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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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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통합'진보당을 위한 변명

[기고] '이정희 눈물'의 의미도 헤아리자

다 맞는 말이다. 비례대표 선거과정에 부정이 있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인 듯하다. 비난받아 마땅하고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사퇴해야 옳다.

다 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공연히 좀 억울한 대목도 있지 않느냐고 변호하고 나섰다가는 도매금에 함께 몰매를 맞게 되리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침묵만 하기는 어렵다. 한 마디만 하고 싶다.

통합진보당은, 김제완씨가 지적했던 것처럼(지난 기사 참조), 적어도 당내 민주주의를 위해 새로운 제도를 실험했다. 당원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비례대표제를 뽑은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비례대표는 오랫동안 돈과 바꿔졌으며, 최근 사정이 좀 나아졌다고는 해도 밀실에서 소수의 인원들이 모여 선정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순위가 뒤바뀌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났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투표도 없었고 '순위'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뒤바뀌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들이 정하면 순위는 결정되는 것이었다. 당원들도 국민들도 구경꾼이었다. 그저 중앙당의 몇몇 사람이 정한 명단을 앞에 두고 도장만 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후보 개개인에 대해서는 선택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그저 몇 십 명 단위로 묶인 '종합선물세트'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원투표에 의해 비례대표를 선발한다는 일은 한국 정치사에서 꽤 커다란 의미가 있는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 실험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결과로만 본다면 차라리 시도하지 않느니 못했다. 하지만 어떤가. 그렇다고 실험을 완전히 중단해야 하겠는가.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아예 그만두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정당들은 잘코사니하면서 불구경할 자격이 없으며, 나는 결백하노라 뒷짐 지고 있을 만큼 떳떳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가. 우리는 종합세트공천보다 투표부정에 너무 민감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도 생길 법하지 않은가.

안타까운 것은 이런 사태가 터진 뒤에도 통합진보당이 갈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는 점이다. 석고대죄하고 모두 사퇴한 뒤에 재발방지책을 찾는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뭇매를 맞으며 버티는 쪽을 선택했다. 그 원인도 분파주의이며 그로 인해 더욱 악화되는 것도 분파주의가 아닐까 한다. 급작스럽게 3개 정당이 합쳐지는 과정에서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지 못했고, 부정선거도 그에 대한 폭로도 그런 탓에 일어났다. 또한 이 사태로 인해 각 분파 사이의 감정적 골은 깊을 대로 깊어만 졌다.

분파주의는 기실 진보적 정치운동에 대한 독재권력의 탄압 때문에 생겨나고 자라났다. 오랫동안 엄혹한 탄압 속에서 자라왔으므로 철통같은 비밀유지와 동지애로 뭉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대동단결보다는 인연이 닿는 소수끼리의 단결을 불러왔다. 그 과정에서 대중들과 소통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고, 내부의 동지적 관계를 국민과의 소통보다 더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가 언제 체포되어 어떤 고문을 받게 될 지 몰랐고 누가 프락치일지 알 수 없는 판이었다. 전대협의 경우 의장 사수대가 생겨났고, 지도부는 늘 대중들과 소통할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의장사수대가 그렇게 했듯이, 동지나 지도부를 위해서라면 대신 감옥살이하는 일까지도 마다치 않았지만, 그 집단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다. 분파주의 문화는 그 과정에서 생겨났다.

국민에 대한 인식도 비슷했다. 말로는 국민을 위해서 헌신하고 투쟁한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국민을 선전의 대상, 동원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습관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은 독재자의 권모술수에 놀아나는 그저 어리석은 집단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없지 않았다. 국민과 소통할 기회를 권력에 의해 차단당한 나머지, 국민에 대한 인식 역시 관념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진 이론들을 학습하여 이 땅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 급급했다.

심지어는 목적이 같고 방법만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인식했다. 힘을 합해야 할 세력이라기보다는 경쟁자라고 보았다. NL이니, PD니, NLPD니 하는 편가름은 고질적이었다. 통합진보당 당권파가 이 지경에까지 몰려있으면서도 국민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결국 파벌 내부의 결속과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리라.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자고 시작한 일이, 다른 많은 인간들을 대상으로 도구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아이러니가 벌어지는 것이다.

