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북한의 일본인 납치가 사실로 드러나고 이들 중 5명이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북일관계는 악화됐으며 이로 인해 대북 강경파의 입지가 강화됐다. 예를 들어 2004년 2월 일본 의회는 북한과의 교역 및 대북 송금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북 경제제재를 위한 법률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이 법을 집행할 의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강경파는 북한을 위협하기 위해 이 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수교교섭을 재개하기 위한 막후 협상은 계속됐다. 2004년 5월 22일, 고이즈미 총리가 김정일을 만나기 위해 두번째로 평양을 방문했다. 고이즈미는 평양으로 떠나기에 앞서 자신의 방북 목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현재의 비정상적인 일북관계를 정상화하고, 적대적 관계를 우호적 관계로 바꾸며, 대결을 협력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양국의 국익에 부합된다."
평양에서 고이즈미는 북일수교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재확인하고 평양선언이 준수되는 한 북한에 대해 경제제재를 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그는 또한 식량 25만 톤, 100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 지원과 함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대하여 북한측은 일본으로 돌아간 피랍자 5명의 영구 귀국을 적극 검토하며, 이들 자녀의 일본 귀환도 허용하고, 미군 탈영병 찰스 젠킨스와 그의 가족(아내 소가 히토미와 두 자녀)이 제3국에서 상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행방이 불투명한 피랍자 8명에 대해서도 "성실한 재조사"를 할 것을 약속했다. 양 측은 평양선언의 기본정신으로 되돌아가 건설적 교섭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그 뒤에 고이즈미는 의회에서 북한지도자 김정일에 대해 "나도 처음에는 독재자, 무시무시하고 괴퍅한 사람이라는 상상을 했었는데 막상 그를 만나 얘기를 해보니 점잖고 활기차며, 농담도 잘하고 유머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고이즈미는 김정일이 더불어 일을 도모할 만한 사람이라는 김대중 대통령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등의 의견을 재확인한 것이다. 사실 김정일은 조지 부시와의 대화를 고대하고 있다는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고이즈미가 반주를 해준다면 부시와 함께 목이 쉴 때까지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이즈미는 자신의 남은 임기 2년 내에, 가능하다면 1년 내에 북일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피랍자 가족 단체들은 고이즈미의 방북이 "최악의 성과"를 낳았다며 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소가의 가족들을 데려오지도 못했고, 피랍자들의 운명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부분의 TV 진행자와 해설자들은 그의 방북을 "외교적 실패"로 규정해 이들의 비판에 맞장구쳤다. 그러나 방북 다음 날인 5월 23일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7%가 고이즈미의 방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북일 국교수립에 대해서도 47%가 찬성한 반면 반대는 38%에 그쳤다. 마이니치와 요미우리 등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고이즈미를 매우 감정적으로 비판한 피랍자가족 단체들에는 전국 각지에서 항의편지가 쇄도했다.
두 번째 고이즈미 방북의 성패는 종적이 묘연한 피랍자 8명에 대한 재조사의 결과에 달려 있었다. 11월의 최초 보고서는 이렇다 할 내용을 담지 못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일본대표단은 이들 8명 모두 사망했으며, 그 외에 북한으로 납치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일본인(소가 히토미의 어머니를 포함하여)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는 북한 측 조사내용을 전했다. 또한 재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 8명에 대한 기록의 대부분이 삭제됐으며 극히 일부의 문서들만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 측 조사요원은 사건 관계자들과 면담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요코다 메구미의 남편 김철준이었다. 2002년에 북한 측은 김철준이 "무역회사 직원"이라고 주장했으나 2004년에 와서 그는 김정일이 납치의 주범으로 비난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특수기관"의 요원임이 드러났다. 김철준은 일본 측 관리들과 2시간반에 걸쳐 얘기를 나눴지만 사진 촬영과 비디오 촬영, 그리고 그가 실제로 김혜공의 친부임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유전자 감식을 거부했다. 나아가 그는 자신과 요코다 메구미, 그리고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져가겠다는 일본 측 관리의 요구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매장했다가 그 후 화장하면서 수습했다는 메구미의 유해를 내주었다.
