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어두운 강가에 서서 밀항하듯 탈영하듯 떠나야만 하는 시간이다. 수없이 건너 왔던 강을 또 혼자 건너야 한다.
수심을 알 수 없는 저 어두운 강에 몸을 던져야 이 강을 건널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가. 이제 저 강은 나를 건네줄 수도 있고 내 생명을 앗아 갈 수도 있다.
이 슬픔과 두려움에 아랑곳없이 나는 다만 깊고 어두운 천성의 강에 던져지는 자맥질일 뿐이다.
(지율, '깊고 어두운 강가에서', 〈초록의 공명〉, 삼인, 2005, 102쪽)
이것은 지율이 2004년 11월 경 4차 단식 중에 쓴 시다. 이 시에는 자기 운명과 정면으로 마주선 한 인간의 무서운 고독과 어떠한 감상(感傷)도 허락하지 않는 우주의 냉엄한 이치 앞에 한낱 티끌에 불과한 존재로 자기를 인식한 영혼의 경쾌함이 묻어난다. 온몸으로 자신의 삶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강인함과 연약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꺼져가는 육신 속에 깃든 명민한 그의 영혼은 지금쯤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세상의 눈으로 보면 지율은 "폭풍우 치는 바닷가에 서 있는 무너지는 판잣집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118쪽) 이 운명을 아는 데 그의 인간적 존엄과 기쁨, 괴로움이 자리한다. 천성산이 아니었으면 지율은 자기 안의 아주 내밀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들키지 않고, 몰이해와 오해, 침묵의 대상이 되는 수모를 겪지도 않으면서 그럭저럭 수행의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율은 "이 땅의 운명에 천성산이 깊이 조우하고 있다"(53쪽)고 느꼈고, 그래서 숲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율은 천성산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 몰랐던 세상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천성산은 그가 진리에 이르는 문이었고, 그가 사랑한 세상의 아픔이었다. 지율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천성산의 아픔과 너무도 깊이 결합되어 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보고 있으며, 천성산을 통해 이 시대의 역사를 쓰고 있기에 한 순간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미래를 위한 우리의 선택', 116쪽) 불이 난 천성산에서 화엄벌이 자신을 태워 천성을 지켰던 것처럼, 온전한 운명 속에 스스로를 태우고 이 땅을 지키기 위한 길을 걷는 것은 종교인으로서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지율의 이 저돌적이고 무모한 사랑의 방식 앞에 우리는 모두 당황하고 어리둥절했다. 전국토를 파헤치고 뭉개서 원래 이 땅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인가. 개혁에 대한 민중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출범한 정권이 바로 그 기대를 무기 삼아 '지역균형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과거 어떤 독재정권 못지않게 개발을 밀어붙이고, 전국토를 골프장화하며, 기업농 육성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농민들을 농토에서 내몰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어디 천성산만 산인가. 천성산보다 더 크고 유명한 지리산, 설악산도 길을 내고 터널을 뚫어 이 땅의 산과 들이 온통 몸살을 앓고 있는데, 유독 세상에 생명이라고는 제 자식밖에 없는 듯 천성산 하나 붙들고 굶어 죽겠다고 저러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상식적으로, 공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의 악령이 전 지구를 제 손아귀에 휘어잡아 뒤흔들고 있는데 자기 혼자 굶어서 자본주의를 멈출 수 있다는 듯한 그 무모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는 일들을 이제 막 눈을 뜬 지율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보고 겪었던 모든 일들이 지금 이 사회에서는 늘상 있어 왔던 일이며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 그가 물러서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그는 바다를 바다로 보고, 산을 산으로 보고, 도롱뇽을 도롱뇽으로 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율 편에서 말하자면, 그는 우리 모두의 긍정적인 미래를 위해 '이것은 아니다' 싶은 것들과의 싸움을 자연스레 실천했을 뿐인데, 달리 생각해볼 수 없는 그 평범함이 오히려 극단적으로 보이는 세계에 지금 그가 놓여 있을 뿐이다.