독재 시기에 진보운동이 계파 별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때, 자신의 수뇌부에 대한 과다한 의존과 조직내 민주주의의 결여는 어쩌면 필요악이었다. 이번 경선제도는 그 필요악을 버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새로운 민주적 조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낡은 문화가 새로운 길을 향하려는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어쩌면 한번쯤은 겪었어야 하는 진통이었다. 이번 통합진보당의 탄생과 비례대표 직선제는 고질적인 분파주의와 당내 민주주의의 결여를 극복하려는 시도로서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물론 실패로 끝나는 듯하지만, 역시 실패했다고 해서 모든 의미가 동시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진보진영의 고질적 파벌주의는 정권의 탄압에 의해 만들어진 측면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저 '선글라스 낀 사람들' 때문이라면서 우는 소리만 할 수는 없는 처지에 통합진보당은 놓여 있다. 거의 교섭단체에 육박하는 의석을 지닌 공당 아닌가. 통합진보당은 독재와의 투쟁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독재자를 닮아버린 자신들의 내면에 대해서 성찰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독재권력처럼 나 스스로도 국민과 당원을 도구로 대상으로 동원하고자 했음을 자성해야 한다. 지금의 소나기만 피하면 여론이란 어차피 또 잊어버리게 되어있다고 오판해서도 안 된다.

심사가 착잡할 줄로 안다. 검찰 수사도 시작될 것이고, 지금 감추고 싶어 하는 많은 것들이 속속 밝혀질 수도 있다. 더 심한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당권파가 그때를 대비하자면 자파 국회의원의 수를 늘려둘 필요도 있겠지. 하지만 그 선택은 진보정치를 몇 백 걸음 퇴보시키는 길. 그러니 진퇴양난이겠지.

어려울 때는 오로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 자신이 진보운동에, 진보정치에 몸담기로 결심했던가하는 갓 스무 살 때의 초심으로. 그들은 과연 '한줌밖에 되지 않는' 계파와 '동지'들을 위해서 진보운동을 시작하였던가.

진보에 실망했다고, 다시는 표를 주지 않겠노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다. 물론 분노와 실망은 이해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도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양면성이 있다는 점도 함께 인식하자. 그게 균형 잡힌 시각 아니겠는가. 그들은 적어도, 통합을 해냈고, 당원투표를 도입함으로써 한걸음 진보하고자 시도했던 것 아닌가. 잘 해보려다가 낡은 관성을 채 극복하지 못해 생긴 잘못 아닌가. 작금의 통합진보당에 대한 비판은 너무 야박한 것 아닐까. '이정희가 그럴 줄은 몰랐다'고 말하기 전에, 그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도 한번 헤아려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비판은 하되 균형은 잡자.

이번 사건으로 진보의 가치와 의미는 모조리 탕진되었는가. 통합진보당이 이토록 심하게 비판받는 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그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그만큼 컸기 때문 아닌가. '종합세트공천'보다 투표부정에 훨씬 민감한 것은, 진보정치에 대한 기대가 훨씬 컸다는 반증 아닌가. 다독이고 타일러서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비아냥이나 자포자기보다 훨씬 소중하지 않겠는가. 통합진보당은 계파주의의 극복을 위해 통합을 이뤘고 당내민주화라는 새로운 실험을 하다가 좌초했다. 물론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진심으로 사죄하고 다시 시작하겠노라 약속한다면 다시 기회를 주어 보자.

실패학이라는 것이 있다. 실패의 원인을 찾아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하는 학문이다. 실패자들은 자신의 실수를 감추고자 노력하게 마련이니 실패학은 성공하기 어렵다. 그래서 실패의 주역에게 그 원인을 정확하게 판명하여 재발을 방지하도록 하는 조건으로 처벌을 감면하는 제도까지 있다고 한다. 예컨대 설계나 시공 미숙으로 건물이 붕괴되면 관련 건축인들이 실패를 정확하게 규명하도록 하는 조건으로 처벌을 감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의욕적인 실험과 참혹한 실패도, 실패학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된다면 길게 보아 훌륭한 경험과 교훈이 되리라 믿는다. 물론, 전제조건은 있다. 먼저 실패를 낱낱이 고백하고 참회하며 재발방지책을 만들어내야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지 않았던가. 진정성을 가지고 대처해가다보면 국민들이 이해하고 처벌을 감면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통합진보당은 다소 억울한 점이 없지 않더라도, 잘못보다 너무 많이 비판받는다는 분노가 있더라도, 그래도 석고대죄해야 한다.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방식으로 획득한 모든 것들도 물론 기꺼이 포기하라.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라. 그 출발점에서 당신들에게 과연 무엇이 있었는가. 투옥과 고문과 겁먹어 침묵하는 대중들 말고 그 무엇이 있었는가. 이만큼 온 것도 큰 진보이다. 지금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그때보다는 크나큰 진전을 이루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처음부터 차곡차곡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해가길 바란다. 국민과의 소통과 신뢰는 정치의, 특히 진보운동의 유일한 생명이요 힘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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