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 달러 상당의 대북 비밀지원 문제를 둘러싸고 퇴임하는 김대중 정권의 해법과, 각 정치세력이 제시하고 있는 해결책이 정면충돌하고 있다. 그 결과, 대선 이후 승세의 주도권을 확고히 다져 오늘의 역사가 요구하고 있는 과제를 감당해나가야 할 노무현 정권 성립 과정에 중대한 혼란과 내부적 역량소진이 야기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치경제적 개혁과 한반도 평화를 목표로 삼은 대선의 성과가 냉전수구세력을 비롯하여 이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미국 부시정권의 강경노선이 추진하고 있는 <남북 대화 구조 파탄 및 역 봉쇄 전략형 대응력 약화 전술> 속으로 급속하게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뜻한다.
탈냉전 개혁 세력의 승리가 얻어낸 결실이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몰수되면, 선거 이후의 상황은 역전(逆轉)의 과정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바른 관점을 세워 반동의 기류를 막아내지 못하면, 민족적으로 자해적 조처를 계속 추가, 우리의 국제적 행동반경은 점차적으로 위축되어갈 것이다.
***대북 비밀지원 공개논란과 진상규명 요구는 민족적으로 자해적 조처**
남북간의 비밀교섭은 종속적 냉전구조가 엄존하고 있고 미국의 전쟁의지가 최고도로 달한 상태에서 한반도의 평화구조와 민족경제의 통합기반을 형성해 가기 위해 밖으로 드러내서는 아니 될 불가피한 국가 기밀적 차원의 조처이자 민족적으로 자기방어를 위한 틀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평화통일 지향적 결단이 요구되는 대통령의 역사적/헌법적 임무수행은 대단히 제한되거나 또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 불가능해지기조차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관계와 외교 전략상 선택하기에는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투명성과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내치상의 기준을 내세워 이에 대한 공개논란과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그에 따르고자 하는 것은 <자기방어력 해체>를 가져올 뿐이다. 이는 근ㆍ현대 외교사의 기본지식도 되어 있지 않은 자세이다. 또한, 공개논의의 과정에서 정작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는 국가기밀의 노출로 외세의 개입과 간섭의 여지를 확대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민족 내부의 역량을 극도로 훼손하고 마는 우를 범하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공개논의와 조사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세력은 명분상 민주주의적 합의의 가치와 그 중요성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로는 정파적 이해관계가 주도하면서 민족적 이익이 희생될 수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대북 지원에 대한 적대적 또는 민족 분열적 태도를 취해온 세력들이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파적 이해관계와 관련이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남북관계의 진전에 우호적 자세를 보이는 것이 전제이나 이들은 한반도 평화구조의 주체적 형성이라는 과제와 관련해서 한번도 의미 있는 노력과 정치적 선택을 해본 적이 없다. 민족의 장래보다는 자신들의 정파적 이해가 언제나 앞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손에 관리되는 <절차적 정당성>의 정치적 결과는 민족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길이 아니라, 그것을 가로막는 법적, 제도적 장애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로써 노무현 정권 성립 속에 담긴 탈냉전개혁의 역사적 요구가 전개되는 것을 봉쇄,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것이다.
***냉전수구세력의 반동적 역공의 공간을 열어주지 말아야**
대선 이후 패배의 타격 속에서 냉전수구세력의 정치적 주도권을 복원시키는 방법은 탈냉전-역 봉쇄전략의 전술적 문제를 부각시켜 이것을 중심으로 냉전체제의 논리를 정당화 내지는 재강화 시키는 것이다. 방법상의 문제제기를 통로로 본질을 치고 들어가는 것이다.
