중국사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시리즈 편집에 큰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제국주의시대의 그 역사가 내 시야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마거릿이 런던에 와서 같이 살게 된 후 말라야 친구들을 계속 만나면서 말라야의 독립과 인도네시아, 베트남과 필리핀의 정치에 관해 함께 생각했다. 지역의 국가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로 가는 것 같았다. 지도자 중 수카르노만이 자기 나라의 역할을 넓게 내다보고 있었다. 지역 내의 역할을 넘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냉전에서 균형추 역할이었다.

그 관심은 지워지지 않았고 남중국해는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세계사 속의 중국에 집중하려 노력하는 중에도 남양이라 불리는 그 바다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9-10세기 북중국의 권력구조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고 1957년 싱가포르로 돌아왔을 때 그 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들 내가 학부 시절에 쓴 쑨원에 관한 논문 이야기만 하고 남양 화교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불렀다. 말라야의 역사와 중국과의 관계, 그리고 동남아시아라는 새 이름의 지역이 계속해서 내 생활을 압박했다.

출처: https://orunkim.tistory.com/2254 [페리스코프: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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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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