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아프간 공습이 사우디, 파키스탄 등 인접국가에 미묘한 정치적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특히 사우디 정부는 테러전쟁이 초래한 반미의 물결이 정권의 안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세이무어 허쉬는 최근 잡지 뉴요커에 기고한 글을 통해 사우디 왕족들이 왕조의 안전을 위해 지난 5년간 테러리스트 조직에 수억 달러의 ‘몸값’을 지불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세계 최대의 사우디 유전은 극소수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전면 마비될 만큼 취약하며, 권력다툼과 부패에 찌들어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사우디 왕조는 머지 않아 자폭할 위험성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말하자면 ‘제2의 이란’이 될 가능성을 경고한 것이다. 다음은 허쉬의 글 ‘왕의 몸값: 사우디 왕조는 얼마나 취약한가’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대략 지난 94년부터 미 국가안보국(NSA)은 파드 국왕이 이끄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족간의 전화대화를 도청해 왔다.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이 정권의 부패가 갈수록 심해지고, 국내의 이슬람 평신도들로부터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며, 너무나 약체화되고 겁을 집어먹고 있는 상태라 자신들을 타도하려는 근본주의세력들에게 일종의 보호자금 명목으로 수억달러를 제공하여 왕조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청내용에 따르면 지난 96년 사우디 왕가의 돈은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를 비롯해 아프간, 레바논, 에멘, 중앙아시아 국가 등 걸프지역 전반의 과격파 그룹들에게 건네졌다.
미 정보기관의 한 고위관리는 “96년이 고비였다”라며 “빈 라덴이 악당들을 죄다 끌어모아 대규모 작전들이 가능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우디정권이 “어두운 쪽으로 가버렸다”고 덧붙였다.
현재 미 정보기관 및 군부의 전.현직 고위관리들은 사우디 정권의 점증하는 불안정과 석유기지의 테러에의 취약성을 중동지역에서의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에 대한 가장 시급한 위협으로 꼽고 있다. 이들은 또 부시행정부가 9.11테러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실과의 대면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프가니스탄 공습이 시작되기 직전 파드 국왕과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사우디에서 만난 적이 있으며 이들의 만남은 전세계에 TV로 중계됐다. 그러나 파드 국왕은 지난 95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있다. 한 사우디 전문가에 따르면 국왕은 눈을 뜨고 의자에 앉아 있을 수는 있지만 오랜 친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그가 왕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왕실내의 극심한 권력투쟁 때문임을 NSA 도청내용은 암시하고 있다. 파드 국왕의 공식후계자인 왕세자 압둘라는 현 국왕의 배다른 동생으로 현재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 백악관의 전 보좌관은 “파드국왕의 생명을 계속 유지시키는 유일한 이유는 압둘라가 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사우디가 9.11테러 용의자 19명에 대한 계좌추적 등 수사협조 의뢰를 거부한 데 특히 분개해 있다. 19명중 절반 이상이 사우디 출신으로 추정되는데도 불구하고말이다.
한 전직 정보관리는 중동전역에 걸쳐 수천명의 사우디인들이 근본주의그룹에 가담해 있다고지적했다. 또다른 정보관리들은 FBI와 CIA 내에서 테러의 신원을 밝혀내는 데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주 한 고위 정보관리는 사우디가 비협조를 확인해 주면서 사우디 왕족의 “유일한 관심은 권력 유지’라고 말했다.
NSA 도청 내용을 보면 사우디왕족 대다수의 위선과, 이들이 왜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지난 수십년간 근본주의자들의 강력한 도전에 의해 기운이 빠져버린 사우디왕족들은 극심한 실업난, 교육결핍 등의 현안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슬람 교리에 대한 엄격한 해석(와하비즘), 종교경찰 무타와인을 동원해 기도를 강제하는 행위 등은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빰칠 정도로 보수적이다.
그리고 그동안 사우디의 왕자들-수천명이다-은 호화판 술자리, 창녀와 놀아나기 등으로 수없이 많은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도배해 왔다. 물론 모두 국가예산에서 나온 수십억달러의 돈으로 말이다.