즉, 선거 패배로 인해 정치적 궤멸상태를 우려했던 냉전수구세력은 대북 비밀지원을 고리로 하여 반동적 역공의 전략을 펼치고 있으며, 그것은 김대중 시대의 부담을 털고 가자는 노무현 진영 내부의 일부 정치적 입장과 맞아 떨어져 절충 내지는 타협의 과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노무현 당선자와 그의 진영이 이 문제를 놓고 공개거론의 단서를 스스로 마련하고 애초 "단호한 조사 규명"에서 이후 "국회에서 해결"이라는 해법을 내놓은 것은 상황에 따른 수위조절만 있었을 뿐, "대북 비밀지원과 관련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적극적 방어의지가 없음"을 일관해서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권 출발의 초기, <김대중 요인>으로 인한 부담해소를 자신의 진영이 아닌 야당의 주도 아래 이루려는 전략으로 오해 내지는 해석될 가능성이 있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그것은 냉전수구세력의 주도권을 강화시켜 노무현 정권 성립을 통해 표출되어야 할 역사적 헤게모니의 정치적 지위를 취약하게 만들고, 역 봉쇄전략에 필요한 국가 권력적 차원의 중대한 수단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노무현 정권 성립의 역사적 의의 자체를 무너뜨리는 요인제공 행위이다.
비밀 교섭의 범위가 축소되고 남북관계의 공개적 통로가 확대되어가는 것은 민주주의적 정책결정과정에서 당연히 요구되는 바이자 바람직한 상태이다. 권위주의적 권력 개념으로서의 <통치권 논리>는 정책추진의 지지 기반 자체를 배타적으로 협소하게 만들게 된다는 점에서 오늘의 현실에서 수용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남북관계와 관련한 대통령의 선택과 결정이 보다 광범위한 민주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는 분단을 유지하는 조건의 점진적 소멸이다. 비밀 교섭의 영역은 이에 따라 줄어들어야 하며, 여타의 조처들은 공개적 제도화의 단계로 들어서야 한다.
냉정하게 평가해볼 때, 현재의 우리 현실은 이러한 공개적 제도화의 단계에 들어서기에는 적대적 환경이 압도하고 있으며 따라서 지도자 개인의 분단극복 의지가 보다 중요한 정치적 돌파구 마련의 응집력이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현 단계로서는 이러한 비밀 교섭의 정치적 선택이 갖는 민족사적 의미를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 온당하다.
***미국의 대한반도 압박정술 대처 안이한 정치권**
밖으로는 북한과 미국 간의 대결양상이 거칠어지면서 한반도의 군사적 위기는 날로 점증하고 있는 판국에, 이에 대한 여야를 초월한 통합적 대응력은 비탄과 절망을 자아낼 만큼 약화되고 있다. 미국이 대 이라크 전쟁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여유가 생겼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미국은 이미 북한에 대하여 군사적 행동이 불가피함을 내세울 전제와 조건들을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가며 만들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스스로 속수무책의 상황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가령 미국의 한반도 주변 군사력 증강에 대하여 아무런 대응 발언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은 현재 한반도가 처한 상황의 위험성을 절감하고 있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경우, 미국 부시정권의 대외정책이 강경기조로 가는 것을 막을 생각보다는 이라크 문제에 대한 공화당의 선점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북한 문제를 공세적으로 접근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민주당은 북한이 이라크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고 강조하면서 이라크 이후의 대외정책상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공화 모두 대한반도 정책에 있어서 외교적 해결의 가치를 중시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전방위적 대미외교의 급박성을 의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대응은 현재 실로 안이하기 짝이 없다.
대북 비밀지원 문제의 국제적 부각은 또한 북한에 대한 현금지원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대북 봉쇄전략, 혹은 북한 붕괴전략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측면도 있음을 놓칠 수 없다. 미국으로서는 대북 봉쇄전략의 효율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일본 조총련계의 대북 송금 루트를 장애로 인식하고 있으며, 남한의 대북 송금도 이와 동일한 각도에서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의 밑바닥에는 대북 봉쇄수단의 강화가 아울러 강구되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남한의 대북 지원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현금지출의 통로는 차단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그에 따라 북한의 경제난은 가속화, 심화되면서 김대중 정권 시기에 마련했던 각종 남북 협력 사업과 교류의 기초는 중대한 기로에 처하게 될 수 있다.
이에 덧붙여 미군철수 문제 거론은 과거와 달리, 미군 철수가 북에 의한 남침의 유도 요인이 된다기보다는 미군철수에 의한 미군의 희생요인 제거를 바탕으로 미국의 한반도 군사전략 추진이 이루어지게 됨을 뜻한다는 점에서 그 논란의 목적이 뚜렷하다.
