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동시다발 테러사건 이후, 일본의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는 데자뷔(Déjà vu)란 말이 슬로건처럼 되풀이 외쳐지고 있다. 일본 정부 당국은 지금 ‘기시감(旣視感: 데자뷔)’에 사로잡혀 있다.
지난 걸프전쟁에서 일본은 다국적군에 대한 130억 달러 규모의 재정지원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그에 상응한 평가를 얻지 못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대가를 바라는 금전만능의 이기적인 국가로 낙인 찍혀 철저한 소외감을 맛보았다’는 실망감이 당시 일본 정부 내에서 널리 퍼졌다.
이것이 탈냉전 이후 일본의 안보정책이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위대에 과해진 갖가지 제동장치들이 일본을 국제공헌의 낙제생으로 전락시켜 탈냉전기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 이것이야말로 90년대 일본의 안보정책을 군사적 국제공헌 확대와 이를 위한 군사적 ‘보통국가’ 실현이라는 방향으로 이끌어온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 결과 99년에는 미군 지원을 위한 자위대 활동의 범위와 내용을 확대시킨 주변사태법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법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주변에서의 유사사태에 대비한 것이었다.
이번 테러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걸프전쟁 때처럼 국제적인 고립을 초래하는 사태야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회피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외 행동의 대원칙이 되고 있다. 미일 기축주의를 외교의 근간으로 하고 있는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국제적인 고립이란 미국으로부터의 ‘버림받음’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
미일 동맹의 기이한 운명을 예고하고 있는 것일까. 테러가 일어난 그 날은 미일 강화, 안보조약 50주년 기념식이 거행된 9월 8일부터 불과 3일이 지난 날이었다.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다나까 마끼꼬(田中眞紀子) 일본 외상은 ‘군사면에서도 (미국과의) 무력행사의 일체화 문제 등에 대해 검토하여, (일본이) 보다 확대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지 여부를 연구할 단계’라고 밝혔다. 이는 일본정부가 위헌이라고 해석해 왔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관한 연구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이 부시 정권 발족 직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일본정부가 집단적자위권을 위헌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은 ‘동맹협력의 제약’이라고 지적했던 바, 이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자세가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부시정권은 무력행사와 일체화된 지역 등에 대한 일본의 미군지원 확대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이 단계에서는 어디까지나 검토와 연구의 대상이었으며, 연구결과를 토대로 해석을 수정하기까지는 누가 보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되었다. 고이즈미 쥰이찌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 자신이 미군지원과 관련한 역대 내각의 견해를 변경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후방지원은 전투지역이 아닌 후방지역에서만 가능하다는 종래의 해석을 수정할 생각을 내비치면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뒤에 이를 번복했다. 그러나 테러사건을 계기로 상황은 급변했다.
기시감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 정부 당국자의 불안은, 테러사건 이후 최초의 대응이 다른 선진 각국에 비해 뒤쳐졌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증폭되었다. 사건직후, 블레어 영국 수상,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주요국 정상이 미국의 보복행동에 대해 전면 지지를 선언하고 이러한 모습이 CNN을 통해 되풀이 방영되고 있던 상황에서 일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이즈미 총리가 기자회견에 임한 것은 12일 오전 10시 15분, 사건 발생으로부터 12시간이 지난 뒤였다. 뒤쳐진 시간을 보상하려는 듯, 일본의 대응은 과속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장기를 보여 달라!: Show the flag!”**
지난 9월 15일, 워싱턴 국무부의 한 방에서는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야나이 슌지(柳井俊二) 주미대사에게 일본의 적극적 협력을 요청하며 “일장기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에서는 이 말이 민간인의 협력이 아닌 자위대의 행동을 요청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구체적으로 거론된 것으로는 주일 미군기지의 경호, 후방지역 지원을 위한 자위대의 역외 파견 등이었다. 그러나 전자와 관련해서는 기존의 자위대법의 한계가, 후자와 관련해서는 ‘무력행사와의 일체화’의 우려가 지적되었다.
‘무력행사와의 일체화’문제는 10년전 걸프전 당시부터 논쟁점이 되어 왔던 문제로, 의료활동 등의 비 전투 활동이라 하더라도 전투지역에서 직접 미군 지원부대로 편성되어 활동하게 될 경우, 미군의 무력행동과 일체화한 형태의 무력행사로 해석되어 이를 금지한 일본 헌법에 위배되는 것을 말한다.
