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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일본 수교교섭 15년의 이상한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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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일본 수교교섭 15년의 이상한 궤적'

하루키-매코맥 '북일관계의 비판적 회고' <1> 역사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지만 임기 중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국교정상화 협상은 평양선언에 따른 것이고 북한도 평양선언을 존중한다는 입장인 만큼 협상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자신의 임기인 내년 9월까지 국교를 정상화하겠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능한 노력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헨닌(變人: 이상한 사람)'이란 별명을 가진 고이즈미 총리는 그 별명답게 독특한 정치행보를 보이고 있다. 대미 밀착외교,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무시한 야스쿠니신사 참배 강핸 등 보수적 정치노선을 걷고 있으면서도 유독 북일관계 정상화에 대해서는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그의 첫 평양방문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북일관계 정상화에 대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일본지도자로서는 최초의 평양방문을 통해 본격적인 북일수교 교섭의 물꼬를 튼 만큼 그 결실도 거두고야 말겠다는 개인적 정치야망도 작용했겠지만 북일관계 개선이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크게 기여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냉전종식 직후인 1990년 9월 시작된 북일간의 수교교섭은 15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으로 본격화됐던 수교교섭도 뒤이은 미국의 '북핵 농축우라늄 개발' 의혹 제기,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대한 일본 국민의 거센 반발 등으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냉전종식 후 불과 2년 안에 남한은 과거의 적대국가들이던 소련 및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한 반면 북한의 대미, 대일 관계는 여전히 적대적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같은 외교관계의 비대칭성, 즉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동아시아 불안정의 근본적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북일관계의 정상화는 북핵문제의 해결 및 이에 따른 북미관계 개선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진전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인 스스로에 의한 동아시아 안정과 평화의 달성이 얘기되고 있는 요즘 북일수교 교섭 15년의 궤적을 비판적으로 점검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일본과 호주의 저명한 한반도전문가인 와다 하루끼 교수(도쿄대)와 개번 매코맥 교수(호주 국립대)가 함께 쓴 '북일 수교교섭 15년의 이상한 궤적(The Strange Record of 15 Years of Japan-North Korea Negotiations)'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앞으로 5차례에 걸쳐 소개될 이 글은 미국의 한반도전문가 존 페퍼가 편집해 곧 출판할 예정인 '한미관계의 미래(The Future of U.S.-Korean Relations)'에 실릴 글을 증보ㆍ수정한 것으로 원문은 ZNet 9월 4일자(http://www.zmag.org/content/showarticle.cfm?SectionID=17&ItemID=8668)에 실려 있다. <편집자>

***'북일 수교교섭 15년의 이상한 궤적'**

어떤 나라도 일본만큼 한반도(Korea)와 가까운 나라는 없다. 고대로부터 두 나라는 긴밀한 교류를 누려 왔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한민족의 2개 국가 중 한 국가와만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나마 그 관계도 순탄치 않다. 일본은 1965년 대한민국(남한)과 관계를 정상화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아직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이 비대칭성은 일본과 한반도 관계의 복원은 물론 아시아에서의 냉전 종식에도 주요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최근 4년간 2차례나 북한을 방문해 북일관계의 타개 전망을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교 정상화의 진전은 여전히 교착 상태에 있다. 수교교섭과 관련해서는 몇 개의 중요한 쟁점들이 있다. 북한의 전반적 군사태세,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그리고 70-80년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등이 그것이다. 협상테이블로 돌아가 이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일본 두 나라가 이 중요한 쟁점들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 양국 갈등의 역사적 근원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한다.

***역사**

일본-한반도 관계에서 역사는 아직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남북한의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서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5년 남한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됐을 때 일본은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도, 유감표명도 하지 않았다. 1995년 8월이 돼서야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총리가 40년간의 식민지배에 따른 고통과 피해에 대해 유감과 사과를 표명했다. 그로부터 3년후 일본과 남한 정부는 무라야마 담화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하지만 국교정상화 후 40년이 지나고 매년 수백만의 양국 국민과 수십억 달러의 재화가 교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상처는 조금도 아물지 않았으며 아주 쉽사리 곪아터지곤 한다. 예를 들어 (올해 초) 일본이 독도(일본명으로는 타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자 남한 전역에서는 격렬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그 후 남한의 노무현 대통령은 삼일절 경축사에서 95년의 무라야마 담화와 98년의 한일공동성명이 충분치 못했다며 일본을 비난했다.

