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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 정회장, 세계와 겨루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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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 정회장, 세계와 겨루다 <1>

<제1화> 첫 한국 독자모델 포니 개발을 둘러싸고 정회장과 미국대사 스나이더가 벌인 뜨거운 담판

여름 휴가가 모두 끝나서인지 출근길의 자동차 홍수로 인한 교통 정체가 다시 시작되었다. 교통방송에서는 수시로 시내 도로사정을 알려주느라 바쁘고, 차 안의 사람들은 이러한 자동차의 물결을 보면 짜증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나는 1977년의 어느 봄날, 정회장과 스나이더(Richard Sneider) 주한 미대사의 숨막히는 단독 회담을 생각하게 된다. 그날의 회담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운명의 자리였다.

화창한 봄날. 푸릇푸릇 물이 오른 가로수가 싱그러움을 뿜어내는 거리는 봄옷으로 치장한 사람들의 물결이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거리의 풍경이나 따스한 봄 햇살을 즐길 겨를도 없이 곧 있을 정주영 회장의 해외 출장에 대비해 연설 원고, 면담자료 등을 작성하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의 인터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예, 박정웅입니다.”
"아, 박군인가? 날세.”
카랑카랑하고 힘에 넘치던 평소의 목소리와는 달리 낮게 가라앉은 듯한 정회장의 목소리가 전화선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늘, 약속 있는가?”
내 약속이 무슨 문제인가.
“없습니다.”
“그럼 나하고 잠시 어디 좀 다녀오지.”
“예, 알겠습니다. 곧 올라가겠습니다.”
평소와 다른 정회장의 목소리 때문에 다소 긴장한 채 나는 곧 회장실로 올라갔다.
“왔는가? 가지.”

***심상치 않은 분위가**

평소 정회장은 이야기를 무척 즐기는 편이다. 사무실이든 차 안이든, 또는 식사중에도 자기 생각을 수시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다.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주위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반응을 살펴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물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들려주기도 했다. 또 문득 떠오르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대해 의견을 묻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때로는 본격적인 사업 아이디어로 발전하곤 하기 때문에 평소의 사소한 대화에도 주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날의 정회장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와 달리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창 밖을 내다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정회장의 모습은 옆에서 말을 걸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때문에 나는 행선지가 어딘지,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도 묻지 못한 채 그저 차창 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정회장의 전용차가 도착한 곳은 조선호텔. 호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방 번호를 확인한 정회장은 수행 비서는 물론 호텔측의 안내도 받지 않고 나 하나만을 대동한 채 곧장 객실로 올라갔다.

‘똑똑.’
“플리즈, 컴 인”
굵직한 목소리로 누군가 안에서 대답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주한 미국대사 리처드 스나이더였다. 수행원도 없이 혼자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축하합니다. 정회장님. 대단한 성과를 거두시고 있더군요.”
“감사합니다.”
스나이더가 말하는 대단한 성과는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렸던 제55회 자동차 박람회에 출품한 한국 최초의 독자모델 ‘포니1호’에 대한 국내외의 열띤 호평과 그 후속 사업 진척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1967년에 설립된 현대자동차를 비롯하여 기아, GMK, 아시아 등의 자동차 4사와 신진지프 등 적지 않은 수의 자동차 업체가 있었지만 모두 해외 모델을 도입해 국내에서 조립 생산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는 이탈리아의 ‘이탈 디자인’사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의 계약을 맺고 ‘포니’라는 독자모델을 개발하여 ‘포니1호’와 ‘포니 쿠페’ 등 2종의 시제품을 박람회에 출품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독자적인 자동차 생산을 할 수 있는 국가로 당당히 자리잡게 되었다.

<사진>

***야심작을 포기하라니**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독자적인 모델 개발은 우리로서는 외화를 절약하고 한국의 기술력을 세계적으로 알린 쾌거였지만 미국으로서는 대단히 큰 잠재력을 지닌 시장을 잃게 되는 셈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즈음 GM은 한국에서 카르미나라는 승용차를 조립 출시하여 참담한 실패를 맞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뒤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스나이더가 말문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자동차 독자 개발을 포기해주십시오.”
“예?”

