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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언론이 희망이다 <4>

"편집과 경영, 正道를 지켜라"

기말고사가 끝난 후 학생들과 옥천신문사를 찾아갔다. 경부고속도로 옥천 톨게이트를 나와 첫번째 신호등에서 좌회전한 후 1백m 정도를 더 가면 왼쪽으로 옥천신문사가 있다. 2년 전 처음 옥천신문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무실에는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의 소음이 습기찬 바람과 함께 창문 너머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과거 농촌지도소로 쓰이던 2층 건물 중 1층을 사용하고 있다. 신문사 사무실이 1층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여느 지역신문사와 외관상으로는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25평 남짓한 신문사 사무실의 입구에는 지난호 신문들이 쌓여 있고, 그 안에는 7명의 직원들이 제각기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독자 관리를 맡은 이사라 씨는 잇달아 걸려오는 생활광고 전화 접수를 받느라 분주하고, 신문 판촉을 담당하는 김덕배 씨도 외지 사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옥천신문을 보면 고향소식을 잘 알 수 있다며 판촉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응접 의자에는 인사차 들렸다는 유제구 군의회 의장이 앉아 있었다.

사무실 안쪽에는 편집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옥천신문사에는 사장이나 편집국장의 방이 따로 없다. 편집실 안에는 4대의 컴퓨터와 책상, 그리고 조그만 회의용 탁자가 전부였다. 필자가 2년 전 들렀을 때는 기자들이 프린터로 인쇄한 기사와 광고카피를 조각조각 풀로 붙여 지면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모두 컴퓨터 앞에 모여 앉아 지면편집을 하고 있었다. 1999년부터 대지편집을 그만두고 컴퓨터로 화상편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한흥 발행인은 컴퓨터로 하는 것이 손으로 하던 때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고 투덜거린다. 바쁜 탓인지 편집기자들은 간단히 인사만 건넨 후 자석에 끌리듯 컴퓨터 앞으로 되돌아갔다.

대부분의 한국 지역신문은 10명 남짓한 직원, 20~3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신문을 만들고 있다. 옥천신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옥천신문은 여느 지역신문과 다르다. 달라도 이상할 정도로 다르다. 가장 특이한 점은 지역신문으로서 흑자를 낸다는 점이다.

<사진 옥천신문11> 신문사 현판 앞에 모여 선 옥천신문 임직원들

***지역신문중 드물게 흑자 경영**

신문도 기업이고 자선단체나 시민단체가 아닌 이상 이윤을 남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주간 지역신문이든 지방일간지든 중앙일간지든 한국에서 수익을 올리는 신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빚에 허덕이고, 그래서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는 신문이 허다하다. 지방일간지나 지역신문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한국언론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대부분의 지역신문은 적게는 수백만 원, 많게는 수천만 원의 적자를 감수하며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지역신문이 적자인 탓은 독자를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각 시군구마다 평균 2개의 신문이 발행되고 있지만, 지역주민들은 자기 지역에서 어떤 신문이 나오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독자가 부족하니 광고주를 찾기 힘들다. 보는 사람들이 적은 신문에 광고해봐야 그 효과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들을 유인할 만한 알찬 신문을 만들고, 적극적인 판촉활동을 벌여야 한다. 그러려면 충분한 재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직까지 지역신문에 투자할 만한 자본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결국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소한의 취재를 해서 신문을 만들 수밖에 없다. 지면은 계속 부실해지고, 독자는 더욱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나마 연명하기 위해 홍보성 기사를 써주거나 촌지와 향응에 넘어가 청탁 기사를 쓰는 지역신문이 허다하다. 지역주민은 배제한 채 지역유지를 위한, 신문사 직원을 위한 신문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런데 옥천신문은 흑자를 보고 있다. 촌지나 향응은 절대 받지 않는다고 한다. 압력이나 청탁도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비록 월 평균 수령액이 1백만 원도 안 되는 박봉이긴 하지만 기자들에게 제때에 월급을 주고 있고, 창간 초기에 졌던 빚을 갚아나가고 있다.

2001년 7월 27일 현재 옥천신문의 유료 구독자는 3천15명이다. 매일매일 독자 수를 확인한다는 오한흥 발행인은 계속 독자들이 늘어난다고 말한다. 2000년도의 옥천신문 구독료 수입은 8천8백50만 원으로 광고료 수입 1억4천2백90만 원과 기타 소득 9백78만 원을 합쳐, 2억4천1백만 원의 매출액을 올렸다. 이중 인쇄비와 신문사 운영비로 1억3천만 원을 썼다. 8명 직원의 인건비로 9천여 만 원을 지급했다. 세금을 낸 후 약 7백만 원의 이익을 올려 빚을 갚았다.

