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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기록과 기억을 고문하는 국정원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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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여전히 기록과 기억을 고문하는 국정원을 고발한다

[기고] '박현채 전집'의 발간에 부쳐

1924년 존 에드거 후버는 29살의 나이로 미 FBI 국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 48년 동안이나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미 FBI를 지배했으며 동시에 8명의 미 합중국 대통령과 미국인들을 지배한 전설의 사나이가 되었다. 대통령이 새로 들어설 때마다 비대한 음지의 권력을 행사해 온 후버는 제거 대상 1호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후버는 새 대통령을 독대하러 백악관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는 봉투 하나를 챙겨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백악관을 나올 때 그는 늘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었고 곧바로 백악관은 후버의 유임을 발표했다. 그 봉투 속에는 새 대통령이나 대통령 부인의 혼외정사를 입증하는 사진 또는 녹음테이프가 들어 있거나 대통령을 협박하기에 충분한 극비정보가 들어있곤 했다는 얘기다.
  
  후버의 사례는 한 나라의 정보기관과 정보기관의 수장이 어떻게 빅브라더가 되어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아주 작은 단편에 불과하다. 여담이지만 2권의 존 에드거 후버 평전을 우리말로 번역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검사로서 중앙정보부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고 고문 전력 시비가 늘 붙어다니는가 하면 묘령의 여인으로부터 묵주를 건네받기 위해 강남의 어느 호텔 객실에 몇 시간씩 머물러 화제가 되었던 그 정형근 의원이 (언제 번역까지 할 시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 정보기관 역사의 전설을 소개했다는 사실 자체가 묘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미국의 또다른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이 한술 더떠 세계 도처에서 암살과 도청을 일삼으며 제3세계의 반미정부 전복을 일삼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칠레의 아옌데가 그렇게 죽었고, 남미에서 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수많은 군사쿠데타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CIA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곤 했다.
  
  중앙정보부, 그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
  
  한국의 중앙정보부(현재 국정원)는 박정희와 김종필이 1961년 6월 미국의 CIA와 FBI를 본따 만들었다. 유신독재의 철권 정보정치는 중앙정보부라는 무시무시한 권력 핵심 중추기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줄여서 '중정', 시중에서는 그저 '남산'(지금의 서울시 종합방재센터 자리)이라고 불렸던 중앙정보부는 일제 때의 '순사'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그야말로 서슬퍼런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고문은 기본이고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에 있던 김대중을 벌건 대낮에 납치해서 바다 한가운데에서 죽이려고 했던 것도 남산이었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대장이던 김형욱도 파리까지 원정가서 죽여버린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남산은 정국의 변화에 맞추어 시시때때로 간첩을 제조해내는 간첩 대량생산 공장이기도 했다. 간첩사건 만들기는 중정의 일상 업무였다. 사실 중정이 간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원재료는 무궁무진했다. 재일교포이거나 일본에 친척이 있는 사람, 과거 혁신계에서 활동했던 사람들, 유럽 유학생 등등 자원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러다보니 전혀 간첩이란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 같은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려다 실패한 경우도 가끔 있었다. 최 교수는 독일 유학생이었고 베를린에서 공부하면서 동베를린을 잠깐 갔다 왔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간첩이 되었다. 최 교수가 최소한 사회주의에 공명이라도 한 적이 전혀 없었고 또 최 교수의 친동생이 중앙정보부 감찰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참혹한 고문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모진 가혹행위가 있었는지는 지금 젊은이들은 아마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고문,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 전기고문, 엘리베이터 고문, 통닭구이 등등 이름조차 기기묘묘한 갖가지 고문들이 거기 남산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자행되었다. 아니 인간은 원래 그렇게 잔혹한 종자인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숱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재능과 아까운 열정들이 남산의 지하방에 끌려가 고문 당한 뒤 폐품처럼 버려졌는지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하다. 시인 천상병과 박정만의 삶에 대해 한 두 마디만 들어보아도 그 실상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죽음 일보 직전의 고문을 당해본 김근태(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의 수기를 보면 고문하는 사람들은 고문을 마치 유희 하듯이, 직업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제일 의아해하고 소름끼쳐 했던 것은 그렇게 자신을 고문했던 자들이 잠깐 쉬는 틈을 타서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야 한다는 둥 자식 새끼가 성적이 오르지 않아 어쨌다는 둥 마누라가 어쩐다는 둥 아주 일상의 얘기를 자연스럽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고문하는 사람은 고문당하는 사람보다도 더 자신의 인간성이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중앙정보부라는 조직이 사육한 고문기술 맹견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정말 과거를 씻을 준비가 되어 있나?
  