그는 적당한 타협이 능력이 되고 윤리가 되어버린 이 사회를 견딜 수 없었다. 왜냐하면 "원칙을 버릴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가난한 이론들일 뿐이기" 때문이다(54쪽). 지율은 이렇게 말한다. "천성산 문제를 통해 제가 느끼는 본질적인 문제는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거짓되고 박명한 사랑으로, 그 본질은 이 사회 권력의 구성원들이 공익과 다른 사람의 아픔에 도덕적으로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 적당한 권모와 술수가 정치적인 능력으로 인정받는 이 사회에서 도덕적 감수성은 한번쯤 앓고 아물어 버리는 생채기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도덕적 감수성과 선에 의지할 수 없다면 모든 종교와 법과 철학, 예술과 인문학은 이 사회에서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139~140쪽) 지율의 이 천진한 물음 앞에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지율이 불편한가**
지금 우리는 뼈만 남은 지율의 기괴한 모습 앞에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었다. 나를 보지 말고 천성산을 봐달라고 지율은 말하지만, 지율의 연약한 몸뚱이에 가려 우리에게는 천성산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도, 언론도 모두 두 손 놓고 언제 죽을지 그의 죽음만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는 침묵과 무시를 대책으로 삼은 것 같고, 언론은 피골이 상접한 지율의 몸뚱이에만 관심이 있다.
이렇게 될 것을 지율은 몰랐을까. 싸움의 이기고 짐과 상관없이 이런 방식으로밖에 풀 수 없는 필연성이 그에게 분명히 있었을 텐데, 정말로 그것을 이해하고 싶었다. 지율의 싸움의 방식을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저렇게 풀지 않으면 현대 문명의 위기를 타개할 수 없으리라는 깊은 인식, 아니 예감 같은 것을 나는 느낀다.
진보를 내세우는 한 일간지의 논설위원은 지율을 박근혜와 비교했다. 지율의 단식이나 박근혜의 사학법 개정 반대 투쟁이나 둘 다 극단적인 방식의 투쟁이고, 근본주의라는 점에서 둘은 같다는 것이다. 스스로 '진보'이고 싶은 자가 이 시대에 붙들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경제성장과 개발의 망령이 인간적 존엄성과 자율성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파괴하는 이 시대에 진보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경제성장주의, 개발지상주의를 거부하고 인간적 존엄성과 공동체적 생명의 근원적 가치로 돌아가는 일이다.
지율과 박근혜는 그 가치를 중심에 두고 서로 정반대편에 마주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둘 사이의 차이는 보이지 않고, 지율이 주는 불편함만 태산처럼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지율의 싸움의 방식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을 백번 인정한다 하더라도, 만일 이 시대 진보가 지켜야 할 가치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런 방식으로 비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근본주의에 있지 않고, 근본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황우석의 얼굴을 내세우며 우리와 닮지 않았냐고 외치던 〈한겨레〉의 제2창간 구호를 기억한다. 황우석을 제2 창간의 마스코트로 내세우는 것과 지율을 박근혜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일관성이 있고, 그 일관성은 이 시대 진보를 일정 부분 대변한다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볼 수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그들에게는 노무현과 박정희의 공통점보다 박근혜와 지율의 공통점이 더 크게 보이는 모양이다.
노무현식 신자유주의의 토건국가 프로젝트보다 지율의 천성산 투쟁이 그들의 눈에는 더 큰 걸림돌로 보이는 모양이다. 물론 지율은 지금 모든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이 시대의 진보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불편함이다. 끌어안고 함께 지고 가야 할 불편함이지 버리고 갈 불편함이 결코 아니다. 진보의 자격은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에 있고,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가장 먼저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진보의 능력이자 자격이기 때문이다.
***지율, 파시즘의 폭력 앞에 서다**
지금 인류는 자신이 이룩한 성장과 발전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성장과 발전은 합리주의의 산물이다. 지율은 지금 그것을 공격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 모두에 대한 공격이다. 지금 진보든 보수든 지율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치 경제주의, 합리적 실용주의, 효용주의에 사로잡혀 포로가 되어 있다. 지율은 지금 그런 세계관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지율을 보기만 해도 약이 오르고 화가 난다. 현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과학 기술과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너무나 깊이 길들어 있고, 근대의 이성적, 합리주의적 사고에 길들어 있기 때문에 지율이 그 모든 것을 까발릴 때 견딜 수 없어 한다.
