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전문기자 오동진과 중견 영화평론가 김영진이 개봉영화 가운데 한 편을 골라 벌이는 사이버 영화논쟁을 매주 게재한다. 이번 주는 특정 영화를 골라 논쟁하는 대신 개봉 영화들과 한국영화계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나누는 장을 마련했다.
오동진 : 평론가들은 자성해야 한다. 김영진 : 왜? 오동진 : 요즘 들어 부쩍 영화를 너무 안보니까. 김영진 : 그건 당신과 내 얘기일 뿐이다. 다른 평론가들에게까지 덤터기 씌우지 말라. 오동진 : 하여간… 당신은 왜 그리도 영화를 안 보는데? 김영진 : 부끄러운 얘기다. 〈야수〉는 괜찮다고 해서 보려고 한다. 근데… 요즘 한국영화 보기가 가끔 겁이 난다. 〈태풍〉 이후에 내게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인데, 어쨌든 이제는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영화는 되도록 피하고 싶다. 굳이 평론을 원하지 않는 영화까지 보면서 잔소리를 해대는 기분이 들어서.
오동진 : 어쨌든 일단 당신이 요즘 유일하게 본 〈싸움의 기술〉에 대해서 한마디 해봐라. 김영진 : 기대는 창대하였으나 결말은 미미하였도다. 오동진 : 어디엔가 영화가 백윤식의 연기만 탕진시켰다고 썼더라고? 김영진 : 백윤식의 미니멀리즘 연기는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드는데. 문제는 연출이 너무 미숙하다. 관점도 나이브하고.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파고들 여지도 많았고. 근데 뭐든지 겉만 훑는 느낌을 준다. 마초영화라는 게 겉만 훑으면 보기가 참 불편해지는 법이다. 내가 새삼스럽게 페미니즘 등등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공인된 마초영화 애호가인 나로서도 보기가 불편했던 영화라는 거다. 너무 낯간지러워서. 오동진 : 영화는 그저 재미있어야 한다는 강박증이 요즘 한국영화계를 지나치게 지배하는 거 아닐까? 김영진 : 재미있어야 한다는 건 대중 영화의 기본적인 사항이긴 한데 그게 서투르면 선수들끼리도 얘기하고 싶지가 않다. 대중영화에 있어 재미라는 걸 깊이와 별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물론 없겠지만 나 같은 관객을 자극/반응 모델의 실험대상으로 여기는 듯한 피상적인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오동진 : 이럴 때일수록 〈브로큰 플라워〉니 〈온 더 로드, 투〉니 〈올리버 트위스트〉니 등등을 더 봐줘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내가 요즘 이상해진 건지, 예전보다 작은 영화들을 더 보기가 힘들어진 것 같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그래도 로만 폴란스키 작품인데 단관 개봉중이니… 김영진 : 나도 올해 들어 반성을 많이 하고 있고, 앞으로는 그런 영화들을 더 찾아다니며 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오동진 : 그 와중에서 커티스 핸슨의 〈당신이 그녀라면〉은 일종의 발견이었다. 김영진 : 어떤 점에서? 오동진 : 로저 에버트가 이렇게 썼더라구... 〈당신이 그녀라면〉은 평범한 소재로 시작해 특별하게 끝나는 영화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기대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감동을 자아낸다. 좋은 시처럼,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 적절하게 우리의 허를 찌른다. 커티스 핸슨 감독은 97년 〈LA 컨피덴셜〉을 거쳐 2000년 〈원더보이스〉, 2002년 〈8마일〉을 만들었다. 세 영화를 서로 완전히 다른 작품들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세 편은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다. 즉, 글이 가진 변화의 힘이란 공통분모가 있는 것이다. 첫번째 영화는 가십 저널리즘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대학 캠퍼스의 작가들에 관한 이야기였으며, 세 번째는 힙합 시인(에미넴)에 관한 영화였다. 삶은 결국 독서로 인해 변화한다. 김영진 : 아하, 재미있군. 오동진 : 삶은 독서로 인해 변화한다... 영화론자들이 추구해야 할 인문학적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진 : 나도 동감한다. 영화만을 봐서는 사람들이 변할 것 같지가 않다. 영화를 보고 감동한 사람들이 그에 관련된 어떤 책을 읽어야 변할 것 같다. 오동진 : 맞다. 이 영화에도 중간에 엘리자베스 비숍이란 여류시인의 시가 나온다. 'One Art'란 제목의 신데, 한마디로 감동이다. 이런 대목이 나온다.
The art of losing isn't hard to master; so many things seem filled with the intent to be lost that their loss is no disaster.
