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프레시안>을 통해 소개된 산업자원부의 '전자식 전력량계 검정유효기간' 조정을 둘러싼 의사결정은 입장이 제각각인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해 긍정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사례에 대해 조현석 서울산업대 교수(행정학)가 그 의미를 짚어보는 글을 보내왔다. 조 교수는 "이번 사례가 아주 긍정적이긴 하나 이해당사자를 넘어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숙의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모델에 대한 관심이 더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편집자>
***이해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니 문제해결의 길이 보인다**
정부는 갈등관리기본법을 제정하기 위해 대통령 산하 지속가능발전위원회와 국무조정실 주관으로 지난 5월 정부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은 행정기관들이 소관 정책영역에서 안고 있거나 안게 될 공공갈등을 예방하거나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틀을 마련하기 위해 추진되는 것이다.
정부는 법 추진과 함께 부처별로 시범사업을 정해 실제 여러 가지 참여적 의사결정 기법들을 적용하도록 장려해 왔다. 최근 들어 이러한 조직적인 노력들과 정부 내외의 적극적인 분위기로 인해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된다.
산자부가 '전자식 전력량계 검정유효기간' 조정에 관해 참여적 의사결정 모델을 적용해 관련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합의를 도출하고 그 합의를 근거로 내년 초에 관련 법 시행규칙을 제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정보기술(IT)이 발전함에 따라 전자식 계량기의 기술 개선도 꾸준히 이루어져 왔는데, 1993년에 개정된 관련 법 시행규칙은 여전히 검정유효기간이 7년으로 되어 있어서 한국전력 및 전자식 계량기 생산업체들의 불만이 누적돼 잠재적 갈등을 키워왔다.
더구나 기계식 계량기의 검정유효기간은 15년으로 되어 있어서 형평성의 문제도 제기돼 왔다. 기존 기계식 계량기 생산업체 입장에서 보면 전자식 계량기의 검정유효기간이 늘어나면 기계식 계량기의 시장이 줄어들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새로운 발상과 새로운 참여적 기법의 적용으로 이러한 잠재적 갈등을 사전에 완화하여 정부와 업계 간, 업계 상호 간 협력과 신뢰의 분위기가 생성된 것은 고무적이다. 갈등상황이 누적돼 정부와 업계 간 불신이 쌓이고 결국 불만을 가진 업계가 항의나 시위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일 수도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번 일은 큰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기존 정책결정 한계 보완하는 새 '참여적 의사결정 모델' 실험**
정부의 법령 개정이나 제정은 하향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전형적인 방법은 관할 정부기관이 전문가나 주요 이해당사자로부터 의견을 듣고 개정안을 만들어 입법예고를 하고, 입법예고 기간에 들어온 의견을 참조해 개정안을 확정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청회나 토론회가 열리기도 한다.
이 과정을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해당사자들은 의견을 제출하도록 요구받을 뿐이지 정부부처와 대화를 할 기회를 갖기는 어렵다. 힘이 있는 이해당사자들은 비공식적이지만 해당 관료들과 대화하거나 협의할 기회를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모든 이해당사자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갈등이 크게 부각되지 않으면 이런 방식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갈등이 첨예하게 걸려 있는 경우 이런 방식은 이해당사자들의 불만을 유발하고 집단 간 갈등을 낳을 수 있다.
산자부가 이번에 적용한 방식은 이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미국에서 1990년대 초반 이후 활발히 시행하고 있는 '규제협상(regulatory negotiation)'을 모델로 한 것이다. 약간의 변형을 가했다고 보이지만 기본적인 원칙과 과정의 설계는 규제협상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산자부가 얻은 성공적인 참여적 의사결정의 의의를 살펴보자.
우선 이해당사자 간 협의 혹은 협상에 의거해 합의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법령개정을 함으로써 법령개정에 수반될 수 있는 이해갈등의 발생소지를 최소화했다. 이러한 성공으로 정부와 업계 사이, 혹은 서로 다른 업계 간 상호대화와 신뢰의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것도 긍정적이다. 상호학습을 함으로써 앞으로 생길 수 있는 갈등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제도와 문화는 산자부의 다른 업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며, 점진적으로나마 정부 전체로 적용이 확산되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참여적 의사결정의 시도, 학습, 그리고 제도화 노력을 기울여 나가는 데 있어 이번 성공에 자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술관료제'와 '다원 민주주의'의 한계 극복할 수 있을까?**
필자는 정부의 정책결정이나 사회적 합의 형성에 시민사회나 이해당사자들을 관여 내지 참여하도록 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세 가지 큰 범주로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각 방법에 내재되어 있는 정당성이나 효과성을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우선 입법예고제나 공청회와 같이 정부가 시민사회나 이해당사자들을 단순히 협의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의견을 듣거나 정보나 지식을 입력받는 방식이 있는데 필자는 이것을 '협의모델'이라고 부른다. 우리 정부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이것은 전문성과 정부관료의 배타적 권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술관료제(technocracy)의 이념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주로 이해당사자들의 의견과 이익 투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방법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이익집단의 대표들과 정부대표가 참여하여 협상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에서 합리적 토론 및 타협을 통해 합의형성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이번에 산자부가 적용한 방식인데, 필자는 이런 방식을 '협상모델'이라고 부른다.
