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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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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읽다

[기고] 백기완의 역사교과서 <버선발 이야기>

"아이구 이 추운 날씨에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유난히도 추웠던 작년 연말 어느 날 나는 집이 있는 경기도로부터 목동에 가기 위해 버스를 갈아타고 두시간을 거리에서 헤매며 투덜거렸다. "대표적인 노동탄압기업으로 정평이 난 스타플렉스(파인텍) 노동자들이 400일이 넘게 고공굴뚝농성을 하고 있어 원로들이 나서려고 하니 스타플렉스가 있는 목동에 결집해 달라"는 백기완 선생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학교를 일찍 들어간 덕에 미성년자였던 대학 2학년 때 학생운동으로 감옥을 가기 시작해, 제적, 강제징집 등 파란만장하다면 파란만장한 청년시절을 보냈다. 80년 전두환 덕에 언론사를 그만두고 떠나야 했던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교수가 된 뒤에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공동의장, 민중연대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며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보냈다.

그래서 작년 봄 근 30년 간 몸담았던 대학에서 정년을 하면서 "이제 사회운동도 정년을 하고 그동안 사회운동 하느라 하지 못했던 그림, 사진 등 고등학교 시절의 꿈을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 한데 백 선생님 부름을 받으니 안 나갈 수도 없어 투덜대며 목동으로 향했다.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프레시안(최형락)

목동에 도착해 추위에 떨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부축을 받으며 나타나셨다. 고령이신 데다 얼마 전 목숨을 건 대수술을 해서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부축을 받으며 나오신 백 선생님을 보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아니 나보다 스무살이나 나이가 많고 건강도 좋지 않은 백 선생님이 아픈 몸을 끌고 이렇게 나오시는데 내가 정년 좀 했다고 사회운동도 은퇴하겠다고 생각했으니,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갑자기 내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올 연초, 다시 백 선생님으로부터 파발이 왔다. 태안화력발전에서 설비점검중 사고로 숨진 비정규직노동자 김용균 씨에 대한 진상규명과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사회원로(중진) 비상시국선언을 발표하려고 하니,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모이라는 부름이었다. 한 달전 그 추위에도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던 백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라, 이번에는 불평없이 집을 나섰다.

그렇다. 사회의 원로가, 사회의 큰 어른이 사라진 우리 시대에 백기완 선생님은 '마지막 원로', '원로의 좌장'이다. 특히 적지 않은 원로라는 분들이 정부 인사들과의 개인적 친분관계나 욕심, 아니면 소위 '비판적 지지'('자유주의'정치세력이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지지해줘야 한다는)의 입장 때문에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정부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개혁정부’에 대한 비판에 몸을 사리고 있을 때, 백 선생님은 옳은 길을 가지 않고 있으면 '개혁정부'라고 하더라도 죽비와 호통을 아끼지 않아 왔다. 목동에서도 서울대 영안실에서도 문재인 정부를 향한 이 같은 호통은 끝나지 않았다.

▲ <버선발 이야기>(백기완 지음, 오바이북 펴냄) ⓒ오마이북
그런 백 선생님이 이번에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소중한 선물을 주셨다. <버선발 이야기>라는 이야기 보따리다. 백 선생님은 치열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문학가, 이야기꾼, 한글학자이다. ‘민중운동의 애국가’라고 할 수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백 선생님 시로 만든 것이라는 잘 알려져 있다. <장산곶매 이야기>, <부심이의 엄마생각>과 같은 '소설'로부터 <이제 때가 왔다>와 같은 시집, <대륙>과 같은 영화 시나리오 등 그의 문학적 성과는 가히 전천후이다. 뿐만 아니라 한자, 일본어, 영어 등으로 오염된 우리의 말을 바로잡기 위해 고전분투해온 뛰어난 한글학자가 바로 백 선생님이다.

개인적으로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 등 평생 수많은 글을 써 왔지만 한 번도 글을 쓰며 떨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나는 떨고 있다. <모래시계>의 명대사처럼 "나 떨고 있니"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내 글을 읽고 백 선생님이 "손 교수, 미국서 공부하고 오더니 글이 이게 뭐야, 우리 글이 아니라 미국 놈들에게 물든 '똥글'이구만"하고 야단치는 것 아닌가 두렵기만 하다.

