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3일자 매일경제신문과 한국경제신문 부고란. 짤막한 한 줄의 부고가 실렸다.
‘박권현(朴權鉉) 전 한밭신문 발행인. 11일 별세. 13일 오전 11시 발인. 대전성심병원.’
이 부고만으로는 4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가 누군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빈소가 마련된 대전 성심병원에는 내로라 하는 사람들의 조화와 조문이 줄을 이었다.
이들 조화 가운데는 당시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 그리고 홍선기 대전시장의 조화도 있었다. 대전 출신 국회 의원들은 물론 구청장과 구의회 의장 등 대전지역 유명 인사들의 이름도 빠지지 않았다.
조문객 명단에는 대덕 과학단지 사람들의 이름도 눈에 띄었다. 그의 빈소를 찾은 사람들은 그가 가졌던 직함만큼이나 다양했다. 대전시축구협회장으로, 혹은 한국기원 대전시지역본부장으로 만난 사람들도 있었고, 공학박사 출신으로 원자력연구원에 근무했던 당시의 대덕단지 동료들도 있었다. 또 16대 총선 때 민주당 대전 서구을에 공천을 신청하기도 했던 정치 지망생으로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관계의 유명 인사들과 이 지역 유지들이 그의 빈소를 찾았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가 대전지역에서 가장 많이 나가고 있는 생활정보지인 대전 교차로의 현직 회장이자 창간 주역이었다는 것. 그가 90년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꽃피우게 되는 지금과 같은 ‘생활정보지’라는 것을 처음 만든 사람이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이들 인사들이 그의 빈소를 찾은 ‘진짜 이유’였다.
그의 이력은 매우 다채롭다. 서울대 공대를 다니다가 아주대학을 졸업한 공학박사 출신. 특히 생활정보지 교차로를 만든 경위는 업계에서는 하나의 ‘전설’처럼 남아 있다.
그는 핵연료 연구자였다. 프랑스 푸아티에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핵연료 설계를 맡고 있던 그가 남부럽지 않은 직장을 정리하고 1989년 처음으로 지금의 생활정보지의 효시가 된 교차로를 만들게 된 것은 프랑스 유학 때의 경험에 덧붙여 하나의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연구성과를 측정하기 위한 실험기기를 찾지 못해 온갖 곳을 돌아다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덕단지 내 바로 옆 연구소에 이 장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프랑스 유학 때 접했던 지역 밀착형 생활정보지가 한국에서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호기심 많은 동료들을 설득해 1989년 1월 대덕단지내에서 앞뒤 한장 짜리 ‘생활정보지’를 내기 시작했다.
대덕 단지내에서의 유통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낀 그는 그 해 9월 회사를 때려치우고 생활정보지에 승부를 걸기로 작심했다. 동료 연구원 7명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을 밑천 삼아 89년 1월 대전과 청주에서 ‘교차로’라는 생활정보지를 내기 시작했다.
주간으로 두쪽 혹은 네쪽 짜리 유인물에 당시 전봇대와 동네 담벼락에 붙어 있던 온갖 생활광고들을 무료로 ‘대서’해주면서 광고주를 모시고 독자를 만들어 갔다. 핵연료 개발자가 길거리 광고 설계사로 나선 것이다. 그의 나이 34살 때였다.
***인디애나대학 MBA 출신의 ‘벼룩’ 구상**
1990년 7월 4일. 대전역 앞 등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교차로’라는 전단지를 통해 전세방, 사글세방 소개와 과외 교사 찾는 광고들이 시민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할 때 경기도 부천 역 근처 15평 사무실에서는 막 인쇄를 마친 타블로이드판 4쪽 짜리 신문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당시 33살이던 주원석 사장과 직원 5명은 이제 5만부나 되는 신문을 부천 시내에 물샐 틈 없이 뿌릴 작전을 짜고 있었다. 타블로이드판 신문 위에 박힌 제호는 ‘벼룩시장’.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마친 주 사장이 5천만원의 자본금을 밑천 삼아 벌인 사업 아이템 1호였다. 유학 때부터 구상했던 사업 아이템이었다.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문을 찍어 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문에 낼 ‘광고 아이템’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소파에서 침대까지 집안 세간은 물론 동생과 친척들의 세간 까지 매물로 내놓기도 했다.
전파상에서 중고TV를 5만원씩에 사다가 4만원에 팔기도 했다. 그러나 천성이 낙천적인 데다가 ‘일하는 재미’가 있었다. 낼 때마다 줄광고가 느는 것이 보통 쏠쏠한 재미가 아니었다.
