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유는 바로 35미터 크레인, 그 위에 참새나 비둘기도 아닌 사람이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솜털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날품팔이를 하고, 미싱을 밟다 버스안내양으로 다시 버스 발판을 밟았던, 그러다 배 만드는 용접공이 된 어느 가난한 늙은 여성노동자가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한진중공업이 더 싼 인건비를 위해 수주물량을 바다 건너 필리핀 수빅조선소로 몰아주며 수천 명의 노동자를 내쫓았고, 그 노동자들이 '일터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고의 칼날에 죽고 싶지 않다는, 살겠다는 처절한 외침이 그다지도 잘못한 일일까요. 경찰은 그 외침을 함께 외치겠다고 모인 2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향해 철옹성을 쌓아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 해산을 통보했습니다. 절망의 나라로 내쳐진 아픈 마음들이 85호 크레인 앞에 모여 춤추고 그림 그리며 희망을 노래하겠다는 것이 어찌 불법이란 말인가요.
이윤이 사람보다 먼저인 이 땅에서 감히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고 요구한 죄로, 그리고 그 외침을 같이 한 죄로, 그날 밤, 하늘엔 시퍼런 최루액 물대포가 솟구치고 독가스가 살포되었습니다. 숨을 꾹 참고 최루가스 속으로 뛰어들어 철옹성을 넘어설 벽돌을 옮기고, 물대포가 발사되면 너덜너덜한 피켓 한 짝 방패 삼아 간신히 몸을 피했습니다. '한 번 쏟아버린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지만 한 번 해고된 노동자는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다'고 정성스레 그림을 그리고 채색까지 했던 피켓은 넝마조각이 되었습니다. 자본은 최루액으로 그림과 글을 지우며, 정말로 한 번 쏟은 물을 담는 것과 비할 바 없이, 해고된 노동자가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처절한 것인지를, 두 눈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밤새 최루액 범벅이 되어 화학화상으로 화끈거리던 온몸은 다음 날 내리쬐는 뙤약볕에 또 한 번 새카맣게 타버렸습니다. 최루가스에 눈물범벅이던 눈꺼풀은 이틀을 지새운 노곤함에 눈물조차 말라붙어 스르르 감겼습니다. 그렇게 85호 크레인을 남겨두고, 이제 최루액도 최루가스도 맞을 일 없고 거리에서 밤을 지새울 필요도 없는 일상으로, 나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흙탕물과 최루액으로 얼룩진 옷을 세탁기에 넣고, 운동화를 씻어냅니다. 냄새나는 신발에서 시커먼 흙탕물과 푸르뎅뎅한 최루액물이 차례로 빠집니다. 그런데 솔로 문지르고 또 문질러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있었습니다. 여느 공장에서 태어났을 그 평범한 신발에 고인 푸른빛 핏물은, 어느 이름 모를 노동자가 흘린 피땀이었습니다. 신발 한 켤레도 노동자의 손을 거쳐야지만 비로소 내게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배를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조남호 회장의 손에 174억 원의 주식배당금이 버젓이 쥐어졌습니다. '조선 강국'이라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조선소 노동자들의 눈물과 땀이 배어 있으며, 또 얼마나 죄 없는 주검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지 그가 알기는 할까요. '누가 거북선을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이 이순신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이었다고 대답하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까요. 얼마나 더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어야, 얼마나 더 많은 해고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되찾기 위해 죽음을 무릅써야, 이 싸움을 멈출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러나 침묵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그래서 이 처절한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는 것도 결국 '우리'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노동권을 탄압하고 불안정한 삶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벽은 그 자체로 절망일 수 있지만, 그 벽 앞에서 좌절하기 때문에 절망의 벽이 되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혼자서 싸우면 절망의 벽이 되기 쉬우나, 우리가 모이면 그 벽은 희망의 노둣돌이 됩니다. 저 85호 크레인 위에서 '손짓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더 큰 오작교를 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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