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집세와 공과금, 교통비를 충당했지만, 식비를 마련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 동네에서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감나무를 발견했고, 그날 밤부터 살기 위해 감 서리를 했다. 합법적으로 살아갈 방법은 없었다. 밤마다 가슴 졸이며 담장에 손을 뻗은 대가로, 나는 매일 아침과 저녁을 감 두 개씩으로 때울 수 있었다. 떫은 감 맛에 혀가 텁텁해질 때쯤, "여자로 사는 게 엿 같으면 찾아와"라던 운동권 선배의 말을 떠올렸다. 얼마 후, 아버지 앞에서 평생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면서 살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전문 시위꾼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렇게 10년, 뒤를 돌아보니 벽은 여전히 대문 앞에 있었다. 10년 동안 내가 열정을 쏟아온 일들은 러닝머신마냥 제자리 뛰기만 하고 있었고, 여전히 나는 지붕이 달린 것에 감사한 집에 살고 있었다. '그냥 열심히 하는' 삶에 익숙해졌을 즈음,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라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감 떨어지듯 툭 하고 떨어졌다.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라고? 너무 노골적이잖아"라는 느낌이 먼저였다.
휴학하고 빵집에서 '알바' 하던 때가 생각났다. 시급 4000원, 당연히 주휴 수당이니 근로 계약서니 하는 것도 없이 노동하던 시기, 후배들에게 밥 한 끼 사줄 여유도 없으면서 "많이 벌고 싶다" 같은 말은 꺼내보지도 못했던 때를. 학비와 생계비를 벌기 위해 주야로 단기직 일자리를 뛰는 대학생들, 새벽 4시에 출근해 휴게실도 없이 하루 종일 일하는 청소 노동자들, 남성 정규직과 똑같이 일해도 최저 임금밖에 못 받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들이 "1시간에 1만 원씩은 받고 싶다"고 말하면, 마치 반역자라도 되는 듯이 쳐다볼 게 뻔한 세상에서 이름부터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라. 그리고 꺼림칙한 기분 뒤에 따라온 것은 "우린 그러면 안 돼?"라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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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를 만들자"
최저 임금 1만 원에 긍정적인 단체들이 2013년 최저 임금 국면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고, 몇 차례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라는 말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라는 이름 아래 모인 건 8개 단체와 '회기동 단편선'이었다. 많아 봐야 회원 수 300~400명에서 적으면 10~20명 규모의 단체들, 그렇지만 그들이 모이기까지는 온갖 곡절이 있었다. 두 달에 걸친 우왕좌왕 끝에 5월 말이 되어서야 그들은 하나의 공통 목적에 도달했다.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를 만들자."
5월 30일,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를 공개 제안하는 기자 회견을 열었다. 8개 단체는 곧 9개가 되었다. 이제 슬슬 뭔가 시작된다는 희망에 차기 시작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발목을 잡았다.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의 공동 대변인으로 자천했던 권문석 알바연대 대변인의 돌연사.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를 만드는 것에 누구보다 열정적이던 그였다.
3일을 장례식장에서 정신없이 보냈다. 눈을 떠보니 68대회가 3일 앞이었다. 장례식을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일했다. 당장 급한 물품은 큰 단체에서 빌리고, 농성 프로그램은 일단 앞부분을 먼저 채우고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68대회를 기획했다.
68대회는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의 공식적인 첫 행보였다. 단체별로 작은 현수막을 담벼락에 걸었다. 알바연대의 '최저 임금 1만 원 받고 쉬면서 삽시다', 진보신당 청소년위원회의 '잘살아보세 최저 임금 1만 원 운동', 청년 좌파의 '투기 불로소득을 환수하여 최저 임금을 1만 원으로' 같은 것들이었다. 사회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에서 맡았고 '혁명기도원'은 노래를 불렀다. 참가 단위 모두 단순한 발언 말고 연극, 춤, 노래 등을 준비해 대회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농성은 화려한 라인업도 없이 참가 단체들이 하루씩 맡아 일정을 채웠다. 혁명기도원은 기도회를 열었고,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는 청소년 노동에 대한 강의를 준비했다. 두런두런은 최저 임금 1만 원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가요를 개사해서 불렀고,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는 최저임금 1만 원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초청해온 강사들이 강사비를 후원금으로 돌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깨알같이 돈을 절약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쫓아다니며 모금을 했고, 참가 단체들의 사정에 맞게 분담금을 내고 부족할 때마다 다시 모았다. 단체 분담금으로 모은 돈만 200만 원. 각각 한 달 재정을 생각할 때 적은 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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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 임금을 왜 많이 올려야 하냐고? 절실하니까!
농성을 시작하고 나서, "최저임금 1만 원 위원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너무 많은 설명이 쉴 새 없이 요구되었다. 실업은? 물가 상승률은? 중소기업은? 영세 자영업자는? 가능해? 설명하면 할수록 더 많은 질문들이 이미 답변한 질문들과 함께 다시 쏟아졌다. '임금은 비용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생산하기 위한 수단입니다'라는 단순 명료한 슬로건은 모든 논리를 떠나 마음에 꽂히는 절실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작하는 과정도 그랬지만 버티는 과정도 좌충우돌이었다. 참가 단체들의 콘텐츠를 모아 홍보물을 만든답시고 글을 모으다가 1주일을 밀리기도 했다. 줄어드는 재정에 안달하면서, 빌려준 돈 있는 사채꾼마냥 얼굴에 철판을 깐 채 모금을 하러 다니기도 했다. 농성 프로그램과 단체 책임 순번을 정하면서도 우왕좌왕했다. 비는 올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우며 프로그램 일정을 흩뜨려 놓았다.
| ▲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 회원들이 지난달 14일 한국경영자총협회 빌딩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촉구하며 기습 점거 시위를 벌였다. ⓒ프레시안(최형락) |
350원 인상으로 끝났지만…우리는 그 자리에 남는다
작고 힘이 없으니 행동이 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경총 처마에 올라가 사용자위원의 최저 임금 동결안을 규탄하고, 박근혜 정부의 4860원짜리 나쁜 시간제 일자리 폐기를 외쳤다. 그렇게 연행된 사람이 14명이었다. 최저 임금 결정 시한이던 6월 27일에는 최저임금위원회로 진입을 시도하다가 24명이 연행되었다. 24명의 연행을 대가로 얻은 성과는 문 한 짝을 뜯어낸 정도였다. 그리고 7월 5일 새벽, 최저 임금은 350원 올랐다.
350원 인상이 큰 선심인 것처럼 자화자찬하는 최저임금위원회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심경이다. 최저 임금 1만 원의 사회적 의미와 비교하면 우리가 가진 것은 늘 보잘것없다. 최저임금위원회의 목소리에 비해 최저 임금 1만 원 위원회의 목소리는 작기 그지없다.
우리가 건 싸움은 소득에 대한 패러다임이 '비용이냐, 삶이냐'에 대한 것이었고, 350원은 그에 대한 판정일 것이다. 최저임금위원회는 회기를 끝내고 사라졌지만, 최저임금 1만 원 위원회는 그 자리에 남았다. 우리를 계속 버텨내게 하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하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뿐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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