미국은 "한국인들이 원하면 미군 철수를 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미군철수론 제기 자체를 봉쇄하려는 새로운 방식의 우회적 협박전술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미국의 한반도 정세 접근의 군사적 성격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한국인들이 전쟁방지를 위해 미군주둔을 요구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고도의 논리가 개발된 것이다.
***노무현 진영의 문제**
사태가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북 비밀지원 문제는 한반도 문제 해결에 대한 햇볕정책 파산을 겨냥하는 <김대중 대통령 격하 국제 캠페인>으로 번지고 있다. 돈을 주고 정상회담을 한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받을 자격과 의미가 없다는 식의 논지를 전개한 월스트리트저널의 사설은 그러한 움직임의 일단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맞춤형 봉쇄전략에 적극 반대하고 나선 김대중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역 봉쇄전략의 진지>를 타격하는 전략임이 틀림없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문제처리 방식이 논란이 되고 있으나, 그보다 노무현 당선자 진영의 대선 이후의 정치적 행보와 한반도 문제 해결의 자세에 중대한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힘의 중심은 엄연히 노무현 당선자 진영에 있다는 점에서 사태해결의 책임비중은 원인 제공자인 김대중 대통령보다는 노무현 당선자 진영에게 더욱 크게 존재한다. 이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하여 노무현 정권은 원인제공과 관련한 책임 공박보다는 설득력 있고 현실성 있는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 관계 해결전략이 취해온 자세는 노무현 진영에게 부담이 아니라, 앞으로도 여전히, 그리고 대단히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노무현 당선자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적극 엄호를 하지 않고 도리어 그에 대하여 해명의 압박을 가하고 있거나 또는 그러한 움직임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심히 우려된다.
가령, 노무현 당선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김대중 대통령과 먼저 깊이 대화를 갖고, 그 대화의 논지를 중심으로 오늘의 상황을 푸는 위치에 있어야만 남북관계의 내부적 주도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동시에 향후의 행동반경과 관련한 중심을 제대로 잡을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역 봉쇄전략의 축을 확고히 건설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당선자 자신과 그 진영의 자세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과 관련한 좌표설정에 있어서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동요하는 양상을 보였고, 그 흔들림의 공간과 시간 속에 냉전수구세력의 반격이 가능한 입지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가 오기까지는 당선 이후의 정치적 행보가 최대한 주력해야 할 바에 대한 인식의 불투명성 내지는 불철저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보여진다.
***노무현 진영,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적극 엄호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전력투구로 (그 방식의 선택에 있어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수용이라는 대목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자신의 권력기반을 안정시켰던 것과 같이 노무현 당선자의 경우 현재 위기의 강도가 더해가는 한반도 문제 해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부적으로는 선거승리를 에너지로 삼아 극우냉전수구세력을 제외한 일체의 정치세력의 통합을 기반으로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마련하고, 이에 기초하여 대미관계에 있어서 보다 분명하고 강력한 역 봉쇄전략 추구의지를 밝혀갔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는가? 선거 승리 이후 그 힘으로 개혁전선의 결집을 도모하기보다는 내부의 편 가르기가 먼저 이루어져 역량의 분열을 초래했고 이것은 이후 노무현 진영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다소 신랄하게 말하자면, 노무현 세력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통합 전략을 택하기보다는, 우군진영 내부에 소모적인 적대 전선을 형성하는 종파주의적 선택을 하고 말아 버린 결과이다.
또한 대미관계에 있어서도 역 봉쇄전략과 관련한 <노무현 독트린>의 인식을 강화하기보다는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과 충돌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리기에 급급함으로써 대미관계의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공간을 스스로 위축시키고 말았다.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하여 미국이 어떤 점을 오산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 우리 민족과 생각이 다른지 명백하게 밝혀나가면서 미국 부시정권의 노선교정을 위한 공세적 대응을 상당부분 포기해버린 것이다.
