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일본 수상이 이 달 15일에 한국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발표가 느닷없이, 밑도 끝도 없이 나왔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웃한 나라 사이에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가능한 한 자주 그런 회담이 열려서 상호이해를 깊이 하고 협조체제를 굳히는 것이 서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요즈음 한일관계가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난 4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와 8월 고이즈미 자신의 야스구니 신사참배 문제로 냉각이 아니라 냉동된 상태 또는 파탄 직전의 감정악화 상태까지 이른 것이 현실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러니까 양국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그런 외교적 주장이 형식논리로는 옳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외교란 형식논리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명분과 실리를 다 같이 구비할 때 비로소 형식논리가 통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 외교 측면에서 볼 때, 이번 정상회담은 명분이 없다. "역사인식은 한일 양국관계의 근본이기 때문에 일본의 성의 있는 조치가 없는 한 정상회담은 불가능"이라는 것이 그 동안 우리 정부가 여러 차례나 강조한 기본입장이었다.
교과서 문제든 일본 수상의 신사 참배문제든, 일본이 여태껏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한 일이 전혀 없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런 조치가 있을 것을 기대해도 좋을만한 조짐이 전혀 없다.
그런데 무슨 명분으로 정상회담을 덜컥 발표한단 말인가. 정상회담 개최가 애들 장난처럼 다루어도 좋은 그런 것인가.
이 달 하순에 북경에서 열린 APEC 회의 때, 북경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는데, 굳이 그보다 열흘 전에 서울에서 양국간 정상회담을 개최할 급한 사안이라도 있는가.
그리고 이번 정상회담에서 우리 외교가 무슨 실리를 얻을지도 미지수이다. 한국인에 대해 융통성 있는 비자발급 검토, 서울-하네다간 여객기 취항문제, 일본의 대한 투자확대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그런 문제는 정상회담이 아니더라도 양국의 외교실무진 사이에서 얼마든지 논의하고 해결이 가능한 문제일 것이다.
일본측에서 구체적인 호의 표시를 발표하지도 않고 있는 단계에, 우리측에서는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항해서 우리가 취했던 조치들의 철회 검토가 보도되고 있다. 너무나도 성급한 일이 아닐까.
외교란 상대방이 있는 국제적 게임이다. 자기 카드를 다 뒤집어 보인 채 카드 게임을 한다면 누가 이기겠는가.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경우에는 오히려‘블러핑(허풍)’을 떠는 것도 외교 수단의 한 가지이다. 우리는 블러핑조차 할 줄 모르는 외교만 한단 말인가.
역사인식문제는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과거 역사에 대해서 우리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도 인식한다. 그리고 일본이 우리와 동일하게 인식하기를 우리가 희망하고 또 일본에게 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본이 그렇게 인식해 주는가 하는 것은 별문제이다. 일본의 인식이 바뀌도록 강제하는 수단이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방법이 없다면 매우 골치 아픈 문제가 된다.
물론 일본이 스스로 반성하는 방법도 있을 테고, 일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스로 인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도록 국제 분위기를 성숙시키는 방법이 없지도 않다. 현실성 있는 그런 방법들을 우리가 차분한 자세로 깊이 연구하고, 꾸준히 일관된 정책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본다.
역사인식 문제는 감정적으로 일본을 매도하거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장기를 불사르거나 혈서를 쓰는 언동으로 개선되거나 해결될 그런 문제가 결코 아니다.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장기적으로 대처해 나아가야 할 외교 현안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감정적으로, 국내정치용으로, 소신도 없고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변덕스러운 외교 자세로 다룬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 문제의 해결이 없다면 정상회담도 없다는 식으로 연결지어서 왜 그동안 우리 정부가 기본입장을 여러 번 천명했던가 말이다.
그리고 이왕에 그런 식으로 정부 입장을 밝혔다면, 정상회담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적어도 한두 가지는 사전에 정지작업을 했어야 되지 않겠는가.
일본 수상이 그 동안 친서를 두 번이나 보내왔다면, 미리 그런 사실을 발표해서 분위기를 조성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언론에 미리 흘리거나, 양국 사이에 특사를 교환해서 논의하는 제스쳐를 보이거나, 대사들이 서울과 동경에서 무엇인가 협의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할 수는 없었을까. 그렇게도 시간이 없었을까.
시간이 촉박해서 느닷없이 발표를 했다면 더욱 더 문제가 심각해진다. 정상회담 개최라는 중대한 외교사안을 그렇게 허겁지겁 서둘러서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국가이익에 부합하는 것일까. 혹시라도 뒤숭숭한 국내정세를 어루만지기 위한 일과성 정치 쇼로 보이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게다가 우리 풍토에서는 이제 말 바꾸기가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도 않는 상황이니까, 이미 발표된 우리 입장을 은근히 말을 돌려서 여운을 남기는 표현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외교란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거짓말로 들리지 않도록 말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그런 재능마저 없다면 그야말로 삼류라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정상회담이 열리고 공동발표문이 공개된다고 해서 양국 국민 사이의 우호가 더욱 돈독해진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믿는 것은 각자의 자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평화조약을 체결했다고 해서 평화가 확립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양국 국민의 마음 속에 진정한 우호 의지가 없다면, 우호조약이란 휴지에 불과하다. 양측에 진정한 평화 의지가 없다면, 평화조약도 역시 휴지에 불과하다. 때로는 평화조약이나 평화협상이 침략과 기습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 예를 우리는 역사에서 많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국민의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외교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원칙도 성의도 소신도 없는 외교라는 인식이 국민 사이에 퍼져나가고 있다면, 우리 외교는 파도에 힘없이 떠다니는 낙엽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 국민이 우리 외교관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어느 외국인들이 우리 외교관들의 말을 믿어줄 것인가. 정상회담 개최 자체는 좋은 일일지 몰라도, 그런 중대한 외교문제를 처리하는 외교솜씨는 기교와 내실 면에서 대단히 미숙하다거나 삼류라는 지적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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