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18일 발생한 대구 지하철 참사는 온 국민을 울분과 슬픔에 몰아넣은 충격적인 사고였다. 그 인명피해 규모가 큰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위급상황에 대처하기에는 터무니없을 만큼 허술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유가족이 아니라도 분통을 터트리기에 충분할 만큼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사후대책, 그리고 은폐∙축소 의혹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총체적인 엉망진창을 낱낱이 보여주고 말았다.
물론 이 사고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살아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토록 비싼 대가를 치룬 만큼 그만한 교훈을 얻어내 다시는 이런 대형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책임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는 지난 1월25일에 발생한 인터넷 대란과 많은 공통점을 보여준다. 우선 사람이 만들어 낸 인재(人災)라는 점과 함께 그 피해가 막대하다는 점 또한 너무 닮았다. 물론 천하보다 더 귀한 인명이 수백 명이나 숨을 거둔 대구 사고의 희생이 훨씬 큰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인터넷 대란의 피해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큰 것 또한 사실이다.
이메일이 불통되고 인터넷 검색, 금융, 예약, 쇼핑, 게임, 커뮤니티 등이 일제히 정지되면서 집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국민들에게 큰 불편을 초래했다. 또한 인터넷을 기반으로 사업을 하는 PC방과 포털 사업자뿐만 아니라 구정 특수를 기대하고 있던 인터넷 쇼핑몰, 그리고 소비자의 신뢰를 읽어버린 통신업자 등 2차적인 피해까지 생각하면 인터넷 대란의 피해는 광범위할 뿐 아니라 심대한 것으로 보인다.
대구 사고와 인터넷 대란은 또한 작은 불씨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구 지하철 화재는 한 개의 페트병에 든 휘발유로부터 시작되었고, 인터넷 대란은 원고지 2매 정도의 데이터를 2백56개씩의 패킷으로 복제하여 서버로 보내는 인터넷 웜 바이러스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토록 작은 원인과 엄청난 결과 사이의 불균형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지하철과 인터넷이 모두 '네트워크'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씩 단절된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영향력을 주고받게 되어 있는 조직이라는 사실이다.
1079호 열차의 화재는 곧 이어 중앙역에 진입한 1080호에 옮겨 붙으며 대형 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인터넷 대란의 경우도 문제의 웜 바이러스가 한꺼번에 모든 컴퓨터를 공격한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집어내기는 어렵지만 어떤 컴퓨터로부터 시작된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서 가장 발달되었다는 대한민국의 초고속 인터넷 망을 통해 문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그 영토를 넓혀 결국 전국의 인터넷망을 다운시키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네트워크 구조의 조직에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급속하게 번져 큰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보아야 한다. 물론 SOFA 개정을 촉구하는 촛불시위를 광화문에서 갖자는 제안과 같은 긍정적 일들이 빠르게 확산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살펴보고 있는 두 사고처럼, 불길과 바이러스와 같은 부정적 요인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확산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이 점에서도 완전히 같은 양상을 보여주었다. 페트병에서 시작된 불길은 삽시간에 온 열차에 번져나갔고 결국 다른 전동차까지 태우고 말았다. 웜 바이러스 또한 너무도 짧은 시간에 전국의 인터넷 망을 다운시키고 말았다.
전동차의 소재가 불연성이었다면 불길의 확산 속도를 늦출 수 있었을 것이고 최소한 유독가스를 뿜어내 이토록 엄청난 희생자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고속 네트워크로 연결된 우리의 컴퓨터 또한 웜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만한 어떤 보안장치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이 불쏘시개였고, 웜 바이러스의 먹이감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다보니,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간하기 어렵다는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게 되었다. 대구의 경우 처음엔 1079호 열차가 피해자였지만 1080호의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된 셈이다. 인터넷 대란에서도 마찬가지로 웜 바이러스의 첫 공격을 받은 컴퓨터는 피해자였지만 초고속망을 통해 다른 컴퓨터에게 전해주었으니 가해자인 셈이다. 마치 바쁜 출근길에 추돌사고를 당한 승용차처럼 처음엔 피해자였지만 결국 연속 충돌로 이어져 길을 막게 된다면 원치 않은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사태가 이러한 데도 사후대책마저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점 또한 두 사건의 공통점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안타까운 이 두 사건은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세상도 이젠 네트워크로 서로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사회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네트워크 세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수직적 피라미드 조직과는 대비되는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평적인 조직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외부환경이 이렇게 변한 만큼 내부조직 또한 이에 걸맞는 변화를 보이지 않으면 큰 사고를 불러올뿐 아니라 끝내는 그 생존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번 대구 지하철 사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문제점은 역시 사고 열차의 승무원과 종합상황실 관계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먼저 1079호 승무원의 경우 화재발생 사실을 종합상황실에 보고하기에 앞서 소화기를 들고 현장으로 달려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수직적인 피라미드 조직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수직적인 조직의 경우 상황에 대해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정점에 속한 소수의 일이다. 