이는 미리 알아서 물러선 것이며, 미국의 <노무현 길들이기 전술>에 말려들어갔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새로 등장하게 된 노무현 정권을 미국 자신이 어떤 각도에서 설득해야 하는지 고민하도록 만드는, 그래서 대미 발언권의 영역을 보다 자유롭게 확대해나가는 외교 전략의 고단수를 보여주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부시정권과 미국 언론의 노무현 진영에 대한 파상공세를 너무 두려워했든지 아니면 이에 대한 대응 의지가 박약했든지, 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것은 민중이 가져다 준 혁명적 정세를 - 환경적 요인이 불리하긴 했으나 - 정세 대응방식의 미숙으로 인해 노풍을 가라앉히고 말았던 지난해의 상황과 다를 바 없이, 또다시 무력하게 함으로써 탈냉전 개혁세력의 역사적 헤게모니 자체를 자해하는 결과에 봉착하게 한다. 선거 승리 이후의 열정과 기대, 그리고 환호의 에너지가 노무현 정권 임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어느새 식고 있는 것은 보수언론과 냉전수구 세력의 반격에만 그 이유를 돌릴 수 없는 것이다.
***냉전형 실정법의 틀 속에 묶이는 순간, 냉전격파의 수단은 사라진다**
대북 비밀 지원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 사건의 파장을 감당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는가에 대한 생각부터 하는 것으로 사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만에 하나 어떤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판도라의 상자를,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싶다고 함부로 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상규명 후 대처방안 논의" 또는 "특검 조사와 사법처리"라는 방식의 제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정세와 남북간의 특수상황에 대한 이해의 극단적인 부족이거나 또는 다른 악의적인 저의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역사적 현실은 남북간의 자주와 평화의 진로에 대하여, 주변 열강과 내부의 수구냉전 세력의 반동적 역습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고 그에 따라 민족의 명운이 흔들리기 쉬운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냉전체제의 돌파는 그 방법의 선택이 냉전체제가 유지해온 절차의 정당성 개념이 용인하는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부정의 부정>, 즉 기존의 방식을 통해서 기존질서의 타파가 일정하게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식 자체도 결국에는 부정해야 비로소 진정한 변화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봉건시대의 극복은 봉건시대의 사상과 논리로 일단 그 논지가 전개되지만, 그 다음 단계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방식에 집착하는 한 봉건시대 자체의 온존을 피할 수 없다. 서구 근대사회의 태동이 초기에는 종교적 언어를 통해서 그 극복의 단서가 형성되지만, 그 언어에만 갇혀 있는 한 그 사회적 변화는 서구 봉건사회를 지배해온 정신세계의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무슨 이야기인가? 전혀 다른 언어와 논리, 그리고 접근과 방식이 창출되지 않고서는 구시대의 타파는 가능할 수 없으며, 그 와중에 구시대의 헤게모니는 반격의 전열을 정비하여 반동의 시대를 열게 되어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현재 우리의 현실에서 미국의 적대적 대북 정책의 군사적 성격이 노골화되어가고 있는 형편을 고려하지 않는 논의는 민족 전체의 안위를 위험하게 만들어간다.
한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은 냉전과 분단을 전제로 한 기존의 실정법적 틀, 그 자체와 결별 내지는 격파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러한 각도에서도, 냉전형 제도의 절차적 정당성을 내세워 국내법적 틀 속에서 규정할 수 없는 한반도의 장래를 구속하려 한다면 이는 냉전시대의 극복을 원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에서 남북관계를 처리하는 대통령의 자세가 시대정신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에 있으며, 이제부터 할 일은 바로 이러한 요구를 제도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기존의 현안에 대하여 반드시 공개적 논의와 진상규명, 투명성의 확보와 사법적 사태해결의 과정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 문제에 대한 책임 있는 논의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남북관계 해결의 방식을 창출해낼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공개규명 이후, 상황 대처방안은 있는가?**