  유신독재와 군사독재 시대가 지나고 그리고 벌써 세 번이나 민간정부가 이어졌다. 그 사이 중정(안전기획부)은 환골탈태를 선언하면서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4년 11월에는 국정원 과거사위(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출범해 과거 중정과 안기부 시절의 각종 의문사와 의혹사건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도 했다.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국정원이 중정과 안기부의 음습한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 국정원이 반성과 성찰을 통해 참회하고 참으로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정보기관으로서 미래를 준비하는 데 꼭 필요한, 예컨대 석유고갈과 정점(Peak Oil)과 같은 문제를 둘러싼 각종 고급 정보들을 국민에게 제공한다면 과거야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국정원의 과거청산 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여전히 국정원은 서슴치 않고 고문을 저지르고 있다. 자신의 신체에 가하는 고문보다 더 잔인한 것은 가족의 신체에 가하는 고문이다. 그리고 신체에 가하는 고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머리 속 기억에 가하는 고문이다. 머릿속 기억에 가하는 고문보다 더 냉혹한 것은 기억이 담긴 과거 자료에 대한 고문이다. 지금 국정원은 무표정의 관료주의에 이전보다 더 교묘하고도 분통 터지게 하는 고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고 있다. 아마 그들은, 늘 그랬듯이, 고문이라는 의식도 없이 다른 사람을 고문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4월 4일 고 박현채 유족들은 서울중앙지검 종합민원실에 박현채 관련 재판자료, 즉 1964년의 제1차 인혁당 사건과 1979년 임동규 간첩사건에 관련된 일체의 자료에 대해 열람·등사 신청을 했다. 유족들이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를 검토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박현채전집』을 만드는 데도 자료로서 필요했기 때문이다. 등사신청 민원은 처리기간이 1주일이었다. 그런데 서울지검에서는 오래된 사건이라 자료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린다며 차일피일 미루더니 근 한 달이 다 된 4월 말에서야 1차 인혁당사건 관련자료는 2005년 말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됐다는 통보를 해 왔다. 그래서 4월 25일 국가기록원에 정식으로 자료공개 요청을 했다. 국가기록원에서는 성의있고도 친절하게 공개 요청에 응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엉뚱하게 터졌다. 국가기록원이 자료를 공개하는 데는 규정상 자료생산기관의 의견을 물어야 하는 절차가 필요한데, 국정원에 자료공개 여부를 문의한 결과 '공개 불가'라는 통지가 왔다는 것이었다. 국정원이 밝힌 비공개 사유는 그야말로 황당하고도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1974년 2차 인혁당사건의 유족들이 제기한 재심 재판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박현채의 수사기록이 공개될 경우 재심 청구인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되므로" 공개할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이같은 판단을 내린 주체인 국정원의 '돌머리'를 유머로 웃어넘겨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잔머리'에 분노해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헷갈리는 설명이었다.
  
  1차 인혁당사건은 도무지 증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상한 사건이었다. 오로지 중정에서 고문을 통해 진술된 피의자 신문조서에만 존재하는 조직이 인민혁명당이었다. 그러니 그 고문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당시 담당검사들은 도저히 기소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고 결국 사표를 냈다. 검찰은 사상 최초로 당직검사를 통해 기소를 강행했고 결국 재판을 통해 무죄가 선고된다. 이런 사건이니 당시 중정의 기록, 피의자 신문조서와 자필진술서는 1차 인혁당사건의 핵심기록이며 역사의 기록이다. 맨처음 쓴 자필진술서와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횟수를 거듭하면서 달라진 자필진술서의 내용은 바로 잔인한 고문과 조작의 살아 있는 기록일 뿐이다.
  
  사법파동까지 몰고 온 그때 그 무죄의 1차 인혁당사건에 대해 중정은 어떤 심정이었는지, 꼭 10년이 지난 1973년 다시 2차 인혁당사건을 조작해 이제는 아예 8명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고 만다. 진저리치도록 끈질기고도 무섭고도 흉악한 범죄자들이 바로 중정의 그때 그 사람들이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사람을 죽일 정도로 집착하게 만드는 것일까.
  
  2003년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러면 중정은, 아니 국정원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 최소한 반성과 사과라도 해야 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그런데 사과는커년 1차 인혁당 사건 관련 자료까지 재판에 영향을 준다고 공개를 거부하는 것을 보면 국정원의 본심과 앞으로의 모습이 눈에 선할 뿐이다.
  
