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8일 말레이시아 텡쿠 아왕 재무차관에게 말레이시아 내에 조성된 조세회피지역인 라부안을 양국간 이중과세방지협약의 적용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도록 협력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재무장관회의에 참석 차 한국을 방문중인 텡쿠 아왕 차관과의 양자회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말레이시아 정부와의 협상, 너무 지지부진하다**
한 부총리는 9일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FT)와의 인터뷰에서 "외국인 투자를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은 규제나 조세 상 특혜를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 부총리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엇갈리는 평가가 나오는 것 같다.
일부에서는 정부 내의 대표적인 개방론자로서 외국인 투자의 긍정적인 점을 과도할 정도로 부각시켜 온 한 부총리가 일부 외국인 투자자의 조세조약을 이용한 조세회피 행위(treaty shopping)에 반대한다는 선을 분명히 그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지난해 말 이후 일부 외국계 펀드의 조세회피에 대해 그 폐해가 여러 차례 지적되었고, 특히 라부안의 경우 말레이시아와 기존 조세협약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부가 여러 차례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진전된 게 없다는 점에서 실망한다. 정부가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 지지부진한 것이 아쉽다는 말이다.
필자는 대체적으로 한 부총리의 발언에 대해 긍정적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지만 아쉬운 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난 6월 5일 재정경제부는 '조세조약을 이용한 조세회피 행위에 대한 대응 추진'이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조세피난처를 경유한 내외국인 자본의 조세회피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국내법을 보완하고 조세조약을 개정하는 작업을 추진할 계획"임을 밝힌 적이 있다.
이에 따라 6월 7일부터 10일 사이 말레이시아와 조세조약 개정을 위한 2차 협상을 추진할 계획이었고, 여기서 라부안을 조세조약 적용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한 부총리의 발언을 보면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은 83년 1월 말레이시아와 조세조약을 맺었다. 본래 조세협약이라는 것은 양국간의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양 국가가 이중으로 과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느 한쪽에서만 과세하기로 약속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세피난처와 조세협약을 맺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즉 조세협약에 따라 세금을 안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말레이시아의 경우 조세협약이 맺어지고 한참 후인 90년대 중반에 라부안 지역을 조세피난처로 대우함에 따라 결과적으로 라부안을 통해 국내에 투자를 하면 이에 따른 주식양도차익, 이자, 배당, 사용료 등 투자소득에 대해 과세를 회피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정부의 '양면의 노력', 결실 맺을까?**
조세협약을 악용한 조세회피 행위에 대해 정부가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해당 국가와의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다. 제3국 거주자가 조세피난처를 경유해 국내에 투자함으로써 조세조약의 혜택을 향유하는 조세조약 남용 사례에 대해서는 조세조약을 배제하도록 하는 내용을 조약에 명시하는 것이다. 한 부총리가 말레이시아 차관에 요청한 것은 이 같은 맥락의 접근 방식이다.
둘째는, 내 외국인이 조세피난처에 조세회피 목적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우회적으로 국내에 투자하면서 조세조약의 혜택을 향유하는 경우 실질투자가를 기준으로 조세조약을 적용하는 내용을 국내 세법인 '국제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에 명문화하는 것이다. 명목상 법인의 본부가 해외 조세피난처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질적인 법인이 아니라면 그것의 법인격(法人格)을 부인하고 국내에 있는 실질투자가에게 세금을 매긴다는 말이다.
필자가 한 부총리의 발언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다는 이유는 그간 정부는 말레이시아와의 조세협약을 개정하는 노력 이외에도 올 정기국회에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국제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이 개정안은 국회에 제출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법률 개정안이 제출되고 통과될 경우 말레이시아 당국의 협조와 관계없이 부당한 조세회피 시도를 막을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말레이시아는 조세협약의 개정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실리와 명분을 모두 잃게 된다는 점에서 조세협약의 개정을 위한 훌륭한 압력수단이 될 것이다.