미국 유학 생활 때 필요한 물품을 신문의 안내광고(Classified Ad)를 통해 유용하게 구해 썼던 경험이 한국에선들 다를 리 없었다. 인디애나주 지역신문의 절반 이상이 안내 광고를 싣고 있었고, 안내광고 수입이 신문사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벤치마킹한 MBA 출신에게 이 사업 아이템은 어쩌면 자연스런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망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심정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하는 그이기도 하지만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온 그가 ‘길거리 신문’을 만들기로 작심했을 때는 나름의 확신이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도 4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벼룩시장이 연간 매출 수 천억원(업계 추산)을 올리는 오늘날과 같은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주 사장이 부천의 골목 골목을 누비며 사업의 ‘승산’에 자신감이 붙을 때 인천에는 이미 ‘인천광장’이라는 생활정보지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인접한 생활권으로 따진다면 서쪽으로 나아가야 했지만 선두주자의 벽이 너무 두터웠다.
남은 길은 서울로의 동진(東進) 뿐이었다. 이곳 역시 선두 주자가 있긴 했지만 어차피 승부는 서울에서 내야 했다. 본격적인 ‘동진 구상’에 들어갔다.
동업자들을 모아 91년 11월 서울에 첫발을 내디뎠다. 오늘날 미디어윌(벼룩시장의 새 회사명)이라는 ‘벼룩시장’ 건설의 신호탄이었다.
***노동운동가가 강남에 세운 깃발**
교차로도, 벼룩시장도 서울에 입성하기 전인 1991년 초. 지금의 원희룡, 함승희 의원과 함께 대학시절을 구로공단 야학에서 보냈던 이의범씨는 현장활동을 같이 했던 ‘동료’를 찾았다.
졸업 후에도 인천지역에서 현장활동을 하다가 수배까지 당하기도 했던 그가 느닷없이 꺼낸 말을 밑도 끝도 없이 ‘사업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대전에서 들고 온 교차로가 쥐어 있었다.
수배가 풀린 이후 대전에서 야학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남보다 빨리 대전에서 발행된 교차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신선했다. 노동 현장에서 활동해왔던 그에게 서민 대중에게 필요한 생활 정보를 무료로 공급해준다는 컨셉은 또 다른 ‘희망’일 수도 있었다.
기발한 발상이라며 ‘정말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설득하는 그에게 그의 동료는 ‘두 번’이나 거절했다. 이씨의 나이는 당시 27살. 이씨의 동료 또한 그 때 노동현장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상당수 그랬듯이 ‘별로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강경대 정국’으로 어수선하던 그때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다니던 회사(한국통신)를 그만 둘 요량으로 사업 구상에 푹 빠져 있는 이씨가 조금은 엉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씨의 결심은 확고했다.
세 번째 요청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할까. 가로수의 창립 멤버이자 가로수닷컴의 사업부 이사로 있는 장석교씨는, 이렇게 친구 따라 강남으로 진출했다.
노동운동가였던 이씨는 이 해 9월 ‘현장활동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 강남·서초 지역에서 ‘가로수’라는 생활정보지를 냈다. 서울 최초의 생활정보지의 탄생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386 운동권 세대의 촉망받는 한 사업가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제의 운동가들은 이제 타블로이드 4쪽 짜리 신문을 들고 강남 지하철 역과 길거리를 누벼야 했다.
경험도 일천한데다가 자본도 그리 많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채 기반도 닦기 전에 지역에서 노하우를 쌓고 동업자도 구한 지방 선두 주자들의 서울 공략이 시작됐다.
벼룩시장이 서울 전역을 2~3개 구씩 묶어내는 식으로 전면 공세에 나섰다. 92년 6월에는 대전을 기반으로 충청권과 경기도, 강원도, 영남 지역 10여 군데에서 이미 프랜차이즈 형태로 생활정보지를 내고 있던 가로수도 서울로 입성했다.
서울을 놓고 벌이게 되는 가로수, 교차로, 벼룩시장 간의 치열한 ‘3파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관련기사 1>지방 생활정보지의 맹주들
생활정보지 시장은 선점 효과(lock-in effect)가 아주 뚜렷하다. 일단 시장을 선점하면 후발주자가 그 아성을 무너뜨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교차로와 벼룩시장, 가로수가 서울에 입성할 때는 이미 전국적으로 생활정보지들이 배포되기 시작했다.