  가족들은 고문의 진상을 보고자 했다. 그리고 고문에 맞서 의연히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박현채의 그 생생한 투쟁을 대면하고자 했다. 물론 박현채전집을 만들고자 한 사람들도 그 기록을 자료로서 참조하고자 했다. 그런데 국정원은 엉뚱한 이유를 들어 자료의 공개를 거부했다. 참으로 박현채의 고문에 그치지 않고 죽어 10년이 지난 이제는 가족까지 고문하는, 파렴치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여전한 국정원의 '중정으로의 회귀성'에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이 과거사를 정리한다고? 턱도 없는 거짓말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국정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라. 이미 조작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1967년 동백림 사건, 1973년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최종길 교수 사건), 1985년 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등이 버젓이 국정원의 혁혁한 전과로 올라 있으니 말이다.
  
  박현채, 그리고 '계몽의 집필투쟁'을 통해 쏟아낸 '깨우침의 글'들
  
  여기서 박현채에 대한 소개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이들은 박현채란 이름이 낯설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이라는 호소력 있는 대안이념과 소년 빨치산이라는 활화산과도 같았던 실천으로 동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강렬한 영향을 끼친 시대의 스승이었다. 박현채는 민족경제론, 민중경제론을 일관되게 펼친, 한국현대사에서 손꼽을 수 있는 자생의 이론가이자 민주화운동가였다. 특히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박현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거기 등장하는 '조원제'야말로 조정래가 쓴 박현채 자서전이었다.
  
  박현채는 온몸으로 이 땅의 민중과 함께 살고자 했고, 다함께 고르게 사는 민주주의와 평등-평화의 역사를 만들고자 치열하게 역사 앞에서 싸웠다. 역사를 거역하는 슬픈 패배의 역사투쟁이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다시 만들어 나가는 순교와 창조의 역사투쟁이었다. 박현채의 삶과 글은 시대를 향해 절규하는 한국 현대사의 증언 그 자체였다. 청탁을 받으면 매체성향을 가리지 않고 여러 지면에 기회가 닿는대로 똑같거나 비슷비슷한 글을 반복해서 발표했던 '계몽의 집필투쟁' 자체가 암흑 속에서 똑같은 촛불을 무수히 켜야 했던 박현채의 역사투쟁과 한국현대사를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박현채의 민족경제와 민중경제는 숫자놀음이나 현학 취미에 골몰하는 단순한 배움(學)과 이론(論)이 아니었다. 그는 그야말로 경제의 본디 뜻인 경세제민(經世濟民) 하는 일에 자신의 몸을 바치고자 했던 실천가였다.
  
  우리는 흔히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현실을 분석한다며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의 거시경제나 미시경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호와 언어를 동원해 주물럭거리는 것을 본다. 거기에는 '경제'는 있을지 모르나 바로 우리들 자신과 이웃, 현실의 사람들과 매일매일 부닥치는 일상생활이 없고, 땀흘려 일하는 인간의 냄새가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냄새나는 인간들을 기피한다. 한 해에도 수없이 많은 종이를 낭비하는 이런 논문들이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경세제민은커녕 양극화 현상의 골은 더 깊어질 뿐, 전세계에서 해마다 600만 명의 어린이가 채 5살도 안 돼 순전히 굶주려 죽어가고,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연명하는 최극빈층이 전세계 인구의 20%인 12억 명에 이른다. GNP 1만 몇천 달러라는 허울뿐인 한국경제의 통계 그늘에서는 비정규직이 절반을 넘고 한 해에도 수천 명이 빈곤 때문에 자식을 버리고 자살한다.
  
  무릇 학문은 현실을 묻고(問) 배워(學) 이정표를 세우는 현실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민중경제론은 그런 의미에서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불평등과 비리와 부정을 고발하고 이를 혁파하기 위한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한, 학문의 본뜻에 가장 충실한 현실 변혁의 학문이었다. 그것은 근대 이후 서양 학문 체계가 수입된 이래 단순히 서양 학문의 수입 모방에 그치지 않고 그를 뛰어넘어 민중의 땀냄새가 물씬 밴, 이 땅에서 솟아난 자생의 토착 학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근현대사가 서구 자본주의와 근대 산업문명의 거대한 충격과 함께 서양의 근대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근대 모방과 도입의 역사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 과정은 제국주의의 침략 역사이자 동시에 이 땅에 뿌리박고 사는 민중의 수탈사였고 공동체 해체의 역사였다. 8.15 이후 우리에게는 이중으로 두 개의 길이 주어졌다. 자본주의 근대화의 길과 사회주의 근대화의 길, 그리고 자주자립의 길과 외세의존 종속의 길이 그것이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견해와 해석이 어떠하건 한국전쟁과 분단에 이르는 그 숱한 희생과 아픔의 기록을 여기서 더 반복할 필요는 없으리라.
  
