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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안익태의 염원과 스페인교과서의 아리랑 : 임재식과 KF의 공공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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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안익태의 염원과 스페인교과서의 아리랑 : 임재식과 KF의 공공외교

한국국제교류재단(KF) 송기도 이사장은 지난 8월 1일, 스페인 밀레니엄합창단 지휘자 임재식을 공공외교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이자 주콜롬비아 대사를 지내며 학문적 혜안과 외교 현장 감각을 두루 다져온 송 이사장이 유럽 정통 클래식 무대에서 오랜 시간 독보적인 예술적 역량을 쌓아온 지휘자를 전면에 세운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공공외교의 나침반이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 진정한 ‘상호 결합(Mutual Integration)’과 ‘쌍방향 문화 융합(Two-way Cultural Fusion)’으로 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한다.

예술은 종종 결핍과 비극의 토양 위에서 가장 찬란한 꽃을 피운다. 임재식의 발자취 역시 그러한 실존적 분투의 산물이다. 한양대학교 성악과 재학 시절, 비싼 학비와 물가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가난한 청년 음악도에게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주류 유학지는 닿기 힘든 문턱이었다. 결국 1983년 상대적으로 학비 부담이 덜했던 낯선 스페인을 택해 바다를 건넜고, 생존과 예술을 건 치열한 고투 끝에 마드리드 왕립고등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 이후 스페인 국영방송(RTVE) 합창단 테너를 거쳐 비야 마드리드 합창단, 가르시아 로르카 합창단 등의 상임 지휘를 역임하며 주류 무대에 뿌리를 내렸다. 동양인 예술가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스페인 국왕 십자 훈장과 이사벨 여왕 문화 훈장을 수훈하며 스페인 문화계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한 배경에는 타국의 척박한 환경과 싸워 이겨낸 인고의 세월이 있었다.

스페인이라는 토양과 한국 음악가의 조우는 필연적으로 한 세대 전의 거장 안익태를 소환한다. 안익태는 일제강점기 조국을 잃고 유럽을 떠돌아야 했던 디아스포라 음악가이자, 격동기 역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낸 망명객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전화(戰火)를 피해 중립국 지대였던 스페인으로 피신했던 그는, 1944년 바르셀로나의 유서 깊은 '카탈루냐 음악당(Palau de la Música Catalana)' 무대에 섰다. 바르셀로나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며 대규모 관현악과 합창으로《한국환상곡》의 역사적인 초연을 올린 것이다. 망국의 서러움과 독립을 향한 투쟁의 서사 끝에서, 작품의 절대적인 하이라이트로 장엄하게 터져 나오는 애국가의 대합창은 식민지 백성이라는 굴레를 안고 유럽을 유랑하던 예술가가 스페인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목소리를 빌려 쏟아낸 피 끓는 민족적 통곡이자 절박한 해방의 외침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비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광복 이후에도 한반도를 덮친 이념 대립과 분단의 소용돌이, 복잡하게 얽힌 국제정치적 족쇄는 끝내 그를 고국 땅에 온전히 정착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결국 그는 스페인 여인 로리타 탈라베라와 가정을 꾸리고 마요르카 교향악단을 창설하며 지중해 섬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아 이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렇게 스페인의 이베리아반도는 한국 음악사에서 가장 아프고도 비장하게 민족의 숨결이 각인된 운명적인 무대가 되었다.

▲임재식 지휘자가 고 안익태 선생의 부인 롤리타 여사와 안익태 선생 유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지완 교수

반세기가 흘러 임재식이 스페인에서 걸어간 길은 안익태의 그 간절했던 염원과 묘하게 겹치면서도, 한 걸음 더 진화된 결실을 맺었다. 1999년, 그는 현지 음악인들을 모아 우리말로 한국 가곡과 민요를 노래하는 ‘스페인 밀레니엄 합창단’을 창단했다. 창단 초기에는 스페인 국영방송(RTVE) 합창단 정단원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은 스페인 전역의 기량 있는 전문 성악가들과 현지 어린이들도 함께 호흡을 맞추는 독보적인 민간 문화사절단이자 독립 합창단으로 자리 잡았다. 임 감독은 성인 성악가들뿐 아니라 현지 어린이 단원들에게도 우리말 가사와 특유의 한(恨)과 흥(興)의 호흡을 직접 지도해 왔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외국어로 노래를 부르는 경험은 단순한 언어 학습 이상의 힘을 지닌다. 유년기에 소리와 가락으로 체화된 우리 노래는 스페인 어린이들의 무의식 속에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본능적인 친밀감과 정서적 공명판을 만들어낸다. 짙은 검은 눈동자의 스페인 어린이들과 전문 성악가들이 한복을 차려 입고 우리말로 애국가를 부르고 《고향의 봄》을 노래하는 모습은 스페인 국영 TV를 통해 현지 안방에 생생히 방영되어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스페인 밀레니엄합창단원들이 한복을 입고 한국 가곡을 공연하고 있다 ⓒ배지완 교수

매년 마드리드 모뉴멘탈 극장의 정기공연과 함께 여름에는 국내 주요 도시의 순회공연을 통해 지난 사반세기 동안 《그리운 금강산》, 《가고파》, 《보리밭》, 《밀양아리랑》등 한국 가곡들이 스페인 밀레니엄합창단원들의 목소리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타국 스페인에서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쥐었던 안익태의 역사가 ‘서양 악곡 형식을 빌린 민족혼의 표출’이었다면, 임재식은 ‘외국 예술가와 미래세대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정서가 스스로 흐르게 만드는’ , 성공적인 양국 문화 접목의 기적을 이룩한 것이다.

그의 헌신의 정점은 2019년 스페인의 권위 있는 교과서 출판사 아나야(ANAYA)의 초등학교 5학년 음악 교과서에 ‘아리랑’이 정식 수록된 사건이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우리 민요의 선율을 배우게 된 것은, 일회성 공연의 갈채를 넘어 현지의 제도 교육과 일상 속에 한국의 정서가 온전히 뿌리내리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 초등학교 5학년 음악교과서에 수록된 아리랑 ⓒ배지완 교수

그렇기에 이번 KF의 임재식 공공외교 홍보대사의 활약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전 세계를 무대로 지식과 문화 네트워크를 구축해온 KF의 외교 플랫폼에, 25년 넘게 현지 예술가들과 다음 세대의 마음속에 한국의 숨결을 심어온 임 감독의 자산이 실질적인 동력으로 결합하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한국 가곡 콩쿠르가 열리고 클래식 무대에서 K-가곡의 문학적·음악적 품격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소비되고 휘발되기 쉬운 대중문화의 범람 속에서, 한국 가곡과 전통 선율이 지닌 고유한 품격을 세계인의 보편적 감동으로 확장해 나가는 KF와 임재식홍보대사의 조화로운 앙상블을 주목해 본다. 안익태가 척박한 유럽 땅에 남겼던 애환의 선율이 임재식지휘자의 헌신을 거쳐 스페인의 일상과 미래세대의 목소리로 피어났듯, 이 깊고 단단한 K-문화의 맥박은 이제 스페인을 넘어 전 세계 무대로 힘차게 뻗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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