김영진 : 음… 해석해 봐라. 오동진 : 음…그건 당신이 직접 해라. 어쨌든 이 영화에서는 특히 카메론 디아즈와 토니 콜레트의 연기가 일품이다. 카메론 디아즈는 참으로 독특하고 뛰어난 배우다. 〈미녀 삼총사〉에서 〈빙 존 말코비치〉까지 아우르는 배우다. 카메론 디아즈는 여기서 말썽 많은 동생으로 나온다. 언니는 토니 콜레트고. 근데 디아즈는 난독증이다. 그래서 원치 않는 사회적 '상실'이 많았던 인물이다. 이 디아즈가 영화 중간에 비숍의 시, '상실의 기술'을 읽게 되고 조금씩 난독증을 고쳐 나간다. 아… 난 이 장면을 보면서 영화의 원작을 읽고 싶었다. 디아즈처럼 우리가 갖고 있는 '사회적 난독증'을 책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영진 : 우우, 재밌군. 오동진 : 이런 영화를 보면...아주 평범하고,심지어 신파의 기운이 물씬물씬 풍겨 나오는 얘기지만 그게 오히려 우리의 일상과 근접해 있다는, 아주아주 역설적인 리얼리티가 느껴진다. 감독의 연출이란 건, 그런 걸 끄집어 내는 게 아닐까 싶다. 일상의 특별함이나, 특별함 속에 있는 일상을... 김영진 : 맞다. 그게 미국영화의 힘이기도 하다. 대사와 인물의 힘. 블록버스터를 뺀 대개의 할리우드 영화엔 여전히 그런 힘이 펄펄 끓는다. 오동진 : 맞다. 그런 점에서 난 종종 미국을 미워할 수 없다. 〈LA 컨피덴셜〉을 만드는 감독이 〈당신이 그녀라면〉을 만들 수 있는 풍토… 단순한 얘기 같지만 그런 게 우리가 배울 점이 아닐까 싶다. 김영진 : 근데 그게 또 커티스 헨슨이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이기도 하다. 그 사람만 해도 미국영화 지형에선 특출한 사람이니까.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계는 뭔가 위태롭다. 신인감독들이 너무 많고. 감독들 모두 언제 명줄이 끊길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고. 중견감독의 커리어가 인정받지 못하고 영화 한 편 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되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직업인으로서 꾸준히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 커리어를 쌓는 그런 시스템은 아직 멀었다.
오동진 : 맞다. 공감한다. 〈퍼햅스 러브〉도 썸 업이다. 김영진 : 그 사람의 커트 감각이라면 뮤지컬을 잘 찍었을 것 같은데? 그는 영화의 액션을 이해하는 사람이니까. 꼭 쌈박질이나 댄스가 아니더라도 등장인물 손짓 하나의 액션에도 방점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니까. 당연히 뮤지컬에도 잘 적응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동진: 난, 진가신이 참 특별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이 인간은 참으로 줄기차게 러브스토리에 매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긴 하는데, 그 러브스토리가 치졸하지 않다. 마치 어떤 느낌이 드냐면, 정치드라마나 사회적 이슈의 영화를 만들면 러브스토리를 넣을 수 없지만 러브스토리 안에는 앞의 것을 다 넣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의 러브 스토리에는 그래서 세상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 세상 이야기가 진솔하다고 느껴진다. 그게 바로 진가신의 영화적 진심이 아닐까 싶다. 김영진 : 난 진가신 영화에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러브스토리에 많은 걸 포함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데 동의한다. 오동진 : 이 뮤지컬영화의 특징은 노래나 춤을 이용해서 보는 사람들의 감정을 과잉시키지 않는다는 거다. 김영진 : 아하. 오동진 : 〈물랑루즈〉나 〈시카고〉는 노래, 음악, 춤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어떤 엑스타시, 의도된 감정으로 몰고 가는데 진가신의 이번 뮤지컬은 그렇지가 않다. 김영진 : 그렇다면? 오동진 : 오히려 굉장히 냉정하게 만들고, 차분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게 하기보다는 사랑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건 내 얘기가 아니고 최상희 기자의 얘기다. 김영진 : 그게 진가신의 특징이다. 〈첨밀밀〉도 내가 보기에는 가장 차분하면서 잔상이 많이 남는 멜로였다. 오동진 :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에 대해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김영진 : 그거 재밌는데?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군. 원래 브레히트 연극이 장 뤽 고다르 식의 건조한 지적 장치가 아니라 재미있으면서도 사색거리를 전해주는 그런 거였다고 하더라.
오동진 : 〈나니아 연대기〉 등등의 영화를 안본 건 당신이나 나나 문제다 문제. 김영진 : 글쎄 왜 그럴까? 영화가 청년 처녀들의 것이어서 그런가? 오동진 : 그래도 트렌드는 지켜봐야 하는 거니까. 김영진 : 근데 그 트렌드라고 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아니어도 지켜볼 사람이 많은 것 아닌가 싶다. 오동진 : 판단이 잘 안 서. 어째야 하는지. 세상이 평론을 필요로 하는지, 평론이 세상을 필요로 하는지... 김영진 : 난 이제부터는 평론가가 정말 평론을 원하는 영화를 찾아다니며 악수해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요즘 영화는 너무 반질반질해. 더러운 세상을 그려도 너무 반질반질하다.
오동진 : 요즘 가장 보고 싶은 작품은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딥쓰로트〉다. 김영진 : 그거 퍽 재미있다더군. 나도 챙겨 보려구 오동진 : 데니스 호퍼가 내레이터를 맡았다니..그거 생생할 것 같다. 그럼 다음 토크는 이 영화로? 김영진 : 흠…그래도 〈야수〉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음 주에 〈야수〉로 만납시다. 그 다음엔 〈무극〉을 하고. 오동진 : 그럽시다. 이번 주말에는 서로 열심히 영화를 봅시다. 수고했음. 김영진 : 수고. 그럼 다음 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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