현장을 지키는 승무원의 경우 이들의 손발이 되어 자신에게 부여된 명령을 수행하는 일뿐만 아니라 상황에 대한 정보를 보고해야 할 촉수(觸手)로서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현장의 승무원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종합상황실 관계자로서는 막연히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뒤늦게나마 모니터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의 화재인지 파악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뒤를 따르고 있는 1080호 전동차를 정지시키는 경우 이에 따른 책임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080호 승무원에게 화재가 발생했으니 조심해서 진입하라는 명령은 이렇게 내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1080호 승무원의 경우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1079호로부터 옮겨 붙은 불길이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연기 나고 엉망입니다. 답답하니까 빨리 조치 바랍니다"라는 말만 연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천금같은 시간은 흘러갔다. 결국 출발명령을 받았지만 이때는 이미 단전이 되어 출발할 수도 없었다. 다시 한번 종합 상황실의 명령에 따라 문제의 마스터 키마저 뽑아들고 자리를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한 조직이 생산적일 뿐 아니라 위기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려면, 수직적인 커뮤니케이션 망과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 망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수직적인 조직인 군대라 할지라도, 아이디어를 모으는 회의에서마저 상명하복식의 수직적인 커뮤니케이션만을 강요한다면 결코 그 목표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자유롭다는 IT업계도 상황에 따라서는 사장으로부터 말단사원에 이르기까지 일사불난하게 움직이기 위해 수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수직적 커뮤니케이션과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는 당면과제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결정되어야 한다. 이번 대구참사의 경우는 현지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승무원이 결정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1079호 그리고 1080호의 두 승무원은 모두 이 선택에 실패했다. 신속하게 상부에 보고했어야 할 1079호 승무원은 현장으로 달려가기에 바빴고, 현장에 달려가 전동차 문을 열어 승객들을 신속히 대피시켰어야 할 1080호 승무원은 종합상황실에 보고하여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화마는 그 많은 생명들을 집어 삼키고 만 것이다.
문제는 분별력이다.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 바로 분별력이 이번 사건에서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인 것이다. 산업사회를 지배했던 수직적 피라미드 조직에서는 손발 노릇이면 족한 현장 근무자에게 분별력이란 사치스런 장식품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수평적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다른 조직과 접촉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판단, 결정하여 실행할 수 있는 분별력은 모두에게 필수적 생존조건이 된 것이다.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위아래를 막론하고 모두가 손과 발뿐만 아니라 가슴과 머리까지 갖춘 온전한 인간으로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분별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는 사실은 또한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의 태부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 대구 참사에서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 망을 작동시켰더라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만약 1080호 승무원이 중앙역에 진입하기 전에 1079호 승무원과 통화할 수 있었다면 아무리 종합상황실로부터 진입명령을 받았다 할지라도 멈춰 섰을 것이고, 혹시 진입했다 할지라도 그대로 통과하여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1079호 승무원이 자리를 비워 정상적인 통화가 가능했겠느냐는 생각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온 국민이 가지고 다닌다는 휴대폰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1080호 승무원은 전원이 끊어져 열차를 포기하고 자리를 떠나 뒤에 종합상황실 관계자들과 사고를 은폐 혹은 축소하는 데에만 이 휴대폰을 사용했다니 참 개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의 범위를 넓혀보면,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망을 갖추지 못한 것은 대구지하철 공사만이 아니다. 최근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업무훼방꾼 제 1위로 '쓸 데 없는 회의'가 뽑힌 것이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생각한다. 윗사람만 얘기하고 아래 직원들은 듣기만 해야 하는 회의는 진정한 회의일 수 없다는 점에서 '쓸 데 없는 회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회의야말로 당면 업무수행에 가장 심각한 훼방꾼일뿐더러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분별력 있는 인간으로 성숙하는데 결정적인 장애물 노릇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영국 가디언지에서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 로그 온' 제하의 24일자 보도처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최초로 인터넷 대통령이 그 업무를 시작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정보사회가 우리 대~한민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외부환경은 이렇게 급변하고 있건만 우리 국민들의 인식만은 여전히 대충 대충 넘어가는 것이 정겨워 좋다는 농경사회, 혹은 머리는 윗사람들만 쓰는 것이니 난 하라는 대로 할 뿐이라는 산업사회의 수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불행하게도 이번과 같은 사고는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제대로 배워 앞날을 대처한다면 온 세계에 이 경험을 전수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정보사회를 위한 귀한 교훈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새 시대를 위한 본격적인 커뮤니케이션 교육이 시급하다. 억울하게 숨져간 영령들이 우리가 제대로 분별력 있는 선택을 해내는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
필자인 박영근 대표는 전직 대학교수(신문방송학) 출신의 언론학박사로 최근 <말 통하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저서를 출간한 데 이어,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활성화를 위한 교육문화회사 '아담재(我談齋. I Communication Center)를 설립해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와 대화를 하고자 하는 독자는 eagleeyes73@hanmail.net로 연락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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