합리적 기준을 만들어 의견차이를 조정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다른 방식이 가미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것은 이해관계의 타협과 협상에 기초해 합의를 추구하는 참여적 의사결정의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의 새로운 점은 이해당사자들이 같이 모여 대화하고 토의한다는 점이다. 이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내세우는 데 있어서 합당한 근거와 원칙을 다른 참여자들에게 설득해야 하는 부담을 서로 갖게 되므로 떼를 쓰는 일이 자제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눈여겨 봐야 할 측면은 정부가 민간 이해당사자들과 같이 결정권한을 나누어 갖는 상황이 생기게 되는 점이다. 정부가 권한을 상당히 내놓는 일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가능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번 협상에 의한 규칙개정 방식은 상당히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식에서도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특히 이 방식에 내포돼 있는 다원 민주주의적 이념은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제시한다. 각각의 이익집단 사이의 힘의 역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다원 민주주의를 내세우다 보면 강력하고 잘 조직된 이익집단이 정책결정 과정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규제협상'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숙의모델'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또 다른 모델을 생각할 수 있다. 필자는 이것을 '협의모델'이나 '협상모델'과 구분해 '숙의모델'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회에서도 목격되고 있는 일이지만 점점 더 많은 국민들이 일 잘 하라고 뽑아놓은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부 관료들도 여전히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고 낡은 지식을 가지고 구태의연하게 일을 추진한다고 느낀다. 더 나아가 강력한 이익집단들의 목소리가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에게 여전히 더 잘 먹힌다고 느낀다.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대의제 정치제도와 기술관료제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민주주의와 정부구조의 한계에 대한 진단과 처방 이론으로서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가 최근에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숙의 민주주의란 평범한 시민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참여와 토론을 통해 도출된 건전한 판단이 정부정책 결정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념이다. 숙의적 의사결정 모델이란 기본적으로 숙의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적 설계를 말한다. 이것은 대표성이나 포괄성을 고려하여 선정된 15~20명 정도의 시민들이 토론과 숙의 과정을 통해 도출한 건실한 판단을 기초로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식으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합의회의'나 '시민 배심원제'가 그 예가 될 것이다.
숙의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은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에서 정부나 이해당사자들보다는 시민들이나 시민사회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시민들 간의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토론을 통해 좋은 결정을 할 수 있고 또 적극적인 시민의식을 함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해당사자들이나 전문가들이 자신들이 가진 의견, 입장, 정보, 지식들을 시민들의 숙의과정에 투입할 수 있는 절차도 제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숙의적 의사결정 모델에 대해 학계 일각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학문적 논의가 있어 왔지만, 정부 심지어 시민사회 쪽에서는 그 현실적 적용을 매우 낯설어 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물론 직접 민주주의 이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거대한 현대사회에서 현실적으로 가당치 않는 일이다. 숙의 민주주의도 이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현실의 대의제 정치행정 제도가 갈수록 무능력해지고 정당성도 약화돼 가는 현실에서 숙의 민주주의는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안고 있는 문제나 정부의 시스템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에 숙의 민주주의 모델의 현실적 적용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지역사회나 정부의 정책결정에 이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2004년에 여러 정부기관들이 200회 이상 '시민배심원제'를 적용해 정책결정에 도움을 받았다. 대만의 경우도 2000년 이래 민진당의 주도로 정부, 지방정부, 지역사회 주관으로 많은 정책이슈에 이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뿐만 아니라 대만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도 숙의 민주주의 시도들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부분은 눈여겨볼 만하다.
우리 정부가 최근 들어 참여적 의사결정 내지 시민참여를 장려하고 있지만 다양한 참여적 의사결정의 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적, 이론적 차이나 장단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더구나 숙의 모델의 경우 이것의 적용을 상당히 기피하고 부작용을 우려하는 분위기도 여전히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산자부의 이번 시범사업 성공은 그 자체로는 물론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하지만, 협상모델이 참여적 의사결정의 전범으로 간주되는 일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일반 시민들이 정책결정에서 소외되는 일은 여전히 계속될지 모른다. 갈등관리기본법의 제정에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성찰과 토론이 충분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시민과학센터의 주도로 지금까지 총 3차례에 걸쳐서 '숙의모델'의 대표적 예인 '합의회의'가 1998년, 1999년, 2004년에 적용된 바 있다. 특히 2004년 시민과학센터가 주최하고 <프레시안>, 과학문화재단 등이 후원한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 합의회의'는 일반 시민들이 수개월 간의 숙의를 통해 "신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전면 중단하고 재생가능 에너지를 확대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아 크게 주목을 받았다. 당시 합의회의의 전 과정은 <프레시안>의 관련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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