12월 8일, 호소다 히로유키 관방장관은 일본 측 공식조사의 결과를 발표했다. 국립경찰과학연구소는 판독불가였던 반면, 유전자감식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데이쿄대학 의학부는 보다 성공적이었다. 유해에서 DNA를 추출해낸 결과, 메구미의 DNA는 찾아낼 수 없었고, 다른 두 사람의 DNA가 검출됐다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유해가 메구미의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고 "상대측의 조사가 성실하지 못한 데 대해 지극히 유감스럽다"고 발표했다. 평양에 대해 강력한 항의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12월 24일 일본정부는 평양에서 가져온 유해에 대한 자세한 조사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8명 모두가 사망했다는 북한 측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는 일본정부는 "이들이 아직 생존해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면서 이들의 즉각적인 송환을 요구했다. 이같은 요구는 엄청난 논리의 비약이었음에도 불구하고-북한 측 재조사가 이들 8명의 사망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이들이 필시 살아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나아가 이들의 송환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북한에 대한 분노의 함성 속에 묻혀 지나가고 말았다.
이른바 북한의 고의적 기만에 항의하기 위해 일본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동결했다. 일본의 지원이 인도적이 아니라 정치적임을 스스로 드러낸 꼴이었다. 그때까지 일본은 5월에 고이즈미가 약속했던 식량 및 의약품 지원의 절반 가량을 북한에 보냈다. 나아가 일본은 제재에 한걸음 더 다가갔다. 피랍자 8명이 살아 있으며 이들을 송환하라는 일본 측의 주장과 이들 모두 사망했다는 북한 측 주장 간의 괴리를 어떻게 메울지 참으로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북한의 공식 반응은 2005년 1월 24일 조선중앙통신의 "각서" 형식으로 나왔다. 각서는 문제의 유골과 관련해 국립경찰과학연구소와 데이쿄대학의 감식 결과가 달랐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중 한쪽 감식 결과에만 압도적 비중을 두는 것은 비과학적이며 부적절한 태도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문제의 유골이 섭씨 1200도에서 화장됐기 때문에 DNA분석으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전문가 의견란에 분석자의 이름이 명기되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분석의 결과가 "불순분자에 의한 조작"이라는 각서의 결론은 지나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 측 분석에 대해 각서가 제기한 문제점들은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서는 또한 일본 측이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유골이 전달될 당시 일본측 대표가 서명한 성명에는 "유골을 요코다 메구미의 가족에게 직접 전달할 것이며, 이 일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는 것이었다. 각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일본은 유골의 분석 결과를 조작하고 납치문제가 해결됐음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의와 노력을 완전히 무시했다. 북일관계를 최악의 대결상태로 몰아간 것은 일본 측 책임이다."
일본에서 북한 측 성명이 거의 신뢰받지 못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다. 유전자 분석과 관련한 분쟁에서 일본 측의 발표는, 최소한 초기 단계에서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의 기술력이 북한의 기만을 밝혀냈다는 분위기였다. 메구미의 행적에 관한 북한측 설명이 시작부터 전혀 일관되지 않았다는 점도 북한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녀의 사망일자도 바뀌었고, 그녀가 치료받은 병원도 분명치 않았다. 의사와 함께 병원 구내를 산책하다가 감시 소홀을 틈타, 소나무에 자신의 옷을 찢어 만든 밧줄을 걸어 목 매 자살했다는 설명도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또한 다른 2건의 사례에서 일본은 북한이 제공한 유골과 희생자 사이의 관련을 입증해내지 못했다.
일본은 북한의 항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북한은 뜻밖의 곳에서 원군을 얻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과학잡지 <네이처>는 2월 3일자 기사에서 데이쿄대학에서 유전자 분석을 행한 사람의 신원을 폭로했다. 이 분석가, 즉 데이쿄대학 의학부의 요시이 도미오는 자신이 화장된 유골의 유전자분석에 경험이 없으며, 자신의 분석 결과는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실토했다. 그는 유골이 "어떤 것도 빨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딱딱한 스폰지" 같았으며 누구라도 유골을 만진다면 아주 쉽게 오염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이 권위지는 일본 측의 유골분석 결과가 결코 단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게다가 데이쿄대 분석팀은 아주 작은 유골 샘플 5개를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제3자에 의한 독립적 검증도 불가능해졌다. 요시이 자신이 1999년에 쓴 DNA분석에 관한 교과서에서 DNA 추출과정은 매우 민감하며, 실수하기 쉽고, 법정에서 도전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제3자에 의한 독립적 검증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요시이는 일본정부를 대신한 분석에서 그 자신이 제시한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호소다 히로유키 관방장관은 <네이처>의 기사는 부적절한 것이며 분석 결과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네이처>는 매우 이례적인 사설로 응답했다.