특히 오늘 우리 사회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경제발전을 이루고 국력 신장을 이루었으며, 선진국 진입의 꿈에 부풀어 있다. 다들 살만하게 되었다고 느낀다. 이제 과거 식민지, 약소국으로서의 경험은 잊고 선진국, 강대국 대열에 진입한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 이처럼 약소국이었다가 갑자기 국가적 힘을 느끼는 시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파시즘적 국가주의다. 독일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성에 근거하며, 국수주의적 자기우월감과 생명에 대한 혐오감을 특징으로 한다.
황우석 사태나 안티 지율 집단의 인터넷 댓글 같은 데서 나타나는 폭력성은 우리 사회에도 파시즘적 국가주의 사고에 물든 사람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폭력적 국수주의는 후기 산업사회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가벼움과 결합하여 감각적 이기주의와 찰나주의에 빠진 얼굴 없는 대중을 양산한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자살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들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으며, 이들은 근본적으로 남에게 무관심하고 냉혹하다.
이들에게 지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캄캄 절벽이다. 이제 살만하게 되었는데, 이 안락한 잠을 깨우는 지율이 짜증나고 화가 날 뿐이다. 소극적으로는 이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고, 공격적으로는 국가주의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니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요지다. 경제발전은 이들이 내세우는 국가주의의 실질적 내용이다. 그래서 '경제발전'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이자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때려잡는 몽둥이다.
그들이 보기에 지금 지율은 자기가 친 그물에 자기가 걸려든 바보겠지만, 그들을 향해 지율은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의 그물에 걸렸다고 저를 향해 비아냥거리지만 저는 그물에 걸리지 않고 잘 살고 있는 그들을 경멸하지 못합니다. 다만 저는 그들이 저를 그들의 그물에 가두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 영혼의 자유로움에 손대지 않기를. 그것이 제가 가진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134쪽)
우리 사회가 처한 위기는 누군가 밖에 있는 적을 상정하고 적을 깨부수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져야 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과 싸움의 양식을 발견하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지율은 이 점을 온몸으로, 자기 살과 뼈를 불태움으로써 보여주고 있다. 지율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에게는 외부의 적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반생명적 죄악과 탐욕을 불태우고 깨뜨리는 것이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뼈마저 오그라드는 듯한 지율의 몸은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폭력, 증오와 분노, 허영과 게으름, 위선을 드러낸다. 사랑의 결핍을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척박하고 좁은 가치관과 세계관에 매달려 있는가를 드러낸다. 이 점에서 지율의 싸움은 단순한 사회투쟁이 아니며, 세계관이 바뀌고 삶의 근본으로 돌아가기 위한 진통이다. 지율은 전태일만큼 위대하며, 전태일보다 심오하다.
***지율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
지난 주 병실에서 지율을 만났을 때 삶에도, 죽음에도 속하지 않는 28kg의 육체는 내가 알지 못하는 범주에 속했고, 아득히 먼 별에서 온 외계인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편안히 슬픔에 빠져들기에 앞서 이런 육체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나를 향해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합장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무언가 간절히 공명(共鳴)하기를 원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외계인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참새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고 했고, 그 동안 즐겁지 않았으면 이렇게 싸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도 했다.
천성산에 대한 그의 집착이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지율은 천성산 일을 하면서 돌아나갈 길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번 단식의 경우도 우리는 지율이 단식을 그만둘 이유를 만들어줄 수 없고, 지율은 자신이 택한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천성산과 맺은 그의 모든 인연이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세상이 빛으로 왔던 것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감사는 슬픔과 분노 속에서도 그의 마음 속에 오롯이 남아 있는 고요였고, 그 고요함 속에서 그는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바쳐 우주로 돌아가려 한다.(至心歸命來)
그리고 지율은 슬퍼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자칫 분노로 인하여 상처받은 마음을 다른 곳에 함부로 옮겨 놓은 것은 아닐까. 저를 염려하는 많은 분들은 제 단식도 그러한 분노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듯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이야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제 사랑이 머무는 곳에' 있다는 것을. 저는 이 사랑 속에서 제 자신의 가난과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 사랑을 실천하여 가는 데 장애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산의 침묵 때문에 산의 아픔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저들이 가진 98퍼센트의 힘보다는 제가 가진 2퍼센트의 작은 힘들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113쪽)
지율은 그의 사랑이 머무는 곳에 지금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율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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