NSA의 도청결과는 더 상세한 내용을 전해준다. 24년간 내무장관직을 독점해 온 나예프 왕자는 부하들을 시켜 왕자들이 창녀를 고용했다는 경찰증거를 없애버리도록 하기도 했다. 도청요약에 따르면 나예프 왕자는 어떤 경우에도 “고객리스트”가 누설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압둘라 왕세자와 나예프 왕자, 지난 83년부터 미국대사를 지내고 있고 반다르의 아버비 술탄 왕자, 수도 리야드장관인 살만 왕자 등의 전화 통화에는 흥미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파드국왕의 95년 뇌졸중 발작 이후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용해 먹으려는 의도로 왕의 건강에대한 대화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97년 1월 8일, 술탄 왕자는 아들 반다르에게 파드 국왕, 살만 왕자와 같이 했던 비행기여행에 대해 말을 했다. 술탄은 왕이 “약을 너무 많이 복용해 거의 말을 할 수 없었으며 비행기로 호송되는 죄수같았다”라고 말했다. 술탄의 코멘트는 며칠 후에 더욱더 중요해졌다.
NSA 도청결과에 따르면 술탄은 아들에게 국왕이 미제 F16 전투기를 사우디 공군에 도입하는 복잡한 거래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파드 국왕은 이런 계약을 성사시킬 능력이 없으며 누가 국왕의 이름을 써댄다고 해도 막을 힘조차 없는 상태였다.
도청결과를 보면 왕자들이 공공연하게 나랏돈을 등처먹을 얘기들을 나누고 있으며 어느 정도 퍼센티지로 먹느냐를 가지고 서로 싸우기도 한다. 반다르 왕자의 전화통화를 들어보면 그는 수백만달러의 ‘커미션’이 생기는 영국, 예멘, 소련간의 무기거래에 개입돼 있었다.
반다르 왕자는 지난 10월 9일 미 PBS와의 인터뷰에서 왕실부패에 관한 질문을 받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왕실에서 수천억달러를 사우디 개발을 위해 썼다면서“한 5백억쯤 왕실에서 유용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
그러나 압둘라 왕세자는 일관되게 부패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지난 96년 11월, 그는 메카 재정비를 위한 수십억달러의 국가 예산이 왕실쪽으로 빠져나간 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왕자들에게 예산외 지출을 통제하라고 촉구했다.(원유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에도 불구하고 사우디는 지난 10여년간 재정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엄청난 국가부채를 지고 있다)
몇 달후 압둘라는 다른 왕자들의 부동산거래를 차단해 왕족들의 불만을 샀다. 그러나 압둘라는 한술 더 떠 왕자들의 자식들이 사우디내 외국기업들과 파트너 관계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술탄과 다른 정적들은 압둘라가 사우디의 매우 특별한 외교관계를 위험에 빠뜨릴 지도자로보고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미국과 미국의 석유, 가스회사들을 곤경에 빠뜨릴 인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97년 7월 13일 도청내용을 보면 술탄 왕자는 워싱턴에 있는 반다르 왕자에게 자신이 압둘라 왕세자에게 “미국과 갈등을 빚지 말라”고 말했다고한다.
파드 국왕은 레이건행정부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반공작전과 소련에 대항한 아프간에서의 대리전의 주요 재정 지원자 역할을 했다. 원유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우디는 미국내에서도 엄청난 정치적 접근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반다르왕자를 통해 왕족들은 수억달러의 돈을 미국의 자선단체와 교육프로그램에 기부했다. 미국의 건설, 원유회사들은 세계최대의 원유생산국인 사우디와 매년 수십억달러 규모의 비즈니스를 할 수 있었다.
텍사스에 기반을 둔 원유공급회사 핼리버튼(딕 체니 부통령이 전 사장이다)은 사우디에 수많은 자회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클린턴행정부 시절 백악관은 통상적으로 사우디와 비즈니스를 벌였다. 사우디에게 보잉사 비행기 등 미국상품을 사도록 촉구하면서 말이다. 사우디는 중동의 원유생산국 중에서 미국의 충실한 지지자로 비쳐졌다.
CIA는 사우디내에서 어떠한 위험한 첩보작전도 벌이기를 꺼려했고 현지 요원을 채용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사우디 왕실에 대한 반대세력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잘몰랐던 것이다.
지난 94년 주유엔 사우디대표부의 1등 서기관이었던 모하메드 알킬레위가 미국에 망명신청을 했다. 변호사에 따르면 그는 1만4천건의 정부문서를 가지고 왔는데, 대부분이 사우디 왕족들의 부패와 인권문제, 테러리스트 지원에 관한 문서였다.
