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때의 개혁정치가 조광조는 ‘남에게 도덕을 강요하는’ 도덕주의적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도덕적 원칙을 지키며 사는’ 도덕적인 사람이다. 그가 임금과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펼칠 수 있었던 바탕도 이같은 개인의 철저한 도덕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34세에 관직에 나가 38세에 사약을 받고 죽기까지 짧은 그의 생애는 지행합일(知行合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 자체였다. 하지만 이 완벽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성리학적 이상정치는 무오사화와 함께 참혹한 실패로 돌아갔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공포정치로 유명했던 공안위원회 의장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이상을 위해 타인에게 엄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는 더욱 엄격했던 사람이다. 대개의 프랑스 혁명을 기술한 책들은 ‘단두대’의 공포를 그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있지만 청렴결백함과 혁명을 향한 굳건한 신념에 대한 평가를 빠뜨리지 않는다. <프랑스혁명사>의 저자 A. 마티에가 “그가 체포되지 않았다면 수천만 명의 희생 위에 계속된 프랑스혁명이 단축되었을 것"아라고 말한 로베스피에르도 ‘조광조’처럼 단두대 위에서 급진 정치의 이상을 접었다.
조광조와 로베스피에르. 두 사람의 생을 비교하다 보면 재미있는 세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자신들만이 옳다는 정치적 순혈주의자(純血主義者)의 모습이다. 따라서 현실세계의 반대자들인 ‘사악한 기득권층’과는 철저하게 패를 갈라놓고 개혁과 혁명의 이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조광조는 자신을 따르는 사림세력을 군자(君子)라고 칭하고 훈구파를 비롯한 반대세력을 소인배(小人輩)라고 칭했다. 로베스피에르 역시 공안파를 제외한 비 순혈(純血) 혁명세력을 분리해서 단두대로 보냈다. 심지어는 조광조의 맹목적 순혈주의는 궁중에서 만난 대신(소인)들과의 목례도 거부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우리들 중에 적이 있다"며 동지들 속에서도 패를 갈랐다.
둘째는 두 사람 모두 세상 정의를 위해 가진 자들을 덜 갖게 하는 정책을 펴기보다 이미 가진 것을 철저히 빼앗는 데 힘썼다. 조광조가 주특기인 상소를 통해 반정공신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도하여 수많은 적들에게 자초해서 둘러싸여 버린 일, 로베스피에르가 반혁명 분자의 재산을 빼앗고 단두대로 보낸 사례는 개혁정치의 이상이 미래지향이기보다 철저히 과거지향이고 보복적이라는 데 있다.
셋째는 두 사람 모두 탁월한 개혁정치가임에도 개혁피로감에 지친 지지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일이다. 훈구파의 모함이 원인이었지만 지지기반이었던 임금까지 3-4일에 한 번꼴로 올라오는 조광조의 강력한 개혁 상소에 넌더리를 냈다 하니 당시의 상황이 짐작된다. 로베스피에르 역시 그가 요구하는 순혈주의에 동참할 수 없었던 동지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결국 역사를 1백년 앞당길 수 있었던 개혁정치의 이상이 전략 없는 급진적 이상주의에 의해 1백년 이상을 후퇴한 형국이 됐다.
역사를 읽다 보면 때로 과거와 현재 사이에 무수한 다리가 놓여져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과거사 규명, 행정수도 이전, 보안법 철페, 사학법 개정, 언론법 개정 등 지금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이 나라의 도덕적(?) 이상주의자들의 정치게임도 크게 보면 당대의 상황과 무관하지만 않은 것 같다. 함께, 천천히 그리고 포용하며 가는 것이 ‘진정한 정치’라는 것을 때 묻은 오늘날의 정치가보다 훨씬 도덕적으로 살다간 두 사람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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