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자금비리등 정치권의 부패하고 부정직한 실상이 드러나자 각 당이 앞다투어 개혁방안을 제시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마치 유독성 폐기물을 몰래 버린 혐의로 공장장들이 검찰에 불려가자 해당업체 사장들이 나서서 환경보호 법안 강화를 주장하는 꼴이다.
개혁대상들이 벌이는 개혁경쟁은 완전선거공영제, 지구당 폐지를 넘어서서 일체의 기업후원금 폐지, 국회의원후원회 폐지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간 부패정치 척결을 앞장서서 외쳐 온 시민운동단체나 민주노동당도 감히 주장하지 못한 혁명공약 같은 개혁방안이 개혁대상들에 의해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같은 혁명적 개혁방안으로도 부패정치, 지역정치를 청산할 정치혁명은 이뤄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지구당을 폐지하면 돈 안쓰는 정치를 할 수 있는가?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된 내역만 보더라도 현역의원들의 한달 평균 정치비용은 3천만원에 이른다. 이 중에서 지구당 사무실 유지비용은 극히 적은 일부이며 이마저도 지구당 대신 생겨날 연락소나 각종 사조직 사무실 유지비용으로 지출될 내역들이다. 한달에 3천만원씩 드는 것은 지구당 때문이 아니라 다음 선거에 출마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법은 출마를 포기하거나, 지역구에 출마하지 않아도 되는 선거제도가 전면적으로 도입되는 길 뿐이다.
완전선거공영제도 마찬가지이다.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을 다투는 후보 경우 농촌 40억, 도시 30억원의 비용이 정설인 현실에서 법정선거비용으로 되어 있는 1억 2, 3천만원을 선거공영제로 하겠다는 것이 과연 돈안쓰는 정치를 만들 수 있는가?
문제는 돈쓰는 정치시스템이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정치자금법 상 규제를 강화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국정치에서 돈 먹는 하마는 지구당이 아니라 지금의 선거제도이다. 이 선거에서 1등을 하려면 지구당이 있든 없든 그만한 돈은 들게 되어 있다. 또 17일에 불과한 법정선거운동 기간 중에 30억, 40억씩 쓰는 무모한 후보가 어디 있는가? 총선 1년 전부터 한달에 3, 4억씩 쓰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이라는 것은 정가의 상식이다. 벽보용 사진을 찍는 데 3만원을 쓰는 초보후보가 있는가 하면 사진작가에게 맡겨서 300만원을 쓰는 당선권후보도 적지 않다. 선거홍보물 디자인하는 기획사에 1억, 2억씩 영수증 없이 거래하는 현실에서 선거법을 강화한 들, 선거공영제를 실시한 들 나아질 것은 없다.
돈쓰는 정치시스템의 핵심은 바로 선거제도이다. 따라서 지금의 선거제도를 바꾸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안한 ‘정당투표 대선거구제’는 돈안쓰는 정치를 위한 특효약이 될 수 있다. 광역시도와 같은 대선거구별로 각 당에서 후보자 명단을 제시한 뒤 유권자들로 하여금 지지정당을 선택하게 하여 그 득표율에 따라 각 당별로 후보자 명부 순번으로 당선자를 정하자는 것이다.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와 마찬가지로 정당투표 대선거구제와 같은 선거제도의 혁명적 변화만이 정치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 한 선거구에서 3 내지 5인 정도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는 일본에서도 고비용정치의 주범으로 폐기된 제도이다. 겉으로는 저비용정치를 외치면서도 동반당선이 보장되는 강자 독과점의 중대선거구제는 위기에 몰린 부패정치세력들의 기득권 유지방안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낮에는 서로 싸우는 보수4당이 밤에는 공존공생을 위해 밀실에서 담합하는 위장개혁정국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대상들이 참회도 속죄도 없이 응분의 책임도 지지 않고 개혁주도 세력으로 위장하는 현실을 묵과할 것인가? 도둑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길 수 없는 것처럼 개혁대상들에게 개혁입법화를 맡길 수 없다하여 제안된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는 최근 국회의장과 각 당 원내대표들에 의해 위장개혁의 들러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국회 정치개혁특위 산하의 자문기구로 설치되어 정개특위에서 합의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자문하게 한다는 것이다.
기득권 정당들이 정치적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정치개혁은 없다. 제14대, 15대, 16대 총선에서 당선된 정치신인이 40%, 46%, 48%의 높은 비율을 차지했던 사실은 인적청산, 물갈이론으로 정치개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선거제도이며 선거제도의 개혁만이 돈안쓰는 선거와 기득권 정치세력의 독과점정치를 혁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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