그는 사우디가 극단 이슬람그룹인 하마스 무장조직에 재정적 기술적 지원을 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은 그가 가져온 서류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그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우디는 또한 미국의 대외정책 절차에서도 특혜를 받았다. 사우디문제에 정통한 한 관리는반다르 왕자가 실무진을 만나는 일은 없으며 늘 최상층인사들과만 독점적으로 만났다고 전한다. 그는 “미국과 사우디간의 관계는 미 정부 내에서도 극소수 인사들만이 알고 있다”면서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9.11테러사건 이후 사우디왕실은 과격 이슬람그룹에 지원을 한 적이 없다고 반복해 말하고 있다. 사우디가 아랍의 자선단체들에게 정기적으로 기부한 돈이 실은 알카에다나 다른 테러조직으로 흘러들어갔을 수 있다는 보도가 날 때마다 사우디는 이를 전면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도청결과를 분석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이들의 입장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부시행정부는 사우디의 테러조직에 대한 재정지원 가능성이나 용의자 추적에 대한 비협조와 관련, 사우디 왕실과 대립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지난 9월 24일 부시는 사우디가 협조적이라고 천명했고, 그 다음날 사우디는 아프간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후 사우디를 방문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테러 용의자의 리스트를 사우디측에 전달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직선적이기로 유명한 그의 성격과는 달리 에둘러 대답했다. 자기는 수사를 담당한 FBI가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미국과 사우디간의 관계는 예전처럼 공고하다는 사족을 달았다.
미국의 아프간 공습에 대해 우려하는 이들은 국제 석유업계뿐만이 아니다. 지난 80년대 중반 CIA가 작성한 극비 보고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미 정보관리들도 크게 우려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극비로 분류돼 있는 이 보고서는 사우디의 유전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분석한 것이다.
한 전직 CIA 관리는 이 문서가 너무나 “민감해서” 컴퓨터가 아닌 타이프라이터로 작성됐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극소수 인사들만이 이 보고서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본 한 인사에 따르면 몇몇 테러리스트의 공격만으로 사우디의 유전을 2년간 가동 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이라고 한다.
사우디 유전의 안전에 대한 우려는 9.11 이후 더욱 절박해지고 있다. 정보기관의 한 전직 고위관리는 사우디의 지배자들을 “다이너마이트통 위에 앉아 있는 형상”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누군가가 화약통에 불을 댕기지 않을까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이다
한 저명한 중동원유사업가는 “미국은 사우디정권의 안정에 목을 맨 포로가 됐다”며 “이제 현실을 직시할 때가 됐다. 전쟁을 선포한 것은 빈 라덴이지만 빈 라덴은 1명이 아니다. 수천명의 빈 라덴이 있다. 게임의 룰은 그들이 정하고 있다. 이 전쟁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다.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 무기들은 이 전쟁에서 전혀 쓸모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 30년간 사우디 정부와 긴밀히 일해 온 그는 ‘사우디 정권은 머지 않아 자폭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9.11 테러범들에 대해 “이제 시기는 그들이 결정한다. 그들이 사우디에서도 비슷한 작전을 벌인다면 원유가격은 배럴당 1백달러로 오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4배가 넘는 가격이다.
지난 80년대 사우디 지도부는 정권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덜기 위해 정부의 권한을 무타와인(종교경찰)에 대폭 이양했다. 이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무타와인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미 정부의 한 사우디 전문가는 사우디 종교지도자들이 언론과 교육을 장악하도록 허용된 데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그 결과 사우디 박사학위 소지자의 3분의 2가 이슬람관련 연구분야에서 배출됐다.
최근 사우디언론에는 반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백악관과 외교관들은 상황이이 지경이 되도록 거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백악관의 한 전직 관리는 “미국은 사우디 왕족과의 사적인 계약에 얽매어 있다”면서 “그에 따른 온갖 비난을 사우디 언론으로부터 받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사우디에서 수년간 외교관으로 일한 바 있는 한 미국인은 사우디의 군대에 대해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땡볕이 내리쬐는 연병장에서 사관생도들이 땀을 흘리며 훈련을 받고 있는 동안, 교관들은 시원한 대형천막의 그늘에서 찬 음료수를 마시며 마이크로 명령을 내리는 장면을 봤다는 것이다.
이 외교관은 “이 젊은이들중에 몇 명이나 지휘관을 따라 목숨을 바칠 것인지...” 생각했었다며 “원리주의자 20-30명만 침투해도 군대 전체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의 조직으로 어떻게 거침없고 신속하며 동기도 충만한 테러조직과 대항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다.
그는 미국이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사우디는 수십년간 (미국의) 응석받이였고, 부패해 왔다. 미국은 사우디 왕가의 용병”이라는 것이다.
미군의 한 고위장성은 “어떻게 사우디가 미국과 적대하지 않으면서도 변화를 이뤄낼 수 있도록 돕는가가 미국의 딜레마”라고 말했다. 사우디의 거리에서시위를 벌이는 젊은 근본주의자들을 가리키며 그는 “아이들은 아버지보다 크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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