<사진 옥천신문2>지난 8월 15일 '조선일보 바로 보기 옥천 시민 모임' 창립 한 돌을 맞아 옥천을 찾은 안티조선 운동가들이 장터에서 조선일보 구독중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옥천신문이 흑자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역 형편으로 봐선 지역신문이 될 만한 곳이 아니다. 충청북도 끝자락과 대전광역시 사이에 끼어 있는 옥천은 전체 인구 6만, 가구 수 1만8천의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행정상으로는 충북이지만 대전이 고속도로로 20분밖에 걸리지 않아 실생활권은 대전이다. 오한흥 국장은 전국에서 가장 도세가 약한 곳이 충북이고, 충북의 3개 시 8개 군 중 가장 세가 약한 곳이 옥천이라고 설명한다.

***8년간의 희생과 투혼으로 이룬 '성공'**

그런데 신문은 어느 지역보다 넘쳐난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간지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대전, 충남에서 발행되는 신문이 모두 들어오기 때문이다. 옥천군청 기자실에는 무려 9개 지방신문의 주재기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옥천신문이 살아남았다. 사실 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신문이나 다름없다.

옥천신문이 처음부터 이렇게 잘 나간 것은 아니다. 옥천신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지난 8년간 옥천신문 직원들의 희생과 투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옥천신문의 싹은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 열기 속에서 태동했다. 당시 옥천의 젊은이들이 지역신문의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뜬 것은 87년 옥천청년애향회가 발행하기 시작한 애향회보를 통해서였다.

<사진 옥천신문3>지난 8월 15일 옥천의 물총 독립군과 안티조선 운동가들이 정지용 흉상 앞에서 옥천 독립선언서 낭독식을 갖고 있다.

비록 석 달에 한 번 발행한 소식지였지만, 애향회보는 지역주민들로부터 예상 밖의 좋은 호응을 얻었다. 6월항쟁 이후 신문 발행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풀리면서 애향회보를 지역신문으로 바꾸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88년 5월 한겨레신문이 창간됐고, 1988년 겨울에는 충남 홍성에서 주간홍성이 창간되면서 옥천에서도 신문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1989년 5월, 보증금 1백만 원과 1년 임대료 1백만 원을 주고 거미줄로 가득한 임업협동조합 가마니창고를 신문사 사무실로 빌렸다.

그러나 정기간행물등록법상 필요한 자본금 5천만 원을 마련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만한 돈을 선뜻 내놓을 사람도 없었고, 누가 준다 해도 받을 수도 없었다. 지역주민을 대변하는 신문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지역주민 2백20여 명이 공동출자한 군민주 신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옥천신문이 지역사회운동을 기반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조선일보반대운동의 성지처럼 되었지만, 창간 당시 옥천은 지역사회운동의 불모지였다. 오랜 중앙집권체제로 옥천은 주민 참여의 싹을 틔울 희망이 없는 황폐한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YMCA나 농민회 조직조차 없었던 옥천은 시민사회의 구성 성분을 찾아보기 힘든 전형적인 우리 나라 지역사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옥천신문의 군민주 실험도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비록 2백20여 명의 주민들이 주주로 참여했지만, 지역신문을 만들려는 의지보다는 얼굴을 보고 주식을 사준 지역유지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주총회를 하더라도 얼굴을 내미는 사람은 열댓 명에 불과했고, 이사회마저도 성원이 안 될 때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신문을 직접 제작하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끌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옥천과 같은 농촌 지역에서 신문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전문인력들을 공개채용하기로 하고 지방일간지에 구인광고를 냈다. 현재의 이안재 기자와 송현미 기자가 당시 공채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공채한 직원들도 언론에 대해 문외한이긴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대학에서 학보사기자나 교지편집을 해본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언론매체에서 일한다는 생각보다는 지역사회운동을 한다는 사명감으로 옥천신문에 들어왔다.

옥천신문의 창간호는 1989년 9월 30일 나왔다. 창간 초기에는 기사가 담긴 원고지를 들고 인쇄를 맡은 대전의 중도일보사에 가서 편집을 했다. 오한흥 발행인은 당시 중도일보 김응재 제작국장으로부터 기사 배열방법, 기사의 중요성 점검, 기자재 구입처 등과 같이 신문 만드는 데 필수적인 노하우를 전수받았다며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규모도 작고 경험도 없었지만 옥천신문 사람들은 신문 만드는 원칙만큼은 철저히 지키기로 했다. 우선 촌지나 향응을 받지 않기로 했다. 관공서와 유지들이 주는 봉투는 정중히 거절하거나 돌려주었다. 그것은 옥천신문을 오늘날 지역신문으로서 성공할 수 있게 만든 가장 큰 비결이기도 했다.