  박현채는 이같은 거대한 근대화 프로젝트의 현장에서 폭력과 희생의 근대화가 아니라 평화와 협동이 살아 숨쉬며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중 자치와 자립의 근대화를 꿈꾸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일관된 신념은 아마도 해방 후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오면서 기꺼이 역설의 총을 들었던 그의 원체험에서부터 깊이깊이 발효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민중들의 그 수많은 희생과 아픔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 그리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승화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동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시선을 자신의 주위에 한정하고 있을 때, 아주 멀리 그리고 저 밑바닥까지 민중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아주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소설보다 더 소설처럼 백아산에서 목숨을 건져 살아남은 그에게는 일종의 살아남은 자의 사명감이 늘 그림자로 따라 다녔는지도 모른다.
  
  하산 후 서울대 상과대학에 들어간 것도,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이후 직업 없이 남의 대필이나 해 주며 여기저기 동아리패에 불려가 저녁 한끼 대접의 강의를 하면서 수없이 많은 논문을 써낸 것도, 그러면서도 늘 현실의 변혁운동과 민주화운동 일선에서 앞장선 것도 이런 그의 넘치는 열정과 사명감이 아니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은 독해하기 참으로 어려운 비문(非文), 악문(惡文)이란 비판을 들으면서도 일단 그 속으로 한번 들어가면 그 통렬한 깨우침에 눈을 번쩍 뜨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의 글은 잠들어 있던 의식과 양심에 한 순간 벼락과도 같은 충격을 던져준다. 그리고 곧 이어 박현채의 그 뜨거운 심장과 함께 고동치면서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장강과 꿈틀거리는 질풍노도의 함성과 냉철하고도 차분한 성찰의 대안을 똑같은 시선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박현채의 글은 이처럼 수많은 공명을 만들어 냈고, 이런 동조와 어깨동무야말로 박현채를 당대의 가장 불온하고도 위험한 기피인물로 만든 힘의 원천이었다.
  
  역사의 폐허를 헤치고 부활하는 박현채
  
  박현채가 제기한 1970년대 민족경제론과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은 당대 역사를 가장 집약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제 역사가 되었다. 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박현채가 자신의 빨치산 투쟁을 수기로 남기고 쓰러짐과 동시에 민족경제론·민중경제론 또한 마치 실패한 이론이자 현실을 잘못 진단한 쓰레기 이론 취급당한 것도 이제 역사가 되었다.
  
  1997년 국제금융환란 이후 우리는 이제 박현채가 그야말로 다시 역사가 되는 것을, 역사로서 다시 부활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오늘의 현실은 그가 제기한 자립경제·민족경제·민중경제의 문제의식이 그냥 한 순간 바람처럼 불다 사라져버리는 불임의 문제의식이 아님을 웅변해주고 있다. 식량자급률 20% 선에서 개방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 농업은 아예 멸종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외자라는 이름 아래 들어온 투기자본은 한 순간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땀흘려 쌓아놓은 국부를 가볍게 빼앗아가 버린다. 이 땅에서 더 이상 외국 군대의 군사기지가 확장되어서는 안된다는 농민들과 민중들의 절박한 요구는 무참히 짓밟혀 버리고 만다. 20세기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지 몸서리쳐지는 21세기 오늘 우리의 이같은 풍경이야말로 자립경제와 민족경제, 민중경제의 의미를 근원에서부터 다시 되새겨 보게 하는 초혼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004년 몇몇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여 2005년 박현채 10주기를 맞아 박현채전집과 추모집을 발간하기로 하고 '고 박현채 10주기 추모집·전집 발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겹쳐 2005년에 박현채전집은 출간되지 못했다. 2006년 6월 이제야 비로소 박현채전집이 출간된다. 오는 6월 7일 박현채전집 추모집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아마도 『박현채전집』의 출간은 국정원의 기억에 대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경제론과 민중경제론, 자립경제론이 다시 부활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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