그에 앞서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이 사건의 파장을 감당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첫째, 사태의 진실규명을 외치는 이들은 남북간의 중요한 논의와 협의가 외부에 투명하게 공개될 경우, 주변 열강들의 개입과 간섭의 여지가 확대되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남북간 교류협력과 관련된 협상의 내용 등이 노출될 경우 한반도 전체의 대외 협상력과 자기 방어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둘째, 돈의 성격을 정상회담 대가성으로 몰아가려는 움직임도 있고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을 통해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겨냥, 남북 정상간의 만남이 뇌물거래에 의한 소산임을 강조하고 나선 것처럼 남북 대화의 수장들을 뇌물 공여와 뇌물수수자로 만들어 버린 이후 대화의 지속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셋째, 남북관계와 관련한 기밀 사항이 이렇게 공론의 장으로 끌려감으로써 비밀관리에 대한 정치적 통제력을 상실한다면 관련 인사들의 소신과 책임의식을 꺾게 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상호 대화의 신뢰성은 보장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전례를 만들게 된다. 남북대화와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행위는 민족사적 요구에 충실하고 고도로 훈련된 인적자원이 감당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이다. 이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은 우리 자신의 역량을 내부에서 파괴하는 어리석음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이번 사안은 향후 20년에서 30년간 <비밀 통제 문서(classified documents)>로 묶어 진상접근이 차단되어야 하며, 김대중 대통령은 이로 인한 정치적 공격과 사법적 판단으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차기 노무현 정권에게도 남북관계의 일정한 영역은 공개적인 논의와 투명성 논란으로부터 방어, 보호받는 <국가 최고 기밀>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권한을 부여하는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노무현 정권에게만 한한 사안이 아니라, 향후 누가 정권을 담당하게 되든 간에 분단시대가 종식되기 전까지는 민족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대통령에게 주어지는 통일과정의 비상권한으로 정리되도록 해야 한다.
비상권한의 문제가 민주주의의 요구와 충돌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과거 권위주의적 통치체제가 지배적이었던 상황과는 달라진 오늘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비교논법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현실에서 비상권한의 범위는 극도로 제한되지 않을 수없으며 그것이 주어진다 해서 권위주의적,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 강화와 비대화가 전개되기는 이미 어렵다. 중요한 것은 냉전형 제도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방책을 도모하는 작업이며, 그에 필요하다면 대통령의 책임 있는 권한 행사의 여지를 인정하고 확보하도록 해주는 것이 옳다.
***국가최고 기밀과 대통령의 비상권한 문제**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현재적 시점에서의 비밀정보공유는 대통령과 야당 책임자로 한정하거나, 대통령과 야당 책임자, 그리고 의회의 관련 특위 등 극히 제한된 범위로 설정, 헌법상의 대의적(代議的) 책임과 권리를 일정하게 지켜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밀누설은 엄중하게 처벌하도록 한다. 이 비밀영역은 분단극복의 단계에 따라 점차적으로 축소하면서 투명성의 비중을 높임과 동시에 제도화의 영역으로 편입되도록 하는 것이다.
관련 사안이 비밀해제 되었을 경우 그 내용에 따라 만일의 경우 요구되는 수사의 시효는 해제 이후 5년으로 하는 등, 한 세대에 걸친 시간이 지났다 해도 유야무야 되지 않고 진상도 밝히면서 사법적 차원의 책임문제도 배제하지 않고, 그와 함께 이에 대한 정치적 평가와 사법적 판단도 당장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 처리해나갈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당장의 문제 해결 방안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당선자가 이 문제를 놓고 깊이 논의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작업과 책임을 공유하는 일이며, 필요하다면 야당 책임자도 동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걸고 진심과 충정으로 이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다. 그만한 지도력을 정치권은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공과 함께 정치적 과오도 적지 않았으나, 적어도 남북관계의 개선과 역 봉쇄전략의 기조를 이 정도로 마련하고 퇴임하는 노(老) 대통령의 등을 떼밀 듯 하면서 공개해명과 사과 등의 요구를 하는 것은 대통령직 마무리 작업과 관련한 비극의 되풀이이다. 또한, 민족의 문제를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정파대결의 지겨움을 반복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실로 이 문제와 관련한 더 이상의 적대적 논란은 분단극복의 민족역량 약화와 해체에 이바지하고 시대의 반동적 역전의 계기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미래를 내다보면서 남북관계의 정상적 장치를 만들자는 요구를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처한 현 단계의 냉엄한 현실을 고려, 반영하지 못하는 방식의 추구는 민족을 궁지에 몰아놓을 뿐이라는 것이다.
진정, 무엇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인지 심사숙고하는 치열함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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