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이름만큼은 낯설지 않았다. 너무나 자주 들었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는 한국 마라톤의 침체기였다. 세계 기록과도 한참 거리가 멀었다. 마라톤대회가 끝날 때쯤이면 스포츠 캐스터는 늘 이렇게 말했다.
"네∼ 안타깝습니다. 문흥주 선수의 한국 신기록을 올해도 깨지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10년씩이나 반복해 들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 선수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지만.
마치 여자 마라톤의 권은주나 남자 100m의 서말구 같은 존재였다(서말구의 기록은 1979년 이후 28년째, 권은주의 기록은 1997년 이후 10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사람은 가도 기록은 남는다. 그가 정식 마라토너로 활동했던 기간보다 더 오랫동안 그의 이름이 불렸던 것도 바로 한국 최고기록 보유자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왕년의 한국 최고기록 보유자였던 문흥주 씨가 마스터스로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무척 궁금했다. 그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서울 송파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동아 마라톤이 끝난 직후였다. 대회에 출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선 기록부터 물어봤다.
"44분 나왔어요."
"3시간 44분요?"
"아니, 2시간 44분."
깜짝 놀라서 다시 한 번 물어봤다. "올해 연세가…?"
"1948년생, 우리 나이로 올해 60이지."
아무리 선수 출신이었다고 하지만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에 2시간44분대를 뛴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한국 최고기록 10년간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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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흥주 씨는 전라도 광주가 고향이다. 그 당시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찢어지게 가난했다. 웬만큼 돈 있는 집이 아니면 공부를 해도 상급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시절 개교기념일에 열린 단축마라톤대회에 참가, 전교 1등을 하면서 스스로 마라톤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없어 농사일을 도왔다. 하지만 마라톤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기 때문에 손기정 선수처럼 훌륭한 마라토너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혼자 논둑길을 뛰어다니면서 연습을 했다.
1970년 광주에서 열린 3·1절 단축마라톤 20km 부문에 출전, 3등을 차지했다. 이로 인해 전국체전에 전남 대표선수로 출전할 수 있게 됐다. 전남도청에서는 전국체전에서 10등 안에 들면 직장을 주겠다고 했다. 그 대회에서 7등을 했다.
전남도청에서는 약속대로 무등경기장 관리인이라는 직장을 선물했고, 조대부고 야간부에 적을 두고 운동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4년여 후 새롭게 입학한 늦깎이 고등학생이었지만 육상부가 있었기 때문에 코치로부터 체계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아마라톤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고, 기록도 상위권에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에 진학했다. 대학교 시절은 그의 전성기였다. 1학년 때 동아 마라톤에서 2등을 했고, 1974년 제45회 동아 마라톤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그의 우승 기록이 2시간 15분 16초의 한국 최고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1984년 이홍렬 선수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무려 10년간 한국 최고기록으로 남았다. 다음해인 3학년 때 제46회 동아 마라톤에서 다시 우승, 2연패를 달성했고 4학년 때는 2등을 차지했다. 한 마디로 문흥주의 전성시대였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마라토너였던 문흥주는 대학 졸업과 함께 미련 없이 마라톤을 그만두었다. 당시 실업팀도 몇 개 없었고, 세계 수준과도 격차가 많이 났기 때문에 마라톤을 계속한다고 해도 경제적으로 아무런 보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곤 목포와 함평에서 7년간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한국 최고의 선수도 당장 먹고살 걱정부터 해야 할 정도로 한국 마라톤의 환경은 열악했다. 7년간의 교사 생활을 끝내고 1984년 다시 마라톤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선수가 아니라 지도자였다.
1984년 국군체육부대 코치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 이후 2005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20년 이상을 한 곳에서 선수들을 지도했다. 그의 자리를 물려받은 후임자가 바로 이의수 감독이다.
국군체육부대를 맡으면서 수많은 선수들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마라톤 선수 중 군대를 간 선수들은 모두 그의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재룡·백승도·김이용 등은 물론이고, 마스터스로 활동하고 있는 위아의 이동길 등도 국군체육부대 시절 그의 제자였다.
마스터스로 새출발
20년 지도자 생활을 했지만 직접 달리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은퇴 후 다시 달리기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바로 건강 때문이었다.
"은퇴하기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혈압이 높다고 나오더라고. '나도 운동을 좀 해야겠구나' 생각했어요."
달리기 위해 처음 문 밖에 나섰을 때는 여느 초보 마스터스와 다르지 않았다. 100m 달리기도 쉽지 않았고, 석촌호수 한 바퀴(2.5km)도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없었다. 한 달 정도 연습을 하자 석촌호수를 2∼3바퀴 돌 수 있게 됐다.
"그래도 내가 문흥주인데 이렇게 못 뛴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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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15%밖에 올라오지 않았는데 마음은 벌써 40∼50%에 가 있었다. 몇 달 안 가서 몸이 고장나고 다리 근육이 여기저기 아파오기 시작했다. 30년간 운동을 안 했는데 젊을 때 생각만 하고 뛰었더니 몸이 망가진 것이다. 다시 천천히 훈련량을 조절하며 적응 기간을 늘려갔다.
몸이 어느 정도 만들어진 후부터는 마스터스로서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 매년 25회 정도 마라톤대회에 나가고 있다. 봄에 동아 마라톤, 가을에 중앙 마라톤 등 두 차례 풀코스를 달리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하프코스에 출전한다. 마스터스로 처음 출전한 풀코스 대회에서 2시간50분대를 뛰었고, 다섯 번째인 올해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44분52초를 뛰었다. 하프코스는 1시간18분대를 뛴다.
요즘은 부자(父子) 마라토너로도 유명해졌다. 수원시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병승 선수가 바로 문 씨의 둘째 아들이다. 부자가 함께 동아마라톤에 출전한 적도 있다. 아들은 아직 30년 전의 아버지 기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평소에 술·담배도 즐긴다. 술·담배를 끊으면서까지 마라톤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거 다 하면서 건강해지려고 마라톤 하는 거니까.
"난 마라톤이 참 좋아요. 술·담배도 많이 하니까, 건강관리 차원에서 계속 운동을 해야죠. 기록? 그런 거 욕심은 없어요."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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