당시의 일본정부는 이를 문제시하여 방위의관(의료부대)의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99년에 채택된 주변사태법에서도 공해상에서의 부상자 수송과정에서 실시되는 치료와 일본 국내에서의 의료활동에 한해서 의료부대의 활동을 인정하고 있다.
현재의 정부견해는 무력행사와 일체화한 후방지원은 헌법이 금지하는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와 직결되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일체화’의 판단기준은 명확하지 않으며, 내각법제국은 ‘전투지역과의 지리적 관계와 행동내용 등을 감안해서 판단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장기를 명확히 보여달라는 미국의 지원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행법의 한계가 문제가 되었다. 정부 여당 쪽에서는 현행법 즉, 자위대법과 주변사태법의 확대해석으로 가능하다는 입장과 자위대법을 개정하고 신법을 제정해야 된다는 입장으로 갈리고 있다.
그러나 확대해석을 일단 용납하게 되면 법적 한계 자체가 유명무실화할 우려가 있으며, 후방지역지원이 예상되는 인도양을 ‘주변지역’으로 해석하는 것은 ‘물구나무를 서더라도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신법 제정파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신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입장은 다시 대미 지원에 한정된 것(‘대미지원법’)이어야 한다는 입장과, 보다 보편성을 띤 ‘대테러 국제협조법’의 성격을 갖춰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뉘고 있다. 외무성은 이 가운데 ‘대미지원법’을 제정하자는 입장에 서 있다. 외무성은 이번 사태를 ‘미일동맹이 부과한 마지막 시험’으로 간주하고, 이에 실패할 경우 전후 일본외교의 근간이 흔들릴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편, 미일안보체제가 설정한 논의의 틀을 제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선을 넘어서서, ‘무력행동과의 일체화’의 폭을 확대하여 결과적으로 자위대 활동의 폭을 확대하고자 의도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 여당의 움직임에 대해 제1야당인 민주당은 신법 제정에 조건부로 찬성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조건으로 제시한 세 가지 전제는 첫째 신법이 유엔의 결의를 전제로 할 것, 둘째 이번 사태에 한정한 시한입법으로 제정할 것, 셋째 무력행사와 구분된다는 점을 명확히 할 것 등이다. 특히 무기 및 탄약의 수송을 인정하지 않으며, 무기 사용 기준 완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이어서 신법 찬성에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신법에 포함시키는 방향에서 일본 정부가 검토하고 있는 내용은 이 선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미군에 대한 무기탄약의 제공, 전투작전행동을 위해 발진준비중인 항공기의 정비 및 급유, 인도양의 미군기지로의 미군 소유 연료의 수송. 전선 야전병원에서의 의료활동 등인데, 물론 이러한 활동은 기존의 주변사태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또 다른 야당인 자유당, 공산당, 사민당 등은 헌법과의 정합성 문제를 들어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국민들의 입장은 어떠한가. 10월 1일자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 국민의 60%가 미군지원에 대해서는 찬성하고 있으나, 자위대 파견에 대해서는 찬성 42%, 반대 46%로 의견이 나뉘었으며, 자위대원의 무기사용 완화에 대해서는 찬성 36%, 반대 51%로 반대가 다수의견을 차지했다.
이렇듯, 정부가 추진하는 신법 제정의 방향이 밝혀지면서 국내에서는 신중한 대응을 요구하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전달된 것일까.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은 재차, 일본정부가 추진하는 미군지원 법안에 ‘가능한 한의 유연성’을 부여하도록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10월 5일, 물품 제공, 야전병원의 설치, 무기사용기준의 완화 등을 골자로 하여, 미군지원을 위한 자위대 파견을 가능하게 하는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법안 명칭에서 ‘미군지원’이라는 용어가 빠져 있는데, 미군 이외의 다국적군에 대한 지원까지도 시야에 넣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법안이 채택될 경우, 전후 최초로 일본의 자위대는 ‘전시’에 ‘타국의 영토’에서 활동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갖게 된다.
***“우리들은 친구사이!: We are friends!”**
고이즈미 쥰이찌로 일본 총리가 지난 9월 25일 백악관에서 이루어진 공동 회견에서 부시 미 대통령에게 건넨 말이다. ‘동맹국으로서의 단호한 태도’(일본 외무성 간부)를 직접 피력하기 위해 고이즈미 수상이 급거 미국을 방문, 자위대 파견을 포함한 적극 협력을 약속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부시 미 대통령과 회담하는 동안, 일본 정부는 신규입법을 둘러싸고 여당 3당과 협의를 시작, 무기 사용 기준을 완화하고, 국회에 대한 사전승인 없이 사후보고만으로 파견을 가능하게 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 마련에 들어갔다.
