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올 해는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이고, 6·25전쟁 70주년이자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보훈의 역사는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라는 가치와 이를 통해 시민적, 평화적 발전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가치와 의미를 짚어보고자 <프레시안>은 보훈교육연구원과 함께 기획연재를 진행합니다. 이를 통해 보훈의 역사, 사회적 의의, 평화지향성 등을 사회적으로 함께 생각해 보고 방향을 정립해 보는 기회의 장을 갖고자 합니다. 편집자.
인간은 상징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의 인식과 감성을 공유할 수 있다고 한다. 정치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국가는 상상 속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리 작은 국가라도 구성원은 자신이 속한 국가의 국민 대부분을 알 수 없거나 만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그들이 누구인지조차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각자의 마음속에서 서로 교감할 것이다.”
이는 개인이 다른 모든 구성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라고 느낄 수 있는 공동의 정체성이 우리 정신의 근저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개개인은 상상 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교감하고, 또 그것이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로 이어주는 것일까.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라고 교감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태극기, 무궁화, 애국가, 독립, 전쟁, 민주화 운동…, 우리는 이런 단어들을 볼 때마다 대한민국 국민임을 인식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하는 대표적인 상징들과 격변의 근현대사 속에서 선인들이 겪어온 고통과 아픔을 우리는 지금도 똑같이 느낀다. 무의식 속에 자리한 이러한 상징적 이미지는 결국 애국심으로도 이어진다.
애국심 연구자인 빌링은 “애국심은 전쟁과 같은 특수한 사건에서 극적인 방식으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현대 시대에는 그러한 폭력적 상황보다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일상의 아주 사소한 상황에서 형성된다”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열렬히 국기를 흔들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고 있더라도 공공건물에 항상 휘날리는 국기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사람들의 일상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구성원을 통합하고 하나의 공동체로 이어주는 대표적인 상징물의 사례로 붉은 양귀비와 푸른 수레국화를 들 수 있다.
붉은 양귀비는 영국을 비롯해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와 같은 영연방 국가에서 폭넓게 활용되는 상징물이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캐나다 원정군으로 종군 중이었던 한 군인이 부상을 입고 야전 병원에서 치료 중일 때,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에 만개한 붉은 양귀비꽃을 보고 쓴 시 구절에 기원을 두고 있다. 어느 미국인 교수가 이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전쟁 사망자 추모의 상징으로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였고, 1921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붉은 양귀비 상징물이 제작․판매되어 제대군인과 전쟁 중에 사망한 유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으로 활용하였다. 현재 영연방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이 현충일과 앤잭(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데이에 붉은 양귀비 배지를 왼쪽 옷깃 또는 심장에 가까운 곳에 착용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영연방 국가에서는 세계 제1차 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을 ‘현충일’로 지정하고,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이 1915년 4월 25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을 기린 앤잭데이에 성대한 기념행사를 치른다. 이때 붉은 양귀비꽃을 활용한 다양한 상품이 판매되는데 행사나 묘지에 쓸 조화, 체험학습에 사용할 다양한 교육용 상품은 물론 수저와 나이프 등의 식기류, 게임용품, 커피나 맥주 등을 포함한 음료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기념주간에는 온 거리가 붉은 양귀비꽃으로 물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의 수레국화(Bleuet de France) 역시 붉은 양귀비꽃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데 제대군인, 전쟁 피해자와 유가족 등을 기리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이 꽃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화사한 꽃으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군의 푸른색 군복과 유사하여 참전 군인의 상징이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병원에서 일하던 어느 수간호사가 전쟁 부상병을 돕기 위해 화장지로 이 꽃을 만들기 시작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 1935년 프랑스는 현충일인 11월 11일에 수레국화의 공식 판매를 인증하며 매년 새로운 디자인의 다양한 상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 이영자 보훈연구원 연구원(사회복지학 박사)
유럽과 우리나라는 물론 역사적 배경이 다르고 그로 인해 파생한 보훈 문화 역시 다르다. 다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분들과 그 유가족에게 존경을 표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공통분모가 아닐까. 이 글을 마무리하며 붉은 양귀비꽃과 푸른 수레국화라는 상징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커다란 의미를 담은 상징물이지만 기념행사에만 국한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자주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여, 국민들이 거부감은커녕 자긍심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사용한다는 점이다.
둘째, 각 국가를 상징하는 국화는 아니지만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 속에서 기본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세련된 이미지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화가 엄중함이나 무거운 이미지를 갖는다면 붉은 양귀비꽃과 푸른 수레국화는 조금 더 활용의 유연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우리가 선혈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떠올리는 보훈 상징물은 대개 너무 어둡거나 무거운 이미지다. 우리도 붉은 양귀비나 푸른 수레국화처럼 역사를 기억하고 상기할 수 있는 그리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에 녹아들 수 있는 상징물을 개발하여, 우리가 그리는 상상 속의 공동체가 조금 더 화사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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