***일부 외국계 펀드들, 수천억 원씩 법인세 떼먹은 셈**
물론 왜 진작 법을 개정하지 못했는지 아쉬움은 남는다.
라부안이 국내에 알려지게 된 것은 미국계 사모펀드인 뉴브리지캐피탈이 제일은행을 인수하면서 그 인수주체를 말레이시아 라부안 소재 페이퍼컴퍼니로 했기 때문이다. 2000년 1월 뉴브리지캐피탈은 예금보험공사가 보유한 제일은행주식 51%를 5000억 원에 인수했는데, 이 주식의 인수자가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소재한 페이퍼컴퍼니 KFB Newbridge Holdings였다.
KFB는 제일은행(Korea First Bank)의 영문 약칭이다. 페이퍼컴퍼니를 만드는 것이 선진금융기법인 것처럼 받들어지던 때의 일이라 이러한 지배구조는 사회적 의구심을 피해갈 수 있었다.
한미은행(현 한국씨티은행)을 인수했던 미국의 칼라일 펀드 또한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KAI(Private) Ltd. 라는 이름의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해 이것이 한미은행의 인수 주체가 되도록 했다.
그 뒤 뉴브리지캐피털은 제일은행을 영국 스탠다드차타드뱅크에 매각하면서 남긴 투자차익 1조1500억 원, 칼라일은 한미은행을 미 씨티뱅크에 매각하면서 남긴 투자차익 7000억 원 등에 대한 세금을 회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법인의 경우 1조1500억원의 투자차익을 남겼다면, 이에 따른 법인세 등의 납부금액이 4000억 원 대를 넘었을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지난해 국내 대기업들 중 1조 원 이상의 법인세를 납입한 대기업이 삼성전자(1조6000억 원), 포스코(1조1000억 원) 등 단 두 기업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 천억 원의 조세회피는 국민경제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라 할 것이다.
투자 2년 만에 7532억 원의 주식양도 차익을 남긴 소버린의 경우 조세회피지역 버진 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 크레스트 시큐러티스를 설립해 SK(주)에 투자하는 형식을 취했었다. 주식의 양도차익에 대해 현행 조세체계는 과세를 하지 않지만 국내 기업의 경우 주식의 양도차익 또한 법인의 수익으로 잡혀 법인세 부과대상으로 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법 개정 전이라도 국세청이 실질과세 나서라"**
아무튼 정부가 국내 세법을 보완해 조세피난처의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국내 투자이익에 대해 세금회피를 봉쇄할 수 있는 제도적 노력을 기울이게 됨에 따라 외국 투기자본들은 해당 세법이 통과되고 발효되기 전에 국내에서 이익을 실현하고 탈출을 시도할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 이전에라도 정부는 실질투자가를 기준으로 얼마든지 과세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투자차익을 실현한 뉴브리지캐피탈 같은 외국자본에 대해서도 추징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즉 OECD 모델 조세조약 주석서의 내용에 따르면, 조세조약 남용을 방지하는 규정을 조약 상에 명시하지 않더라도 실질과세 원칙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지난 봄 일부 외국 투기자본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 국세청 또한 이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투기자본의 조세회피를 문제 삼는 것은 그것이 배가 아파서도 아니고, 경제가 어렵고 돈을 써야 할 곳은 많은데 거둬들인 세금은 부족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일부 자본이 다른 자본에 비해 경쟁에서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됨에 따라 오히려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과 시장 경쟁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자본시장의 발달에 긴요한 이른바 명성(reputation)을 지닌 장기적이고 책임 있는 기관투자자의 육성을 저해하고 단기적이고 횡재를 추구하는 투기적 자본이 활개 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결국 '돈 주고 뺨 맞는' 어이 없는 사태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제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시급히 국회에 제출해야 할 것이다. 또 법 개정 이전에라도 국세청이 실질과세 원칙에 따라 일부 국내외 자본들이 조세피난처를 이용해 조세회피 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도 과감한 세금부과 조치를 내릴 것을 기대한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