<버선발 이야기>는 사실 읽기 쉬운 글은 아니다. 우선 외래어에 의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우리 말로 쓰여 있어 외래어에 물들어 있는 우리가 읽기에는 오히려 외국어로 쓰인 책을 읽는 기분이고, 사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를 고려해 곳곳이 단어 해설들을 넣어줬지만 말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문학 스타일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남미를 대표하는 소설가 중 가브리엘 마르케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백년의 고독>은 미콘도라는 가공의 땅을 무대로 한 원주민 일족의 역사를 그린 작품으로 ‘마술적 사실주의’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버선발 이야기>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이 바로 마르케스와 '마술적 사실주의'이다.

<버선발 이야기>는 <백년의 고독>과 마찬가지로 가상의 땅에서 일어나는 버선발의 성장기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생생한 우리의 역사를 사실주의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분사회와 계급사회의 비인간적인 현실과 억압, 착취를 우화로, 가상의 이야기로, 신화로 그리고 있다. 일종의 '마술적 사실주의'이다. 주인공인 버선발에게 한 친구가 이렇게 호통을 친다.

"아니 여보시오, 우리나라라니. 그게 임금의 나라요, 그와 한축(한패)인 떼돈꾼의 나라지, 어떻게 그게 우리나라란 말이오. 거기에 나는 왜 갖다가서 우거지처럼 낑겨 넣는 거요. 아따, 그러고 보니 젊은인 야싸한(모진) 게잡이(정보원, 정탐꾼)로구먼. 어서 가시우, 다시는 여기서 얼씬대질 말란 말이우. 오늘부터 여기는 내 나라란 말이오. 글을 잘하고 칼도 잘 쓰는 이들을 떡허니 내 무릎 아래에 거느리고는 내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내 나라의 임금을 내가 하겠다는데 그대는 뭔 쥘락으로 댄투(반대)하는 거요. 꺼지시오, 어서 꺼져요. 대갈빼기를 악살, 박살 내기에 앞서 어서 꺼지라니까."
손자를 살려준 버선발에게 할매는 말한다.

"여보게, 내 늘매(손자)를 살려내 준 거, 그거 참말로 고마웠네. 하지만 그런 말이나 하려고 내 늘매의 팔뚝에 안겨 예까지 온 건 아니라네. 알로(진짜로) 말을 하면 말일세. 우리 늘매를 뺏어 와달라고 한 나의 다부(부탁)부터가 잘못이었네... 중략...이제부터 우리 늘매는 한살매(일생) 꽁꽁 숨어서 살아야만 한다 그 말일세. 또 어쩌다가 장가를 들어 애들을 낳게 되면 그 어린것들도 숨어서 살아야 하니 그게 어째서 참짜 날래(해방)냔 말일세. 때문에 내가 짜배기(진짜)로 자네한테 다부를 하려고 했으면 말일세. 사람이 사람을 갖다가서 내 거라며 부려먹는 그 머슴이라는 사갈(죄)과 함께 그 틀거리(체제)를 왕창 부셔달라고 했어야 하질 않았겠나."

결국 필요한 것은 수탈 체제, 소수만 잘 사는 '헬조선 체제'를 까부수고 다 같이 나누고 다 같이 잘 사는 '노나메기'의 세상이다. 그리고 이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먹물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초들이다.

"여보게, 자네가 바로 참짜 노나메기일세, 노나메기. 야 이놈들아, 남의 목숨인 박땀, 안간 땀, 피땀만 뺏어먹으려 들지 말고 너도 사람이라고 하면 너도나도 다 함께 박땀, 안간 땀, 피땀을 흘리자.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벗나래(세상)를 만들자. 너만 목숨이 있다더냐. 이 땅별(지구), 이 온이(인류)가 다 제 목숨이 있고 이 누룸(자연)도 제 목숨이 있으니 다 같이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거, 그게 바로 노나메기라네. 이 노나메기란 어디서 나온 것이겠나. 어느 깨우친 이의 괴나리봇짐에서 나왔겠는가. 어림 쪽도 없는 소리. 아니라네, 아니야. 그러면 어느 거룩한 세울이(도덕가)의 나발에서 나왔을 것 같은가. 아니라니까. 그럼 어디서 나왔더냐. 자네 같은 니나(민중), 그들이 흘린 그 박땀, 그 안간 땀, 그 피땀의 갈마(역사)에서 스스로 깨우친 것이라네."

<버선발 이야기>는 읽기에 쉽지 않지만, 모두가 읽어야 할 우리 시대의 '사회교과서', '역사 교과서'이다. 그리고 읽다보면 “대한민국의 3대 구라”라고 불리는 백 선생님 특유의 구수한 말솜씨에 빠져들고 중독되어 책을 놓지 못하게 된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원로'가 들려주는 역사강의, 이야기 강의에 모두 함께하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백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너무 자주 호출하지는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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