이 가운데, 무기사용 기준 완화와 관련해서는 유엔의 내부문서가 ‘국제적인 기준’으로 등장하고 있어, 이를 원용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유엔의 내부문서에 따르면 평화유지군(PKO) 활동시 무기사용은 자기방어에 한해 인정되며, 구체적으로는‘요원의 생명 등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임무수행을 실력으로 방해하려는 기도에 저항하기 위해’라는 두 경우를 제시하고 있다. 신법에서 자위대의 활동범위가 확대되는 것과 관련해서 위의 두 번째와 같은 상황에도 무기사용을 허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무기 및 탄약의 제공(보급)과 관련해서는 이것이 ‘무력행동과의 일체화’로 해석되어 헌법과의 정면충돌을 야기할 우려가 제기되어 신법에는 포함시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위대의 활동범위는 ‘동의를 전제로 한 타국의 영토 및 영해’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은 주변사태법이 자위대의 후방지원의 한계를 일본의 영역과 공해로 한정하고 있는 규정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상의 내용으로 신법이 제정될 경우, 일본의 자위대가 ‘타국의 영토 또는 영해에서’, ‘임무수행 방해 기도에 저항하기 위해’ 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는 상황이 예상되며, 이는 다름 아닌 자위대의 ‘해외에서의 무력행사’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크게 우려된다.
이런 가운데, 급기야 일본은 미군의 요청을 받아 미 항공모함의 ‘경비’를 위해 일본의 해상자위대 호위함이 출동함으로써, 자위대 사상 최초로 작전행동중인 미 함대를 ‘호위’하는 ‘사상최초의 작전’에 나섰다.
그 근거법령으로 동원된 것이 방위청 설치법 5조 18항인 ‘방위청의 소장 사무 수행에 필요한 조사 및 연구’라는 규정이었다. 이 조문에 기초해 ‘경계감시’라는 명목으로 대응한다는 것이었으며, ‘경계감시는 자위대의 일상업무’라는 해석이었다. 방위청은 이러한 해석을 인도양 방면으로의 호위함 파견으로까지 확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군사적인 견지에서 보면, 항공모함을 경비하는 호위함의 행동은 엄연한 무력행동과 일체화한 공동작전행동에 해당한다. 고이즈미 정권은 이러한 행동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집단적 자위권의 확대 적용을 가능케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10월 8일 새벽(일본시간), 아프간 공격개시에 즈음해 부시 미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탱큐 프렌드!”라며 그 동안의 지지에 감사를 표명하고, 공격을 개시한 데 대해 설명했다.
이후 국회에 제출된 특별조치법안은 일정을 앞당겨 채택을 강행할 것으로 보이며, 야당의 수정요구에 대해서도, ‘정부법안이 최선의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 발생으로부터 4주만에, 전후 50여년간 일본의 군사적 대외행동에 빗장을 걸어왔던 모든 법적 규제들이 일거에 풀리려 하고 있다.
***‘자국의 사정에 전념한 나머지 타국을 무시해서는 안된다’(일본헌법 전문)**
그런데 미군 지원의 법적 근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고이즈미 총리와 나까소네 전 총리와의 대화가 흥미를 끈다. 고이즈미 총리가 헌법전문에서 ‘국제사회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점하고자 한다’는 구절을 끌어 댄 데 대해, 나까소네 전 총리는 ‘자국의 사정에 전념한 나머지 타국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헌법전문의 또 다른 구절을 인용했다.
고이즈미 수상은 9월 27일의 임시국회에서 소신표명에서 이 구절을 인용, 신법 제정의 의지를 피력했다. 헌법이라는 국내사정에 묶여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태도는 헌법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논리이다.
한편, 테러사건 이후 일련의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은 일본이 신중한 대응을 취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정부가 평화헌법의 기본정신에 따라’ 행동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중국도 ‘신중한 행동을 희망한다’고 밝힌 바 있다.
위에 고이즈미 총리가 인용한 헌법 전문의 구절 가운데 ‘타국’이라는 말 속에는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일본정부는 고이즈미 총리가 8일과 15일, 중국과 한국을 방문하여, 지난 교과서 문제와 야스쿠니 참배 문제등에 대해 설명하고, 이번 행동에 이해를 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의 보복공격에서 미군과 함께 전개될 자위대의 해외파견이 앞으로의 선례로 이용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사를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언어로 표명해야 할 것이다.
필자 남기정은 1988년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일본 도쿄대 종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도호쿠(東北)대 법학연구과 조교수로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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