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0년이 흘렀다. 우리는 그 사건을 ‘10.28 건대항쟁’이라고 부르고 당시 정권은 ‘공산혁명분자의 건국대 점거난동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건대항쟁이 일어났던 1986년은 어떤 해였을까?
먼저 5.18 광주학살의 원흉 전두환이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다. 1980년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체육관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1986년에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에게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1987년은 대통령선거가 예정된 해인데 그대로 두면 또 전두환 세력이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할 태세였다. 따라서 야당과 재야세력, 학생운동권은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는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하였으나 전두환은 그조차 탄압하였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심하게 말살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보도지침’이다. 보도지침은 정부가 언론에게 정치·경제·사회 문제 등을 특정 방식으로 보도하라고 내리는 지침이었다. 정부가 보도지침을 내려서 그에 맞추어 기사를 쓰도록 강요하였고, 당시 모든 언론은 순응하였다. 보도지침의 존재는 1986년 9월 해직언론인 단체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말>지를 통해 폭로함으로써 처음 알려졌다. 당시로는 당연하게도 이 사실을 제공한 김주언 당시 한국일보 기자와 폭로한 민언협 관계자들이 구속되었다.
인권탄압이 극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다. 대학생이었다가 노동자로 위장취업했다는 이유로 1986년 6월 연행된 권인숙 양은 부천경찰서에서 조사받던 도중 문귀동 경장에게 성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정권은 권인숙 씨가 운동권의 지시에 따라 사건을 조작했다고 거짓 발표했고, 가해자인 문귀동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1988년에야 대법원이 이 사건에 대한 재정신청을 받아들였고 문귀동이 처벌되었다.
민중의 고통이 가중되었고 생존권 투쟁이 탄압받았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에게는 노조 통제와 파업에 대한 탄압으로, 농민에게는 농업정책 반대운동에 대한 통제로, 도시빈민에게는 강제철거로 대응하였다.
그런데도 대학생들이 저항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 일환으로 1986년 10월 28일 서울·경기·인천지역의 29개 대학생 2천여 명이 건국대에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이하 애학투련) 결성식'을 개최하였다.
결성식 전날 저녁 나는 집에서 한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다음날 건대에서 집회가 있고 봉쇄될 가능성이 있으니 아침 일찍 건대로 오라는 것이다. 무슨 집회인지도 모르고 아침에 건대에 도착해서 정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백골단과 전투경찰이 학교를 에워싸는 것이었다. 집회가 끝날 때쯤 경찰들이 진입하였고 우리는 밀려서 여러 건물로 피신하였다. 학생들은 건대의 본관, 도서관, 사회과학관 등으로 몰려갔는데 나는 사회과학관으로 갔다.
보통 건대항쟁을 ‘점거농성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이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시 학생들은 학교를 점거하여 농성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학교 내 집회를 경찰들이 난입하여 진압하였고, 어쩔 수 없이 건물로 밀려간 것을 점거농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양보하여도 ‘농성 유도’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4일간 우리는 건물 내에서 토론도 하고 경찰의 진입에 대비하여 계단에 바리케이트도 쌓았다. 그 기간 중 먹을 것이 없어 거의 물만 먹었다. 우리가 갇혀 있는 동안 전두환 정권은 또 다른 조작사건을 터트렸다. 10월 30일 북한이 금강산 댐을 무너뜨리거나 물을 방류해 수도권을 수몰시키는 '수공(水攻)'을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이 저러는데도 학생들이 난동을 벌여 나라가 위태롭다는 선전을 한 것이다. 이 사건은 1993년 정부의 감사와 국회의 국정조사에서 전두환 정권 말기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과장·조작된 발표였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0월 31일 오전에 우리는 진압되었다. 진압을 위해 정권은 새벽부터 8천 명의 병력뿐만 아니라 헬리콥터도 여러 대 동원하여 공중에서 최루탄을 난사하였다. 당시 나는 최루탄을 피해 건물 5층에 있다가, 아래쪽에서도 경찰이 진입하고 있어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순간 바리케이트로 쌓아놓았던 아래쪽의 소파 등에 불이 붙어 순식간에 화염과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숨을 쉬니 폐가 찢어지는 것 같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간신히 옥상에 올라와 보니 함께 있던 경희대 영문과 천명식이 손에 심한 화상을 입고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당시 옥상 바닥은 밑에서 쏘아댄 물대포와 최루탄, 헬리콥터에서 투하한 최루탄으로 물이 찰랑거리고 최루탄가루가 범벅이 되어있었다. 옥상에서 진압당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심한 구타를 당하였고, 화상 당한 사람들도 껍질이 녹아 지방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앞사람의 허리를 잡게 하여 굴비 두릅처럼 끌려 나왔다. 나는 가벼운 화상을 입어 병원으로 갔다가 3일 정도 후에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나는 초기에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크게 구타나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았지만 먼저 경찰서에 갔던 학생들이 심한 폭력을 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안양교도소로 넘겨졌는데 구속된 1,288명 중 398명이 기소되었고 나머지는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나는 기소되었는데 1차로 일부 학생들이 기소유예로 석방된 후 검사실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검사와 나의 대화를 문답식으로 정리했다.