"일본은 북한의 성명 하나 하나를 의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DNA 분석에 대한 일본의 해석은 정치적 간섭이 과학의 자유를 침범한 것이다. 유전자 검사를 실시한 과학자와의 <네이처> 인터뷰 기사는 유골이 오염됐을 가능성, 그리고 이에 따라 조사 결과가 확정적이지 않을 가능성을 제기했을 뿐이다. (…) 문제는 과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안에 정부가 끼어들었다는 데 있다. 과학은, 모든 실험은 불확정성의 가능성을 안고 있으므로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유전자 검사가 보다 대규모의 팀에 의해 수행됐어야 했다는 다른 일본인 과학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일본의 정책은 외교적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절망적 노력인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정치적, 외교적 실패의 부담의 일부가 과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합리적 의혹이 제기될 정도로 무리한 결론을 도출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북한과 일본의 마찰이 DNA 검사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DNA 검사 결과에 대한 해석이 양국 정부에 의해 결정될 수는 없다. 북한을 다룬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과 정치의 분리 원칙까지 파기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이례적인 공방은 한 주간지가 간략하게 언급한 것을 빼면 수 개월 동안 일본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유전자 감식 분야의 전문가들은 <네이처>와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아사히신문 5월 10일자는 원로 인류학자이자 국립과학박물관의 유전자 전문가인 시노다 겐이치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 보도했다.
"과학적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실험 자료가 공개되고,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한 독립적 기관의 추가 실험이 행해져야 한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6월 2일자에서 노리미츠 오니시 기자는 다른 일본인 전문가 3명의 견해를 보도했는데 이들은 북한이 보낸 유골에 대해 일본 정부가 요코다 메구미의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 이들 중 한 명(츠쿠바대 법의학과의 혼다 가츠야 교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시료에서 두 사람의 DNA가 검출됐고 이 둘 모두가 메구미씨의 유전자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 유골이 메구미씨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대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네이처>의 사설이 나온 지 1주일 후, 요시이 도미오는 도쿄도 경찰청 법의학과장이라는 권위 있는 직책으로 발탁됐다. 이에 대해 <네이처>는 요시이가 공무원 신분이 됨에 따라 언론과의 인터뷰가 금지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일본 의회에서 정부의 요시이 발탁이 "증인을 감추기" 위한 시도가 아니냐는 질문이 나오자 외무장관은 일본 과학의 순수성에 대해 그같은 비방이 나온 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다"고 응답했다.
유전자 감식 논란에 대한 피랍자 가족들의 반응도 정부의 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 요코다의 가족은 일본 측의 만족스럽지 못한 감식 과정과 북한 측의 불만을 무시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그들은 또한, 적어도 현재까지는, 손녀를 만나기 위해 직접 북한을 방문하거나, 북한 당국에 대해 만족스러운 해명이 나올 때까지 보다 성실한 재조사를 해줄 것을 직접 요구하는 등 추가적 행동의 가능성을 배제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도쿄 측 주장의 또 다른 허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요시이와 그의 동료들이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가운데 그의 선배 이시야마 이쿠오는 의학잡지 <마이크로스코피아>에 유전자 분석은 유골에 메구미의 DNA가 없다는 점만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당국은 요시이 보고서보다는 "다른 정보"에 근거해 유골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했다고 썼다.
만일 유골이 메구미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유전자 분석이 아닌 다른 증거에 근거한 것이었다면, 일본 정부는 자신의 결론을 뒷받침한 다른 증거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2005년 3월 31일, 북한 외무성 아시아국의 부국장이자 북일 교섭의 핵심인물인 송일호가 평양에서 일본 대표단을 만났다. 그는 일본이 식민지배와 납치를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다룬다면서 일본 측의 불성실을 비판했다. 25년 정도의 시간적 격차는 있으나 두 사안 모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연행이라는 20세기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이미 흘러간 일이고, 다른 하나는 현안이라는 식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납치문제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했으며, 이에 따라 2004년 11월 평양에서 관련 증인 16명을 일본 측과 면담시켰고, 나아가 메구미의 유골을 인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모욕당한 데 대한 북한정부의 엄중한 항의를 전달했다. 그는 마치 유전자 분석에 관한 요시이의 교과서를 읽은 것처럼 유골을 제3국에 보내 독립적 검증을 받게 하자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결론 내렸다.
"우리는 일본 없이도 살 수 있다. 고이즈미는 필요한 조치를 취했지만, 반대파에 의해 봉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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