<사진 옥천신문4>옥천의 물총 독립군 김성장 선생이 쓰신 '옥천 전투' 휘호

***주민계도용 신문 자진 반납**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임기를 채우고 지역을 떠나면 그뿐인 지방일간지의 주재기자는 지역사회에서 윤리적인 비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신문이 지역주민들에게 거의 읽히지 않기 때문에 지역여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지역신문은 지역사회와 함께 남아 있어야 한다. 지역주민들을 속이는 지역신문기자나 지역주민들로부터 손가락질받는 지역신문은 결코 존재할 수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다는 것이 옥천신문 사람들의 판단이었다.

촌지와 향응의 유통로이자 언론 부패의 산실인 기자실엔 아예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옥천에 본사를 둔 신문이 옥천군청 기자실에 눌러앉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1996년엔 옥천군청에서 구입해주던 주민계도용 신문 400부를 스스로 중단했다. 당시 유료 구독부수가 1천 부에 불과하던 때였다.

순식간에 구독료 수입이 40%나 감소할 것이니 경영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내부적으로 반대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해야할 일이기에 단행했다고 오한흥 발행인은 회고했다. 옥천군민의 귀한 세금에 기생하는 신문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옥천군에서는 계도지가 아예 사라졌다.

옥천신문이 보여준 무모할 정도의 결벽성은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편집권 독립을 지킬 수 있게 했다. 옥천신문에는 성역도 없고 청탁이나 압력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역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역유지들은 옥천신문에 압력을 가하거나 회유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크게 보도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군수나 군의원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검찰, 법원, 경찰, 지방언론 등 지방권력의 횡포와 비리에 대한 기사가 잇달았다. 지역유지의 동정이나 홍보성 기사로 지면을 채우는 여타 지역신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문이 되었다. 최근의 사례만도 다음과 같다.

1999년 11월에는 지역유지들로 구성된 ‘범죄예방자원봉사위원회’가 검사들의 회식비와 전별금을 지원하는 등 애초의 취지와 달리 운영되고, 특히 위원들 중 일부가 선도해야 할 청소년에게 오히려 성희롱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 옥천신문6>동이면 석탄리 자택의 오한흥 편집국장

***지방권력의 횡포와 비리, 가차없이 폭로**

1999년 12월에는 청주방송이 개국 2주년 기념방송을 하면서 옥천군청으로부터 홍보비 조로 1천만 원을 받은 사실을 폭로했다. 청주방송 박재규 본부장은 “경영상 어려움이 있어 자치단체로부터 도움을 받은 게 사실”이라며 “이후부터는 어떤 명목으로든 방송과 관련 금품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고 결국 전액 반환했다.

2000년 3월에는 옥천군의회 의원들의 관광성 해외연수를 고발해, 군의회의 사과와 연수비의 일부를 환불토록 했다. 옥천군의회는 해외연수 관련 조례를 개정해 ‘해외연수의 경우 의정자료 수집, 연구활동이 현저히 관광성 여행에 그친 때에는 여비를 반납한다’라는 조항을 만들었다.

2001년 3월에는 옥천군수가 자신이 7개월 전에 구입한 땅에 14억 원의 예산을 들여 종합개발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에 대해 유 군수는 “토지소유자와 사용 합의가 잘 안 되기에 원활한 사업추진을 위하여 군수가 아닌 자연인 자격으로 순수한 사비로 구입하고 옥천군에 우선 사용토록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옥천신문은 '조선일보를 해부한다'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옥천을 조선일보반대운동의 중심지로 만들기도 했다. 서울에서 개혁적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프티부르주아 운동이던 안티조선운동을 옥천신문은 지역주민과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풀뿌리운동으로 전환시켰다. 조선일보 구독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를 오한흥 발행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족의 최대 수치인, 그래서 ‘국치일’로 일컫는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을 ‘조선의 행복을 위한 조약’이라고 기록한 조광의 후신 월간조선이 버젓이 살아 숨쉬고, 제 형제, 제 민족을 일제 군국주의 전쟁의 총알받이로 나서라고 선동한 조선일보가 민족정론지임을 자처하고 1등 신문을 구가하는 현실. 그런가 하면 독립군이나 그들의 자손들이 사글세 단칸방에서 싸늘히 식어갈 때 친일 반민족자들이 힘주어 내미는 기름진 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뒤집힌 상식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정답을 구해야 한다. 조선일보의 명백한 반민족 행위에 대해 옳은가, 그른가를 다시 논하는 건 시간낭비다. 너무도 늦었다. 자투리 구독료가 아까워 월말까지 미룰 것도 없다. 지금 당장 조선일보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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