서울지역을 선점한 벼룩시장과 교차로, 가로수가 전국적으로도 생활정보시장의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 때 각 지역을 선점했던 지방 맹주들은 이들 3빅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두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인천의 인천광장을 들 수 있다. 90년 3월, 부천 벼룩시장 4개월 앞서 인천지역에서 발간된 인천광장은 지금도 여전히 인천의 대표 생활정보지로서 위상을 굳히고 있다. 부천벼룩시장이 서울로의 진출을 꾀한 데에는 인접 생활권역인 인천을 이미 인천광장이 선점하고 있었던 것도 한 이유이다.
광주와 전북 익산에서는 ‘사랑방’이, 경북 포항과 마산 창원에서는 ‘소식’이, 충북 충주와 제천에서는 ‘화제’가, 전북 전주에서는 ‘번영로’가, 그리고 제주도에서는 ‘5일장’이 각각 아성을 굳히고 있다.
3빅 가운데 전국적인 지역망을 구축하고 있는 벼룩시장과 교차로도 지역별로 우위가 서로 엇갈린다.
대전에서 출발한 교차로는 대전을 중심으로 충남지역과 대구를 비롯한 경북, 수원지역을 석권하고 있는 반면 벼룩시장은 부산으로 진출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과 부산이라는 양대 도시권역에서 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우위를 점하고 있다.
<관련기사 2>80년대에 선보인 지역 밀착형 신문들
***서울 영동에 등장한 ‘리빙 뉴스’**
***광고성 기사 싣고 아파트단지에 무료 배포**
지금과 같은 생활정보지의 효시로는 대전 교차로를 들고 있지만 1980년 대에도 생활정보지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1983년 당시 서울신문(지금의 대한매일) 전무 출신인 임 삼씨가 서울 강남 영동지역의 아파트 단지를 대상으로 지역 생활정보를 담은 무료신문인 ‘리빙뉴스’를 창간했다.
일본 산케이신문에서 발행하던 산케이리빙을 모델로 한 리빙 뉴스는 광고성 기사를 게재하는 대신 지역 주민들에게는 무료로 배포했다. 주부들의 투고를 실어 주민들의 관심을 유도했으며, 지역내의 소규모 상점들을 주로 소개했다.
리빙 뉴스는 처음에는 주간으로 1만부 정도를 발행했으나 나중에는 3만부 정도로 늘렸다. 지역도 영동지역에서 서초동·도곡동 판과 여의도판 등 3곳으로 확대했다. 4면이던 지면도 85년에는 12~20면 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경영상의 이유로 얼마되지 제대로 발행되지 못했다.
리빙 뉴스는 당시 주간신문이라도 등록이 까다롭던 시절에 발간됐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았지만 광고성 기사를 게재하는 대신 ‘무료’로 배포하는 방식을 도입해 눈길을 끌었다.
리빙 뉴스는 생활 정보를 싣는 데서 수익을 올리고 무료로 배포했다는 점에서는 지금의 생활정보지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광고 보다는 ‘광고성 기사’를 주수입원을 했다는 점에서는 지금의 생활정보지와는 구분된다.
***일간지가 발행한 최초의 생활정보 주간지 ‘매일생활정보지’**
***4쪽짜리 타블로이드판형에 지역 생활 뉴스 담아…독자들에게 무료 서비스**
80년대 생활정보지의 또 하나의 시도로는 대구의 매일신문이 발행한 ‘매일생활정보지’가 있다. 매일신문은 지역의 소매 광고를 흡수하고, 독자들에게 지역 생활정보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무가지인 매일생활정보지를 역시 1983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했다.
타블로이드판 8면으로 발행된 이 신문은 주말여행과 레포츠, 생활법률, 책 이야기, 음악, 시장 및 백화점 정보, 지역 뉴스 등 본지에서 소화하기 어려운 지역 밀착형 생활정보를 주로 담았으며, 부동산 매물정보 등을 무료로 게재하기도 했다.
본지 광고료의 30% 수준으로 광고비를 책정해 지역 소매상인들의 광고를 유치하는 전략을 폈다. 기사와 광고 비중은 80대 20 정도로 기사 비중이 많았다. 창간 2주년을 맞아 발행 면 수를 24면으로 증면했다.
당시 매일생활정보지 편집 및 제작을 담당했던 김정길 매일신문 부사장은 “뉴스 자체가 무척이나 다양화되고 분화돼 가는 추세였지만 본지만으로는 이러한 뉴스를 다 담아내기 어려웠다”며 “새로운 매체는 독자들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본지에서 소화할 수 없었던 지역 상권의 다기한 광고 수요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어 반응이 꽤 좋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매일생활정보지의 발행을 뒤이어 영남일보가 90년 6월부터 ‘주말영남’을 발행했으며, 대전과 광주 지역의 일간지들도 앞 다투어 무료 주간지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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