순간 통역을 하던 나는 깜짝 놀라 스나이더를 다시 한번 쳐다 봤다. ‘포니’는 현대와 정회장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야심작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라니…. 그러나 정회장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듯, 표정만 더욱 굳어졌을 뿐 크게 놀란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 냉정하게 생각해봅시다. ‘포니’의 박람회 출품으로 현대의 기술력은 증명이 되었소. 하지만 기술만 가지고 자동차를 생산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아시다시피 자동차 산업은 ‘규모의 산업’입니다. 최소한 연산 50만대 이상을 생산할 수 있어야 타당성이 있는 거요. 근데, 지금 한국의 실정은 어떻습니까? 조립생산업체를 모두 합해도 30만대가 채 안되지 않습니까? 내수기반이 턱없이 부족한 이런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자동차 산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결과가 너무 뻔해요. 거기다 몇 천 달러에 불과한 국민소득 수준으로 볼 때 과연 한국인들이 자가용을 타고 다닐 날이 언제가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마치 현대를 걱정해주는 듯한 스나이더의 이야기는 장장 1시간 30분 이상 이어졌다. 사실 어떤 면에서 그의 이야기는 조목조목 당시 상황으로는 타당성이 있는 것이기도 했다.
“정회장께서는 수출을 염두에 두고 계신 모양인데, 수출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자동차를 만들려면 수만 개의 부품이 필요한데, 한국에 그만한 부품을 공급해줄 기술과 경험 기반이 있는 업체들이 과연 있을까요?”

하지만 장황하게 이어지는 스나이더의 이야기에도 정회장은 그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현대를 걱정해주어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잠시 답답한 듯 정회장의 얼굴을 바라보던 스나이더는 이윽고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자, 제가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자동차 독자 개발을 포기하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다해 현대를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포드든 GM이든 크라이슬러든 현대가 조건대로 조립·생산을 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내수시장은 물론 동남아수출까지 현대 시장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중동건설에서도 현대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정회장의 확신과 열정**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었던 스나이더는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이것이 제가 제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현대는 앞으로 미국과 한국 양국에서 모두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동차 독자 개발 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면 현대를 해외무대에서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스나이더의 말을 옮기는 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는 말 그대로 제안이 아니라 가히 ‘협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스나이더가 입을 다물자 잠시 짓누를 듯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한동안 스나이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정회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비록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느리게 이어지는 이야기였지만 정회장다운 확신과 열정은 그대로 느껴졌다.

“현대와 저에 대해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회장은 우선 스나이더의 이야기에 대한 감사 인사로 말문을 열었다.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사님의 제안은 무척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순간, 스나이더가 잠시 움찔했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국토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도로는 인체 내의 혈관과 같고 자동차는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같습니다. 도로가 발달하고 자동차가 원활하게 다닐 수 있게 되면 모든 생산과 경제활동 역시 활발하게 돌아가고 경쟁력을 갖게 됩니다. 물류 비용 역시 상당히 줄어들게 됩니다. 이 때문에 좋은 자동차를 싸게 공급하는 것은 인체 내에 좋은 피를 흐르게 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제가 자동차 산업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사명감 때문입니다.”
느리지만 확신에 찬 정회장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날 무릎을 꿇었다면**

“조만간 우리나라의 국민소득도 5천 달러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다 몇 년 전 경부고속도가 건설되는 등 도로 여건이 눈에 띠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내수시장도 곧 활기를 띠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토리노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수출 전망도 밝습니다. 또 부품공업의 기반 역시 대사님의 걱정과는 달리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 때문에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물론 이런 제 예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제가 건설에서 번 돈을 모두 쏟아 붓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저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자리를 잡을 수만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나는 보람을 삼을 것입니다.”

통역이 끝나고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스나이더의 표정은 참담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정회장은 세계적인 초강대국 미국의 압력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넘긴 것이다.
전국민을 상대로 이름을 공모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더욱 큰 관심을 끌었던 포니는 출고되자마자 한국 자동차 시장의 43%를 석권, 한국 자동차 산업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또 그 이후 미국의 문전이라 할 수 있는 중미의 에콰도르에 포니를 수출함으로써 스나이더와 미국의 우려가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자동차 1천만 대 시대를 열었다. 게다가 동남아나 유럽은 물론 미국과 일본시장에도 진출, 대규모 수출을 함으로써 한국경제의 한 기둥 역할을 다하고 있다. 때때로 나는 동남아 출장길에서 그날의 정주영 회장을 떠올리곤 한다. 동남아의 거리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우리 차와 도요타, 마쓰시다, 벤츠, 크라이슬러 등의 외제 자동차 물결.

만일 정회장이 그날의 담판에서 무릎을 꿇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도로는 과연 어떤 나라의 자동차들이 물결치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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