“너 왜 기소유예로 못 나간 줄 알아?”
“1학년 때 시위참가로 구류를 살았던 전과 때문 아닌가요?”
“아니야. 너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봐.”
그전 경찰 조사 때 나는 구호를 외친 것 외에는 별로 한 일이 없다고 진술했다. 검사는 더 많은 죄목을 집어넣어 재판에 넘기고 싶어서 나를 어린애 취급하며 회유하려 한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순간 검사의 눈빛이 먹이를 움켜쥔 것처럼 빛났다.
“제가 수업 중 형법총론에서 범죄의 ‘구성요건’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건대 건물에 갇혀보니 심상치 않은 상황인 것 같아 가능하면 범죄로 구성될만한 행위를 하지 않으려 노력해서 한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나는 검사가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나온 답은 뜻밖이었다.
“이 씨×놈이!”
이것이 당시 검사의 수준이었다. 지금 검찰도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그렇게 기소되어 1심재판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나는 2,000년대 초에 정부에 명예회복 신청을 하였는데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는 명예회복을 결정하였다. 아래는 위 위원회의 <민주화운동 백서>에 실린 나와 관련한 기록이다.
유한범(67. 11. 28), 명예, 1986, 건국대 점거 농성(애학투련 결성) 사건, 경희대 학생으로 1986. 10. 28. 건국대에서 열린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결성식에 참가, 경찰의 강제해산에 맞서 “직선제 개헌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제창하며 점거·농성한 이유로 1987. 2. 10. 폭처법위반, 집시법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 및 같은 해 3. 9. 학사징계(무기정학) (2007. 6. 18. 제210차)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용공으로 매도하여 건물로 몰아넣고 농성을 유도하였다. 또 연행된 학생들에 대해 시한을 최소 4일을 넘겨 구속영장을 신청하였는데, 이는 학생들이 불법구금 상태에서 경찰 수사를 받아 신체의 자유 등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중대하게 침해당한 것이었다. 또 대다수의 학생들이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에 2022년 10월부터 396명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에 불법구금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진실규명해 달라고 신청을 하였다. 진실위는 2025년 5월 진실규명 대상자 80명에 대해 불법구금 등 인권침해가 있었다고 진실규명 결정을 하였다.
진실위의 결정을 근거로 한양대생이었던 박영일 씨가 법원에 재심을 신청하였는데 서울고등법원은 박영일 씨가 불법체포·불법감금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구타, 고문 등 폭행·가혹행위가 이루어졌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단하여 재심개시를 결정하였다.
올해 4월에는 경희대 친구 박용익과 나를 비롯한 371명이 진실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는데 그중 우리 학교 출신은 33명이다.
건대항쟁 10년 후 판박이같이 1996년 연세대에서 5,848명이 연행되고 462명이 구속되었다. 마찬가지로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권침해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지난 8월 당사자 197명이 진실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하였다.
누군가는 과거의 일은 이제 묻어두자고 한다. 그러나 현재와 관련있는 과거를 묻으면 그 과거는 다시 반복되어 또다시 피해자들의 고통이 발생할 것이다. 나아가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잘못을 덮어두면 그 국가는 정당성을 상실하고 사회통합과 미래발전을 저해할 것이다. 말 그대로 진실과 화해를 위하여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명예회복이 필요하다. 과거사정리의 필요성과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을 강조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친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많은 의무를 요구합니다. 세금도 내라, 때로는 군대도 나와라, 총 들고 싸워라, 목숨 걸고,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질서를 만들고 복종을 요구합니다. …… 그래서 국가는 언제나 정당해야 합니다. 국민들에게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믿음을 줘야 하고 또 실제로 그것을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 국민들은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2004년 9월 5일, 노무현 전대통령)
<유한범 한국투명성기구 공동대표 약력>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대외협력과장(전)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조직팀장(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대외협력홍보팀장(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조직부국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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