한국전쟁에서의 일본의 역할도 주요한 쟁점 중의 하나다. 남한을 돕기 위해 미국이 전쟁에 개입했을 때, 일본은 자동적으로 미국의 군사, 병참, 기술적 활동의 주요한 기지가 됐다. 일본의 국영철도, 연안경비대, 그리고 적십자사 등이 모두 미국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했다. 일본의 항해사들이 미 제1해병사단의 인천상륙을 인도했으며, 일본 연안경비대의 소해정들은 원산 앞바다의 기뢰를 제거해 미군의 원산 상륙을 도왔다. 전쟁기간 내내 미국의 B-29 폭격기가 요코다(도쿄 인근) 및 가데나(오키나와) 기지에서 발진해 북한의 마을과 댐, 그리고 여러 시설들에 대해 끊임없는 공습을 가했다.

일본이 이처럼 미국의 전쟁노력에 협력한 것은 일본 정부의 자체 결정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패전국이자 피점령국가로서 점령 당국(미국)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일본 국민들은 자신들이 한국전쟁에 참여했다는 느낌이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지만, 북한은 일본을 미국 및 남한에 전면적 지원을 제공한 적대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적대행위가 멈춘 지 52년이나 지났건만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않은 채 한반도의 휴전상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에는 여전히 미국의 군사기지들이 있으며 일본과 북한은 여전히 대결 상태로 남아 있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미국과 일본의 군사기지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위조여권을 소지한 스파이와 간첩선을 보내고, 때때로 일본인을 납치하는 (아마도 해외에 파견할 첩보요원의 여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등 불규칙적인 활동을 벌였다.

1990년대 북한의 중거리 미사일 개발 및 배치, 그리고 핵무기 개발 의혹 등으로 북일간의 긴장이 고조됐다. 1945년 미 핵공격의 피해자로서 일본 국민은 이웃나라 중에 새로운 핵무기 보유국가가 생겨나는 데 대해 지극히 민감하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고, 일본을 겨냥한 미사일 배치를 중단시키는 것은 북일 수교교섭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다. 반면 북한측은 당연히 일본 내 미군기지들에 대한 제안들을 내놓을 것이다.

식민지배가 끝난 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90년 9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북일 간의 교섭이 시작됐다. 북한은 냉전이 끝나고 남한이 소련과 수교하는 것을 보고 나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면서 북한의 문을 두드렸다.

자민당의 가네마루 신, 사회당의 다나베 마코토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이 다케시다 노보루 총리의 개인친서를 휴대하고 북한을 방문했다. 양국 국교정상화에 관한 북한 로동당과 일본 자민당, 사민당 간의 3당 선언이 채택됐다. 일본측은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배가 초래한 고통과 불행, 그리고 해방 이후 45년간 북한측에 입힌 피해 등에 대한 유감 표명 및 배상 용의와 함께 양국간 국교 수립 의사를 밝혔다.

북일 수교교섭은 1991년 1월에 시작돼 1992년 5월 중단될 때까지 8차례 진행됐다. 1945년 이후의 북한측 '피해'에 대한 보상을 일본이 완강하게 거부한 것(3당합의에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일수교에 대한 남한 정부의 부정적 태도, 북한 핵계획에 대한 의혹,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압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교섭은 진전되지 못했다.

가네마루 자신은 1992년 11월 부패 혐의로 구속됐다. 1995년 무라야마 정부는 교섭 재개를 위해 노력했으나 약간의 쌀을 북한에 지원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당시는 북일 화해에 적절한 시점은 아니었던 것이다. 1993-94년 미국과 북한을 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고갔던 핵위기는 물론이고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간첩선의 일본 영해 침범 등이 수교 교섭을 어렵게 만들었다.

더욱 불길했던 것은 하나의 이슈가 다른 모든 문제들을 압도할 정도로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15년여전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였다. 의혹은 1980년대부터 제기됐다. 그리고 1987년, KAL 858기가 안다만 해상에서 공중폭발해 승객 11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남한은 북한 여성 김현희를 범인으로 지목해 법정에 세웠는데, 그녀는 위조된 일본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김현희는 일본에서 납치된 한 여성이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그녀의 이름은 이은혜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수 년 후,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의 한 요원이 북한의 특수요원훈련소에서 메구미라는 이름의 여성을 봤다면서 그 증거를 제시했다. 1977년 요코다 메구미가 니가타에서 실종됐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13세였다. 그녀의 부모는 즉각 딸의 실종을 이슈화했고 피랍일본인 구조를 위한 운동이 시작됐다. 그 뒤 납치문제는 2005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북일 화해를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로 남아 있다.

(번역: 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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