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함께 활동했던 동료 김주익 지회장이 한진중공업 자본의 막가파식 노무정책에 맞서 선택했던 곳이 바로 85크레인이었다. 김주익 지회장은 129일 만에 주검이 되어 85호 크레인을 내려왔고, 곽재규 조합원은 도크바닥에서 주검이 되어 올라왔다.
김주익 지회장과 곽재규 조합원을 잃고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크레인에 오르면서 남긴 글 속에 김주익, 곽재규 형님을 보내고 마음고생을 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주익이를 잃고 7년 만에 처음으로 보일러를 넣고 잠을 잤습니다…"
그녀가 오른 85 지프크레인 밑은 정신없이 분주했다. 흥분한 노동조합 간부들이 그녀를 끌어내리기 위해 굳게 잠긴 크레인 철문을 발로 차고 난리법석을 떨었고, 걱정이 앞서 달려온 조합원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 크레인에서 손을 들어 보이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모습 ⓒ민주노총 부산본부 제공 |
2011년 6월 27일의 기억
2011년 6월 27일 오후 1시였다. 법원은 행정대집행이라는 명목으로 용역 깡패를 앞세우고 한진중공업을 침탈했다. 행정대집행이 있다는 소식을 먼저 접한 어용노조 간부들은 회사에 굴욕적 합의를 요청했다.
그들의 머리에는 아수라장이 되고 있는 85호 크레인이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도망갈 생각뿐이었다. 어용노조 간부들의 손은 회사 사장의 손을 맞잡고 만세를 불렀고, 85 크레인에서는 노동자들의 절규가 조선소 밤바람을 타고 전국으로 펴져 나갔다.
용역들이 철 계단에서 쇠사슬과 벨트를 동여매고 온몸을 묶고 있는 조합원들을 갈기갈기 찢어내면 경찰은 공장 밖으로 내몰았다. 마지막까지 항거한 조합원 20여 명이 85크레인 중간에서 경찰, 용역들과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본인 의사와는 무관하게 크레인 위로 밀려온 조합원들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정투위) 대표였던 나는 동지들을 모았다.
"지금부터 우리의 상황은 옥쇄 투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끝까지 이곳을 사수하겠다고 결단이 서면 이곳에 남고 나머지는 내려 보내겠습니다."
눈치를 보는 모습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지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나는 다시 동지들에게 말했다.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내려가는 동지들은 또 다시 밑에 있는 정투위 동지들과 함께 투쟁을 하면 됩니다."
최종 8명이 남고 나머지 동지들은 다 내려 보냈다. 내려가는 동지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때부터 자본과 경찰의 태도는 돌변했다. 85크레인 탈환 작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공포의 나날이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많은 동지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다시 회의를 했다. 4명을 빼고 나머지 동지들은 내려가기로 했다. 끝까지 남겠다고 하는 젊은 동지들이 있었지만 설득해 내려 보냈다.
4명의 사수대는 김진숙 동지와 모든 상황을 공유하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죽지 않고 이 투쟁을 승리하자고 약속하면서 두 가지 임무를 결의했다. 용역과 경찰의 침탈에 끝까지 항거하는 것과 김진숙 지도위원을 지키는 것이었다.
85호 크레인 사수대의 임무
경찰과 용역의 움직임은 사수대 동지들의 피를 말렸다. 소방용 매트리스를 깔기 위해 85크레인 밑에 소방차가 접근하고, 지게차와 50톤짜리 타이어 크레인까지 동원되었다.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볼트와 물통에 오줌을 넣어 던지는 정도였다.
신동순 동지는 몸을 던져서 그들을 막으려 했다. 벨트에 몸을 묶고 개조한 지게차 위에 뛰어 들어 운전을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만 했다. 김진숙 동지는 난간에 올라가 떨어지겠다고 맨발로 난간위에 섰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수대는 김진숙 동지를 말리기 위해 울분을 토했다.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그래서 사람이 죽는구나, 상황이 사람을 죽게 하는구나, 피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구나…
하루가 지나고 잠시 공백 기간이 있으면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정말 이러다가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가족을 떠올리면 미칠 지경이었다. 시골에서 생활하는 부인과 아들, 딸이 아버지를 보기 위해 부산에 올라왔다.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도로 건너편에서 하루 종일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되돌아가야 했다.
유서를 남기고 올라온 형님
정홍형 동지는 어떤 말을 해야 아이들이 아빠 걱정을 하지 않을까 고심하더니 크레인 위는 괜찮다며 환하게 웃으면서 전화를 끊고 눈물을 쏟아냈다. 영제 형의 형수도 학교일을 마치고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형님 얼굴을 먼 곳에서라도 보기위해 왔다가 돌아갔다.
동순 형님은 형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여기 올라오면서 남긴 글이 ○○○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죽음을 작정하고 올라온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와 경찰은 대응 방식을 바꾸었다. 고사작전으로 나온 것이다. 먹는 것과 자는 것, 보는 것과 씻는 것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전쟁 포로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줬다.
신동순 형님이 회사의 작태를 막겠다며 목숨을 걸었다. 우리는 반대했지만 동순이 형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죽겠다는 각오였다. 단식 30일을 넘기면서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불안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사람이 죽겠다는 데도 회사와 경찰의 고사작전은 변함없었다. 사수대 동지들의 심신도 한계점에 봉착해 갔다. 죽기 아니면 살기를 선택할 수밖에 상황까지 몰고 가고 있었다. 동순이 형은 단식 40일 만에 의식을 잃고 119에 실려 내려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투쟁만큼 힘든 것은 없다. 정투위 동지들도, 내부도 혼란에 빠졌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는 다시 결의를 다졌다. 끝까지 버틴다. 그리고 최종 85 크레인 침탈작전이 결행되면 우리는 모두 100미터 높이의 붐대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결사 항전한다.
바로 이 때 우리를 지탱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바로 2차와 3차 희망의 버스였다. 어려울 때마다 송경동 시인에게 전화를 해서 희망의 버스에 얼마나 오는지를 물었다. 조직이 되고 있다는 말만 들어도 사수대는 힘을 얻었다.
그 힘은 차츰 희망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회사와 금속노조 교섭 자리에서 그 결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회에서도 희망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희망의 버스에 탑승했던 연대의 힘이 그 결실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지면서 85크레인 사수대는 다시 희망을 잡을 수가 있었다.
고공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희망의 버스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니 생명의 끈이었다. 비록 85크레인까지 접근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희망버스가 온다는 소식만이라도 너무도 큰 힘이 되었다. 희망버스가 한진중공업 자본에게는 무서운 괴물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생명이었다.
| ▲ 3차 희망버스 참가자들. ⓒ프레시안(최형락) |
희망버스는 조직화된 단체나 노동조합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양심과 진보적 사고, 옳음에 대한 판단과 실천이 결합된 자발적 참여 방식이었다. 그 힘은 엄청났다. 복지부동인 국회를 움직이게 했고, 노동자뿐만 아니라 양심적 정치인, 종교인, 예술인, 학생, 농민 등 민심을 움직이게 했다.
희망의 버스 1년이 지난 오늘, 벌금으로 희망의 버스에 함께 했던 이들의 발목을 잡으려 하고 있다. 그래서 '돌려차기'라는 맞불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 투쟁의 핵심은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희망의 버스를 타고 쌍용자동차로 향하는 것이다.
제 2의 희망버스가 서울과 평택 거리를 점령하고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와 무급휴업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현장으로 돌려보낼 때 22명의 희생자들의 영혼에게 산자들이 최소한의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월 19일 우리가 희망의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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